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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판타영화제2005 가이드 [3] - 판타스틱 영화세상
박은영 이영진 2005-07-12

상상력의 무한궤도를 달린다

<빈센조 나탈리의 휑>

<큐브> 감독의 기발한 앵글과 엽기발랄 유머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진짜로, 완전히 실화입니다. 감사합니다.” 막이 오르면,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한 이야기며, 배우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문구가, 세번 연달아 나타난다. 오프닝 자막부터 수상쩍은 이 영화는 기이한 공간 탈출기 <큐브>를 만들었던 빈센조 나탈리의 최근작으로, 제목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휑’하게 만든 두 친구의 이야기. 광장공포증이 있는 앤드류는 두개의 도로가 교차하는 곳에 위태롭게 지어진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살아간다. 유일한 친구 데이브는 그보다는 사회적이지만, 여자친구가 자기를 이용해 회삿돈을 횡령하는 줄도 모르는, 모자라고 산만한 인물. 함께 살던 집에 철거반과 경찰이 들이닥치자, 이들은 모두가 사라져버리길 기도하고, 사방이 조용해진 걸 느낀다. 밖으로 나가보니 사람도 건물도 아무것도 없이, 흰 도화지로 남겨진 공백뿐이다. 이들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걸 알게 된다. 이때부터 하얀 공백 속을 헤매고 길을 잃고 다투는 두 친구의 이야기가 기발한 앵글과 효과 안에서 펼쳐진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심리를 탁월한 상상력으로 풀어온 빈센조 나탈리가 극단적 미니멀리즘과 엽기발랄한 유머를 보태 완성한, 우정에 관한 역설적인 우화.

<X됐다, 피트 통>

담백한 이야기 전개와 감각적인 디제잉, 음악

스페인 이비자 섬에서 화려하게 살아가던 스타 디제이 프랭키는 청력을 잃는다. 레이브파티가 일터인 프랭키는 자극적인 소음을 멀리하라는 의사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청각은 급격히 악화된다. 관중과 소속사에서 외면당하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은 그는 진공 같은 침묵, 고독과 무기력 속에서 마약에 의존해 살아간다. 어느 날 머리에 다이너마이트를 동여맨 그는 도화선에 붙은 불을 황급히 끄고, 어쨌든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X됐다, 피트 통>은 언뜻 ‘인간 승리’의 갱생드라마로 비치는 스토리라인이지만,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한 주인공이나 화려한 스타덤 속에서 감회에 젖는 결말 같은 건 없다. 그보다는 하나를 잃은 대신 다른 것을 얻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가 담담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전개된다. 프랭키가 청각을 잃은 대신 시각과 촉각 등 다른 감각에 주목하게 되는 발견과 각성의 과정이 관객에게도 모자람 없이 전달되고 있다. 디제잉과 음악, 영상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감각적인 편집의 묘미는 보너스다. 특별히 음악과 디제잉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더 많이 즐길 수 있는 축제 같은 영화다.

<우량시민 웨드워즈>

3만달러 규모의 <시민 케인>?

에드워즈 그룹의 이사회는 실적이 떨어지자 죽은 창업주의 클론을 만들어낸다. 주도면밀한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성장한 클론은 이사회의 기대대로 그룹의 옛 영광을 재현해낸다. 그러나 그에겐 부여받은 목표, 그 이상의 야심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면서, 정계 진출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우량시민 에드워즈>는 여러모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과 겹치는 영화다. 여러 인물이 등장해 에드워즈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고, 이것이 재연으로 이어지면서, 조각조각 퍼즐이 맞춰지는 구성. 흑백으로 처리된 화면 곳곳에서 <시민 케인>을 연상케 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다. 21세기 후반쯤으로 보이는 미래가 배경이지만, 창업주를 소개하는 1960년대의 뉴스릴 화면과 질감이 다르지 않아서, 첨단 놀이공원과 화상회의 장면엔 묘한 부조화의 매력이 풍겨나온다. 월트 디즈니를 닮은 캐릭터, 현재와 근미래의 화두인 ‘복제인간’의 테마, 고전영화의 색채가 한데 어우러진 독특한 시도. 감독과 프로듀서가 할리우드 스탭으로 일하는 짬짬이 창고에 모여 15일 만에 만들었다는 3만달러짜리 ‘데스크톱’ 영화. 소형 디지털카메라, 그린스크린, 스캐너와 포토숍, 도서관 사진 자료가 전부인 열악한 일터를 돌아본 스티븐 소더버그가 제작 총괄책을 자청했다고 한다.

<토레몰리노스73>

이 부부가 성생활 비디오를 찍은 이유

1973년 스페인 마드리드. 집세도 제때 못 내는 백과사전 외판원 알프레도는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아내 카르멘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다.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 바엔 입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잠자리에서 항상 콘돔부터 찾기 일쑤다. 그런 부부에게 기회가 찾아든다. 백과사전의 판매를 높이기 위한 방책으로 회사가 직원들에게 ‘부부생활’을 비디오로 담아오면 거액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고민 끝에 부부는 단기속성으로 슈퍼 8mm 작동법과 요염하게 옷 벗는 법을 배워 첫 번째 포르노를 완성한다. 예기치 않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이 영화가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면서, 포르노 제작은 그만 부부의 본업이 된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가난한 부부의 다툼과 해프닝을 따뜻한 유머로 두른 영화. <7개의 봉인>에 버금가는 걸작 포르노를 만들겠다는 남편 알프레도와 아이를 갖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쓰는 카르멘의 갈등은 세 가지 소원을 빌다 서로 다투는 동화 속 부부를 닮았다. 거장의 경구를 되뇌며 자신이 허락한 아내의 외도(?)를 카메라로 들여다보는 알프레도의 얼굴을 들여다보기까지, 영화는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서라도 행복을 쥐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리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죽을 고생>

