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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도 스캔들은 스캔들, <연애의 목적>
황진미(영화칼럼니스트) 일러스트레이션 이관용 2005-06-22

연애의 주-객관적 의미를 추적한 <연애의 목적>

<연애의 목적>은 남녀의 연애 풍속도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또는 쿨한 척 섹스 먼저 시작했다 결국은 사랑하게 되는 로맨틱코미디도 아니다. 낭만적인 단어 ‘연애’와 이성적인 단어 ‘목적’이 결합한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의 주제는 ‘연애’라는 가장 사적인 사건의 ‘주관적 진실(1인칭)’과 ‘객관적 정황(3인칭)’을 충돌시켜, ‘연애의 주-객관적 의미’를 묘파하는 것이다.

1인칭 대 1인칭이 대비되거나, 1인칭 대 3인칭이 충돌하는 영화들

시점을 달리하여 진실에 접근하는 영화들은 꽤 많다. 대표적으로 ‘홍상수 영화’를 들 수 있는데, <오! 수정>은 아예 남자의 시점과 여자의 시점을 대비시켜 이야기를 반복한다. 여기서 두 감성적 주체의 시점은 평등하며, 어느 한쪽이 더 많은 진리가(眞理價)를 갖지 않는다. 각자의(1인칭) 진실이 있을 뿐이며, 객관(3인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은 객관을 믿지 않기에 객관을 구성하지 않으며, 사회적 역관계를 중요하게 인식하지 않기에 두 주체의 만남을 마치 진공 같은 매트릭스에서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가령 <강원도의 힘>이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빨아주는” 여제자와 “빨아달라”는 남자교수간에는 주관적 감성만 있고, 객관적 힘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극장전> 역시 ‘생각만이 살길’이라는 주관적 관념론에 머문다. 홍상수 영화 중 대타자를 전제했던 영화는 사소한 거짓말이 쌓여 살인에까지 이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유일하다). 객관을 인정치 않는 홍상수 영화는 정치적 윤리적 판단을 무의미하게 한다.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간의 충돌을 보여주는 영화들도 있다. <녹색의자>와 <사마리아>는 ‘(역)원조교제’라는 객관적 정황을 먼저 제시하고, 그들의 주관적 진실이 ‘사랑/자비’였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법’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파묻힌 ‘사랑/자비’를 발굴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가 주관적 진실만 강조하진 않는다. 영화 속 매매춘과 사랑을 가르는 잣대는 바로 금품인데, <녹색의자>에선 “고작 CD 하나”로 액수가 터무니없다는 것이 강조되고, <사마리아>에선 현금을 모조리 돌려주는 행위가 강조된다. 즉 사랑의 변별 기준이 당사자들의 감정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물질관계임을 놓치지 않는다. <오아시스>는 반대로 관객에게 그들의 연애를 보여준 뒤, 주관적 진실을 알지 못하는 ‘법’에 의해 ‘성폭행’으로 매도되는 광경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영화 속 ‘성폭행’의 기준이 (그들의 감정이 아닌) ‘전과’와 ‘장애’라는 객관적 정황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상호침투하는 주관적 진실과 객관적 정황

<연애의 목적>도 <오아시스>처럼 주관적 진실을 보여주다 객관적 정황과 충돌시킨다. 그러나 객관적 정황과 힘의 관계는 단지 추인되는 정도가 아니라 더욱 부각된다. 앞의 영화들에서 주인공들은 주관적 진실을 확신하며 객관적 정황에 맞서지만, <연애의 목적>의 주인공들은 객관적 정황을 끌어들여 주관적 진실을 재해석하고 역으로 이용한다. 그때까지 장난처럼 용인되던 유림의 “나랑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죠? 실습점수 안 나오고 끝나는 거예요” 같은 발언과 “이 선생님이 나 강간한 거예요” 같은 홍의 수세적인 발언들이 ‘위계를 이용한 성폭행’이라는 홍의 고발로 재의미화된다. 그리하여 “그럼 이 선생님도 소문나서 학교에서도 쫓겨나고 그러면 어떨 것 같아요?”라는 홍의 말과 “왜 그 새끼한테 당한 걸 나한테 뒤집어씌워?” 같은 유림의 대사들이 예언처럼 그들에게 그대로 실현된다.

<연애의 목적>은 일에 대해서는 “밀고 당기는 걸 잘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애에 대해서는 주관적 감성만 믿고 “연애만 하자” 겁없이 달려든 남자와 ‘연애’라는 낭만적 사건이 사회적 역관계 속에서 어떻게 탄력을 받는지 외상을 통해 알게 된 여자가 지위와 성차의 위치에너지가 작용하는 중력장 안에서 만나 ‘연애’한 이야기다. 중력장은 그들의 연애를 추문을 거쳐 당사자의 입으로 ‘위계를 이용한 성폭행’으로 재규정토록 하였고, 그뒤 철없던 남자는 연애 무서운 줄을 알게 되었고, 여자는 외상을 극복하고 잠을 잘 자게 되었다.

그렇다고 ‘연애인 줄 알았더니 성폭행이더라’며 그간의 감정들을 무화시키지 않는다. 1년 뒤 홍이 “나도 너 사랑했다”는 에필로그는 사랑으로 봉합하기 위한 장치나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연애의 양면성에 대한 확인이다. ‘이 사랑’이 거짓이라서, 성폭행으로 결판난 것이 아니라, ‘이 사랑’도 주관적으로는 진실했지만, 객관적으로는 성폭행으로 해석되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연애의 목적>은 주관적 진실과 객관적 정황을 별개의 것으로 전개하며, 주관적 진실의 진리가를 복원시키고자 했던 이전의 영화들에 비해 더 많은 것을 발언한다. 바로 1인칭의 진실과 3인칭의 정황이 따로 있지 않으며, 그때그때 변하고 상호 침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즉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지만, 이 영화는 ‘내가 해도 스캔들’임을 자인하는 것이 바로 성장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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