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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화 기행: 타이 [5] -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인터뷰
이영진 2005-05-10

신작 준비 중인 <열대병>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내 영화는 아무 생각없이 보면 아주 쉽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35)은 방콕에 없었다. 그는 <세계의 욕망> 촬영을 마치고 고향 콘캔에서 신작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고 했다. 인터뷰 전날 그는 자신의 모교 콘캔 대학에서 워크숍 강의가 있어 도저히 방콕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전해왔다. 급한 놈이 나선다고, 하는 수 없이 방콕에서 비행기로 1시간 떨어진 콘캔으로 날아갔다. 방콕에서 그의 인기를 실감하지 못했지만 고향에선 달랐다. <열대병>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던 그를, 지인들은 유명 감독이라며 자신의 또 다른 동행자들에게 알리기 바빴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면서부터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그의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병원을 가리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속삭였다. 타이영화의 신성, 아핏차퐁이 새우볶음밥을 오물거리며 털어놓은 자신의 영화에 관한 짧은 주석.

-<정오의 낯선 물체>에선 시체놀이(exquisite corpse), <아이언 푸씨의 모험>에선 모조(fake), <친애하는 당신> <열대병>에선 데파즈망(de pausement) 등 당신의 영화들은 초현실주의자들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기준이나 원칙을 별로 안 좋아한다. 정해진 구조 형태가 없는 것을 선호한다. 시카고에서 유학할 당시 미술관에서 달리나 마르셀 뒤샹의 그림들을 자주 봤다. <정오의 낯선 물체>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자주 쓰는 시체놀이를 응용한 거다. 누군가 그림을 그려놓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연상되는 어떤 그림을 덧그리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숲이라는 공간 때문에 데파즈망을 이야기한 것 같은데 그건 의도한 건 아니다.

-<정오…>는 제작비가 부족해서 도중 그만뒀다고 들었다. <아이언…> 또한 <열대병> 투자가 좌절되면서 갑작스럽게 찍은 영화다.

=<정오…>는 방콕에서 시작해서 남부로 갔다가, 다시 치앙마이로 가서 다시 남부로 내려오는 여행이었다. 밴 한대 몰고 다니면서 놀러다니는 기분으로 찍었다. 제대로 된 전문 스탭은 사운드가 전부였고 나 혼자 거의 모든 걸 다 했다. 돈 생기면 찍고, 돈 떨어지면 멈춰 서고. 다행히 이 정도에서 끝내야겠다 싶을 때쯤 카메라가 고장났다. <아이언…>은 <열대병>의 제작비가 떨어졌을 때 제안받은 저예산영화였는데 노는 기분으로 어떤 압력도 없이 찍은 영화다.

-<정오의 낯선 물체>의 엔딩에서 당신은 공을 차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당신의 영화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을 뒤쫓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내러티브는 해체되고 시점은 분열되어 있다. 이런 영화들은 처음에 어떻게 착상하는지 궁금하다.

=컨셉 위주로 만든다. <친애하는 당신>에서 컨셉은 시간이었다. 정해진 2시간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를 찍고 싶었고, 편집이 다 끝나고 나서야 어떤 영화인지 드러났다. <아이언…> 같은 경우엔 옛날 타이영화를 만들던 시기로 돌아가 시뮬레이션 하는 느낌으로 만든 영화다. <열대병>은 인간의 고통과 행복에 관한 발언이다. <친애하는 당신>을 찍을 때 숲에서 촬영하다 석양이 물들었는데 순간 모든 기분이 바뀌었다. 밝음과 어둠, 그 시간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느낌이나 생각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인간은 똑같이 시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들은 어떻게든 영향을 주고 다 연관이 되어 있다. 불교적인 사상인데 내 영화에 그런 것들을 녹이려고 했다.

<열대병>

<열대병>

-<친애하는 당신>에서 숲은 안식과 치유를 위한 도피처였다. <열대병>에서 숲은 도시와 다른 시간을 갖고 있는 미지의 공간이다. <세계의 욕망>에서 숲은 또 다른 시점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당신의 영화에서 숲은 점점 유기체로 자라난다.

=영화마다 숲의 비중이 커지는 건 아니다. 다만 방콕이 너무 싫다. 그래서 숲을 택했다. 숲에선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규율에서 벗어나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다.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는 것도 숲에서는 가능해진다. 옷을 벗고 행보하는 것도 그곳에선 아무렇지 않다. 이 사회에서 몰랐던 인간의 본성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의 영화들은 분석하면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내가 만드는 영화는 아무 생각없이 보면 아주 쉬운 영화다. 그냥 어디로 가야 한다면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고 데리고 가는 식이다. 많은 트릭을 쓰는 할리우드영화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아이언…>을 논외로 치면, 현재 작업하고 있는 3인3색 프로젝트 <세계의 욕망>까지 연작 같다.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사소한 단서 하나를 들자면, <친애하는 당신>의 끝부분에 총소리가 들리고, <열대병>의 시작 부분에도 총소리가 들린다.

=숲에서 총소리 나는 거야 별난 건 아니잖은가.(웃음) 내 삶 중에 어떤 부분들이 은연중에 묻어나서가 아닐까. 삶에는 해석할 수 없는 어떤 행복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여기 주전자에 하찮은 손잡이가 달려 있잖은가. 시원찮고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존재의 전부일 수 있다. 영화를 통해 그런 것을 발견하는 게 나의 행복이다.

-시나리오 작업 중인 영화는 대략 어떤 이야기인가.

=<열대병> 찍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향에 갔다가 과거가 그리워졌다. 게다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담아놓은 비디오 테이프들이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서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어머니가 계시니까 아버지 이야길 들어 과거를 재구성해보고 싶었다. 아버지를 어떻게 만났는지, 아버지가 어떻게 어머니를 꼬셨는지를 구술받아 거기에 살을 붙이는 식이다. 물론 영화에선 그 내막을 자세하게 들추진 않을 것이다. 사라진 시간과 공간에 대한 내 기억들이 어머니가 구술한 내용들과 뒤섞일 것이다. 유럽에서 투자를 받기로 했는데 아직 밝힐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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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이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