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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의 쾌락, 반환영의 유희, 페데리코 펠리니 회고전

페델리코 펠리니 회고전, 6월3일부터 필름포럼에서 열흘간 열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진정한 쾌락은 환영의 공허한 쾌락이다." -이탈리아 낭만주의 시인 레오파르디의 <치발도네>에서

페데리코 펠리니는 꿈꾼다. 기억마저 진짜인지 꿈꾼 것인지 분명치 않다. 얼마나 몽상의 범위가 넓은지, 이야기 구조가 뒤죽박죽으로 흘러가도 우리는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그가 제공하는 환영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펠리니의 세상에 한번 들어가면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를 읽는, 논리 같은 이성은 이상하게 귀찮아 보인다. 벌거벗고 뛰어다닌 순수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잠시 영화의 낙원 속에서 노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다.

<달콤한 인생>, 영화의 역사를 뒤집다

<달콤한 인생>

펠리니의 옹호자들은 <달콤한 인생>을 ‘혁명’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왜일까? 영화는 여러 개의 조각들이 이어붙어진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에피소드들을 연결해 하나의 장편을 만드는 것은 펠리니의 데뷔 때부터의 클리셰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베니스에서 은사자상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알린 <비텔로니>(1953)이다.

그런데 초창기 영화와 <달콤한 인생>에서 에피소드를 다루는 방식은 구조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달콤한 인생>에서 에피소드들은 바로 우리가 꿈을 꾸듯 앞뒤가 맞지 않게 제멋대로 연결돼 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에피소드 사이의 인과관계를 무시한다.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와는 다른 형식을 실험하던 그는 <달콤한 인생>에서 드디어 극영화의 근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줄거리의 인과관계를 내다버린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인과관계에 따라 연결하는 작업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그런데 곤란한 점은 또 있다. 그 연결이 결코 수월하지 않다는 점이다. 펠리니는 퍼즐 게임을 하는 데 필요한 조각들을 모두 주지 않았다. 따라서 몇 조각이 애초부터 없는 퍼즐게임, 그 모자라는 조각을 상상하는 것도 관객이 할 일로 남았던 것이다.

<달콤한 인생>은 원형구조라는 펠리니 특유의 이야기 형식을 갖고 있다. 도입부에서 헬기를 타고 가던 마르첼로가 옥상 위의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으로 시작한 영화는, 종결부에서 그가 어떤 소녀의 (구원의) 목소리를 역시 못 듣는 것으로 끝난다. 원형구조는 출세작 <길>에서부터 뚜렷해졌는데, 영화는 잠파노(앤서니 퀸)의 바다에서 잠파노의 바다로 끝나며, <카비리아의 밤>에선 여주인공이 애인에게 버림받는 장면으로 시작해 역시 버림받는 장면으로 끝나는 식이다.

밀란 쿤데라, 우디 앨런의 오마주

<달콤한 인생>에서 실험했던, 에피소드 조각들로 구성된 내러티브는 <8과 1/2>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제 에피소드들은 마치 무의식처럼 흐른다. 이 영화 이후부터는 갈등의 해결구조라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관습이 순식간에 촌스런 고물처럼 보일 정도다. <8과 1/2>은 지금 봐도 쉽지 않은 형식에도 불구하고 발표 당시 비평은 물론이고 흥행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게다가 밀란 쿤데라 등 많은 작가들이 감독의 상상력에 감동해 흠모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우디 앨런 같은 감독은 <8과 1/2>를 패러디한 영화 <스타더스트 메모리>(1980)를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는 또 영화계에 모더니즘 바람이 불 때고, 고다르의 작업과 더불어 펠리니의 <8과 1/2>은 이른바 자기반영적 영화 제작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 영화의 환영주의를 경계하는 자기반영적 영화 만들기에서 펠리니와 고다르는 약간 다른 입장에 있다. 고다르는 브레히트적 낯설게 하기를 노리는 명백히 정치적인 영화들을 주로 발표했고, 펠리니는 환영주의의 달콤함과 반환영주의의 비판적 태도, 두 가지 모두를 갖고 놀았다. 다시 말해 환영이 제공하는 꿈같은 쾌락을 끝없이 펼쳐 보이는 동시에, 우리가 지금 어두운 극장 안에서 보고 있는 그림은 공허한 환영임을 슬쩍 일깨우는 식이다. 고다르가 진지했다면, 펠리니는 유희적이다. 환영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남다른 주목은 초기작인 <백인 추장> 때부터 제시됐고, 이는 펠리니 특유의 테마가 된다.

<영혼의 줄리에타>로 잠시 일반적인 극영화 형식으로 돌아갔던 펠리니는 <사티리콘>으로 다시 비논리적이고 파편적인 에피소드들의 결합이라는 <8과 1/2>의 형식으로 되돌아간다. ‘컬트영화’라는 말을 일부 영화광들이 자기들끼리만 광적으로 좋아하는 특별한 영화로 해석해도 된다면, <사티리콘>은 펠리니 팬들의 컬트영화다.

