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자폐 기질이 필요하다.” 외화번역을 하는 김은주(40)씨는 “자기와의 싸움”을 위해 작업할 땐 철저하게 외벽을 두른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하고 최대한 압축해서 뽑아내고 재미있게 대사를 튀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빠른 대사나 화자가 겹치거나 하는 부분들은 관객이 즉각적으로 화면과 자막을 연결할 수 있도록 ‘교통정리’를 해주어야 한다. 내용이 복잡하거나 상영시간이 긴 작품을 번역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넉넉잡아 1주일 정도. 얼마 전 자막시사까지 마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처럼 미식축구의 세계를 파고든 영화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수다. 이 방면에 문외한인 그는 전문적인 용어와 게임 룰을 파악하려고 풋볼협회를 찾아야 했다.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번갈아 작업하다 보면 자칫 타깃을 놓칠 수도 있다. 멕 라이언이 나오는 <지금은 통화중>은 최대한 가볍고, 경쾌하고, 위트있게 말을 비틀어야 한다. <왕과 나>의 리메이크 버전인 <애나 앤드 킹>은 격조있고 유장하게, 액션영화라면 불끈한 남자들의 근육만큼이나 울퉁불퉁한 어조들까지 감안한다. <미키 블루 아이즈> 같은 코믹한 영화는 우리 말에 있는 은어들도 적절히 추가한다. <애널라이즈 디스>에서 신경쇠약에 걸린 마피아 보스의 주치의를 얼떨결에 맡은 정신과 의사 빌리 크리스털의 대사처럼 캐릭터의 직업을 고려해서 대사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다. 그를 찾아온 FBI요원들이 자신들을 조폭 담당이라고 소개하자 빌리 크리스털은 “조울성 폭식증이라구요?”라고 묻는다.
자막실에 찾아가서 프린트 동판 작업까지 지켜본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별다른 사고가 없었던 터라 이전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그런데 한번은 대사가 밀리고 자신이 계산한 글자 수를 자막실에서 잘못 해독하는 바람에 본래 느낌이 반감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애써 “분리수거 해놓은” 것을 다시 헤집어 놓은 꼴이 됐다. 최종 점검단계인 1차 프린트 시사는 그래서 중요하다. 김은주씨가 번역일을 시작한 것은 80년대 말. 국제기구 비서실에서 근무하다 짬을 내서 번역한 “얼치기” 책으로 방송사 일을 따냈고, 영화쪽은 얼마 뒤 아는 분을 통해 직배사를 소개받았다. 한달에 평균 2, 3편씩 작업하는 그의 보수는 편차는 있지만 작품당 8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 영화와 달리 더빙작업을 주로 하는 방송은 전체적인 대사의 속도까지 직접 연출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된편. 이에 비해 비디오는 글자 수에 대한 제약이 덜해 작업이 수월하다. 대신 남편이 빌려온 비디오를 볼 때면 8글자씩 끊어내고 불필요한 조사는 빼내느라 정작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김은주씨의 하소연이다.
1960년 생·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나홀로 집에> <미세스 다웃파이어> <시스터 액터> <노팅힐> <매트릭스> <애나 앤드 킹> <그린 마일> <리플리> <지금은 통화중>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