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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차가운 로드무비, <인 디스 월드>
박은영 2005-07-05

다큐와 픽션이 부딪쳐 섬광이 인다. 다큐라기엔 너무 극적이고, 픽션이라기엔 너무 리얼한, 슬프고 차가운 로드무비.

“이 영화는 1450만명의 난민, 그 가운데 파키스탄 페사와르에 사는 100만명의 난민들, 그중 단 두 사람의 이야기다.” 여기 아닌 다른 곳은 어디든 괜찮을 거라 믿었다. 사촌형의 런던 밀입국 여정에 동행한 아프간 소년 자말은 먼 옛날 아시아의 거부들이 무역로로 삼았던 그 길 ‘실크로드’를 되짚어 올라가지만, 어쩐지 행복이나 풍요의 꿈과는 점점 멀어지는 듯 느낀다. 파키스탄의 난민촌에서 이란과 터키를 거쳐,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찍고, 고대하던 런던으로 잠입해 들어가지만, 어디도 그의 종착역이 될 수는 없다.

<인 디스 월드>는 실제 아프간 소년들을 등장시켜, 다큐멘터리의 질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난민촌에서 나고 자란 소년 자말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런던으로 떠나가는 사촌형 에나야트의 영어 통역과 가이드를 자청하고 따라나서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 브로커에게 거금을 주고 길을 떠나왔지만, 그 거래가 안전한 여행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검문을 피해 후세인을 닮은 관료에게 워크맨을 뇌물로 주어야 하고, 난민 신분을 숨기기 위해 평생 걸쳐온 전통 의상과 모자를 쓰레기처럼 버려야 한다. 검문에 걸려 떠나온 곳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하고, 가축과 과일이 실린 트럭 짐칸에 태워지기도 한다. 속고, 멸시당하고, 착취당하는 와중에도 놓지 않았던 희망은 마피아가 인도한 트레일러 박스에서 질식해버리고 만다. 비극에도 수위를 매길 수 있다면, 응시하는 자의 냉정을 겨룰 수 있다면, 이 작품은 비슷한 소재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보다 한수 위다.

아무 정보없이 보기 시작하면, <인 디스 월드>는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여겨질 것이다. 난민들의 실상을 소개하는 내레이션도 그렇지만, 디지털카메라에 담아낸 거친 입자의 흔들리는 화면(<어둠 속의 댄서> <28일 후…>의 마르셀 지스킨드 촬영),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 같지 않은 연기를 따라가다보면, 그들이 실제로 그 일을 겪고 있고, 우린 그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이 인다. 이들이 국경수비대의 총성을 배경으로 이란에서 터키로 넘어가는 춥고 험한 야간 산행을 감행할 때, 40시간 넘게 머문 컨테이너에서 호흡 곤란을 느끼며 고통에 몸부림칠 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겁에 질린 사슴 같은 눈망울과 거친 숨소리를 보고 듣는 카메라는 긴박하게 요동친다. 차갑고 단단한 심장을 가진 이가 아니고서는, 그 공포와 고통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방법에 대해서 진실성을 얻고자 노력했고, 그렇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흔히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을 언급할 뿐이다.” 프로듀서 앤드루 이튼의 말처럼, 작품에 드리운 다큐멘터리의 터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의 차원이 아니라, 이야기를 대하는 제작진의 ‘태도’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혹은 떠나간 이들에 대한 예의.

토머스 하디의 소설(<쥬드> <클레임>), 발칸반도의 전쟁(<웰컴 투 사라예보>), 동세대 런던 젊은이들의 사랑(<원더랜드>), 80년대 뮤지션과 클럽과 도시(<24시간 파티피플>) 등 한 감독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양한 관심사를 펼쳐 보였던 마이클 윈터보텀은 <인 디스 월드>를 통해 다시 세상 저편으로 날아왔다. 저널리즘적 정면 돌파를 시도했던 <웰컴 투 사라예보>는 주인공이 영국인 종군기자였다는 점에서 ‘외부자’의 시선을 반영한 작품이지만, 픽션과 다큐 사이 애매한 지점에 선 <인 디스 월드>는 좀더 객관적이고 냉철한 관찰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고난에 처한 약하고 순수한 인간의 몸부림을 걱정스레 지켜보면서, 이겨내야 한다고 견뎌내야 한다고 암시를 보낼 뿐, 결코 신파적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런던에 도착한 자말은 사원에서 기도를 드린다. 자막은 더이상 그 기도를 따라잡지 않지만, 그가 무엇을 빌고 있는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그의 간절한 기도는 계속된다. 여행은 끝나지 않았구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인 디스 월드>의 힘은 영화가 끝난 뒤에 실감할 수 있다.

<인 디스 월드> 어떻게 만들어졌나

“유럽도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오른쪽)

마이클 윈터보텀은 이 영화를 최초로 선보인 베를린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고국을 떠나는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은 이주민들과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유럽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로 아주 조금만이라고 그런 태도에 변화가 생기길 바란다.” 윈터보텀은 본래 런던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 증가하는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중 58명의 중국 난민이 밀입국 중에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질식사한 사건이 발생하고, 총선을 맞아 난민에 대한 적대감을 고조시켜 이익을 취하려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접하게 되면서, 영화 작업에 착수했다. 작가 토니 그리소니와 함께 난민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를 물색하기 위해 파키스탄의 난민 캠프를 찾아간 것이 2001년 11월. 이들은 난민 시장에서 유난히 미소가 맑고 친화적이었던 에나야트를 발견해 사촌형 역으로 즉석 캐스팅했고, 영어학원에서 주인공 소년 역을 맡길 자말을 찾아냈다. 연기 경험이 없었던 이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실제 난민들의 수기와 인터뷰로 구성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즉석에서 대사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연기를 했다. 문제는 난민 신분인 이들에게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 제작진은 서류를 위조하고, 밀입국을 하고, 뇌물을 주는 편법을 써야 했다.

영화 속 인물들이 거쳐가는 파키스탄, 이란, 터키로 이어지는 육로를 프로듀서가 촬영 며칠 전에 답사하고, 감독과 배우들이 따라가는 식으로 촬영했는데,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전체 제작비의 1.5∼2%를 차지하는 보험료가 이 작품의 경우 1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들었다. 비상시에 헬기를 동원할 수 있도록 3만달러의 비상금을 마련해두고, 인질로 잡혔을 때의 대응법을 특수부대원에게 배워둬야 할 정도로 위험한 촬영이었다고. 다행히 촬영 중에 큰 사건사고가 터지진 않았지만, 자말이 검문소 관료에게 워크맨을 상납하는 장면은 비슷한 일을 당한 작가의 체험을 변주해 반영한 것. 영화 제목으로는 한때 <실크로드>가 물망에 올랐다가, 자말의 입국 번호 <M 1187511>도 고려됐었다. <인 디스 월드>라는 제목을 준 이는 자말이다. 런던에서 고향으로 전화를 하던 자말이 “그는 이 세상에 없어요”라는 표현을 쓴 것. 윈터보텀은 자말의 이러한 즉흥 대사가 작명에 힌트를 주었다고 밝혔다. 영화 막바지에 ‘실제’ 자말의 ‘현재’를 알리는 자막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말은 <인 디스 월드>의 촬영이 끝난 뒤에 파키스탄으로 돌려보내졌다가, 영화 속 루트를 밟고 다시 런던으로 들어왔다. 망명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18살이 되기 전에 영국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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