<사티리콘>, 펠리니의 컬트영화

<사티리콘>

<사티리콘>은 페트로니우스가 쓴 로마시대의 모험담으로, 호머 이야기의 율리시스처럼, 엔코르피우스라는 청년이 경험하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묶은 고전이다. 원작을 감독이 자유롭게 각색했다. 그래서 제목에 자신의 이름을 덧붙였다. <영혼의 줄리에타>를 만들며 원색의 화려한 색깔을 실험했던 펠리니는 <사티리콘>에서는 색깔을 폭력적일 정도로 역동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등 원색들이 뿜어내는 힘찬 기운 자체가 매력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사티리콘>에는 ‘색채의 심리극’, ‘컬러의 스펙터클’이라는 해석이 따르기도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재현되는 아름다운 청년들 사이의 동성애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연이어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하나같이 놀라움과 충격을 보여준다. 게다가 에피소드 속에 또 다른 에피소드를 끼워넣고, 다시 말해 영화 속에 영화가 등장하고, 또 환상과 꿈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꾸며놓아, 눈부신 색깔의 표면을 따라가기조차 쉽지 않다. 펠리니의 창작에 대한 광기마저 느껴지는 <사티리콘>은 ‘로마시대에 대한 환상 에세이’라고도 소개된다.

<사티리콘>을 만들 때 감독은 49살이었다. 아마 이때가 그의 창의력이 최대치에 이른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이때 이후 펠리니는 환상의 대상을 과거로 돌리기 시작하며, ‘기억’은 그의 영화에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다. 무궁무진한 상상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내펼치던 한 예술가가 드디어 인생의 뒤안길을 돌아보기 시작하는 쓸쓸한 시선이 엿보일 때다.

그 첫 실마리가 <광대들>이다. 감독은 어린 시절 서커스를 보며 꿈꿨던 환상적인 세상의 주인공들, 곧 광대들을 찾아간다. 전설적인 스타 광대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찍었다. 그러나 펠리니는 체질적으로 객관적인 다큐멘터리와는 맞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자기 안경으로 세상을 고쳐봐야 직성이 풀리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독이다. 다큐멘터리처럼 진행되던 영화는 결국 감독의 판타지와 만나 현실과 허구는 서로 뒤섞인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감독은 현실은 비정하고 혼란스럽게 그려낸 반면 허구는 동화처럼 꿈꾸듯 아름답게 그려낸다.

다큐멘터리적인 현실과 감독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허구가 지그재그로 섞이는 형식은 <로마>에서도 반복된다. 펠리니는 이탈리아의 다른 감독들에 비해 정치적인 입장이 흐린 편이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좌파들로부터 자주 공격을 받기도 했다. ‘정치적 관점이 없는 광대’라는 놀림까지 나오기도 했다. 좌파 감독들의 수장격인 루키노 비스콘티부터 투사의 이미지가 강렬한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좌파 탐미주의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그리고 서방세계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문화혁명기의 중국을 대상으로 다큐멘터리 <중국, 차이나>(1972)를 발표했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까지, 이탈리아의 영화계는 진보성향의 감독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펠리니는 이런 움직임에서 한발 떨어져 있었다. 아니, <로마>를 보면 그런 쪽에 참여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한 것 같다. 영화 속에는, 펠리니의 촬영현장에 청년들이 찾아와 감독에게 따지는 장면이 들어 있다. 이들은 감독이 사회적인 영화는 안 만들고 로마의 관광지에서 뭘 찍고 있냐고 비판한다. 감독은 대답 대신, 30여년 전 자신을 현혹했던 광대들의 극장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식이다. 70년대 당대는 다큐멘터리로 과거의 로마는 동화처럼 찍었다.

<아마코드>, 기억의 쓸쓸함

<아마코드>

<아마코드>는 ‘나는 기억한다’라는 말의 리미니(펠리니의 고향) 지역어이다. <광대들>에서 시작된 과거를 찾아가는 여정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8과 1/2> 이후 10여년 만에 다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함으로써 그의 건재를 과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감독은 파시즘 시절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어린 시절, 온갖 인간 군상이 펼쳐내는 기억 속의 만화경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감독은 향수를 팔아먹는 환영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기억이 허구임을 알려주는 장치를 곳곳에 심어놨다.

그런데 <광대들>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감독은 전에 없이 외롭고 쓸쓸한 시선을 <아마코드>에서 드러내고 있다. 과거를 애타게 부르면 부를수록, 왠지 그의 현재는 더욱 허전해 보인다. 펠리니 영화에서도 서서히 죽음의 명상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말년인 80년대에 발표된 작품 속에 더욱 두드러지며, 특히 <그리고 배는 간다> <진저와 프레드> 등은 바로 노감독의 ‘죽음에 관한 명상’에 다름 아니다. <진저와 프레드>에서 펠리니의 분신으로 각인된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에게, 감독의 아내이자 또 다른 그의 영화의 아이콘이기도 한 줄리에타 마지나(<길>의 여주인공)가 “우리에게 다시 춤출 시간이 남아 있을까”라고 말할 때는, 이 대사가 영화에만 한정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소년 같은 상상력으로 스크린을 질주해온 노예술가의 쓸쓸한 뒷모습이 프레드의 등뒤에 겹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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