3일간의 ‘미저리’ 공포는 시작된다

한 남자가 손이 뒤로 묶인 채 숲속을 달리고 있다. 머리는 쥐가 갉아먹은 듯하고, 눈두덩은 피범벅이다. 게다가 중년 여성이 입을 법한 꽃무늬 치마까지 둘렀다. 그야말로, 몰골이 흉악하다. 이 남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낯선 이의 이유없는 호의를 받아들인 한 남자가 3일 동안 겪게 되는 끔찍한 봉변을 그린, <미저리>가 연상되는 스릴러.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지방 위문공연을 떠난 마크는 도중 차량 고장으로 허름하지만 안락한 여관에 묶게 되고, 덥수룩한 수염에 사람 좋은 인상을 한 바텔이라는 주인장의 친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도 잠시. 마크는 자신을 죽은 아내 글로리아의 환생이라고 믿는 바텔에게 감금당하고, 모든 폭행을 말없이 감내해야 하는 한마리 암퇘지 신세가 된다. 바텔의 눈을 피해 마크는 근처 마을에 도움을 청하지만, 남자밖에 없는 마을은 마크의 SOS 신호에 광기의 애정으로 응답한다. 육욕만이 유일한 교감의 동기로 남은 피폐한 세계에 관한 은유가 돋보이는 영화. 올해 칸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레밍>의 주인공 로랑 뤼카와 프랑스 베테랑 연기자 재키 베루아이에의 기싸움을 눈여겨보시길.

<사치코의 화려한 생애>

현학적이고 해학적인 핑크영화

미국의 수도는 어디지? 뉴욕. 그럼 뉴욕의 수도는 어디지? 워싱턴. 어이없는 대화를 나누다 돌연 섹스에 몰입하는 도입부 청춘들처럼, <사치코의 화려한 생애>은 종잡을 수 없는 영화다. 오르가슴의 괴성이 터지는 동안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생뚱맞게 튀어나오고, 정액이 분사되는 동안 부시의 미사일이 이라크로 날아간다. 줄거리도 산만하고 어지럽다. 롤플레이(role play) 섹스클럽 종업원으로 가정교사 역할이 전문인 사치코는 고객을 만나러 나간 카페에서 이마에 총상을 입는다. 죽어 마땅할 상황이지만 사치코는 목숨을 건진다. 기괴한 일들은 ‘죽어야 사는 여자’ 사치코가 이마에 난 구멍에 아이라이너 펜슬을 끼우게 되면서부터 연이어 일어난다. 머릿속 총알이 사치코의 뇌를 자극하게 되고, 좀처럼 머리 쓸 일 없던 사치코는 대학교수와 노엄 촘스키를 논할 정도로 박식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원시적인 특수효과를 뒤집어쓴 기이한 저예산 핑크영화지만, 전후 미국의 꼭두각시로 살고 있는 일본사회를 에두르지 않고 꼭 집어 조롱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노는 회사, 라이엇>

핀란드에서 날아온 <범죄의 재구성>

2000년 “할리우드를 노키아 폰에 담게 해주겠다”는 호언장담으로 거대 기업을 구슬려 무려 2천만달러를 가로챈 간 큰 회사 라이엇 엔터테인먼트의 흥망을 다큐멘터리에 담았다. “신용카드조차 없던” 6명의 남자들이 역할을 분담해 100여명의 투자자를 끌어모으기까지의 과정은 할리우드 강탈영화를 보는 듯하다. 일면식 없는 먼 친척들까지 직원으로 끌어들이고, 세계 일주를 하며 돈을 탕진한 이들은 결국 2년 만에 파산선고를 했고, 이 과정에서 거액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봉이 김선달도 넙죽 절하지 않을까.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노는 회사, 라이엇>은 라이엇 엔터테인먼트의 주역이던 얀 웰먼과 그의 일당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현재 전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모바일 게임들의 아이디어가 실은 라이엇 엔터테인먼트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모바일 게임’이라는 부제가 붙은 다큐멘터리는 스피디한 인터뷰 편집과 과감한 인서트 장면으로 흥미를 배가했다. 헬싱키 러브&아나키영화제에서 첫 상영됐을 때, 영화제쪽에선 소요사태를 우려해 경비원까지 배치하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침입>

<빈 집>의 스릴러 버전

건축가 펠릭스는 자신의 지나친 결벽증으로 인해 여자친구가 떠나가자 직접 설계한 커다란 저택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급히 전화를 쓸 일이 있다며 도움을 요청하고, 펠릭스는 낯선 이를 반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집에 들여놓는다. 잠시 거실을 비우고 들어와보니 사라져버린 남자. 펠릭스는 그날부터 집안 곳곳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전화를 사용했던 남자가 여전히 자신의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신경쇠약 일보 직전까지 몰린 펠릭스는 보이지 않는 남자와의 결투를 계획하게 되는데…. <침입>은 스릴러의 외피를 둘러쓰고서 한 남자의 고독을 세밀하게 파고드는 심리극이다. ‘불확실한 손님’(The Uncertain Guest)의 정체를 찾으려 애쓰는 펠릭스의 여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이 혹시 그의 망상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서 조금씩 관객의 목을 조여가던 영화는 불청객을 잡는 순간부터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빈 집>의 스릴러판이라고 할 만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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