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충무로 파워50’에 순위가 처음 매겨진 이래 강우석 감독은 한해도 빠짐없이 ‘넘버원’을 차지했다. 하지만 올해 그 8년의 아성이 흔들렸다. 박동호 CJ엔터테인먼트 대표에게 1위 자리를 넘기고 한 계단 내려앉은 것. 시네마서비스의 모기업이었던 플래너스가 CJ에 넘어간 지난해 이후 그의 입지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1천만 관객이 지지한 <실미도>로 1년을 버텼지만, 자본력의 한계라는 벽은 너무 높았다. 특히 CJ, 오리온, 롯데 등 대기업이 본격적으로 영화산업의 본류를 장악하면서 시네마서비스의 파워는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하지만 충무로 토착자본에 대한 지지는 예상 외로 강하다. 그가 파워50 집계의 마지막 순간까지 1, 2위를 오르내릴 수 있었던 데는 대기업 자본에 대한 거부반응이 영향을 끼쳤을 거다. 항상 한국 영화산업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었던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 또한 한몫 했으리라. 그와의 인터뷰는 순위집계 막바지에 이뤄졌다. 해마다 이맘때면 “파워 1위는 내가 해야 된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는 충무로 파워게임의 흐름을 이미 읽은 듯, 의외로 초연한 모습이었다.
-아직 파워50의 집계를 끝내지 못했는데 박빙인 것 같다. 9년 연속 파워 1위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1등은 CJ 아닌가. 사실 난 10년을 채우고 싶은데, 혹시 그렇지 않다 해도 이번엔 정말 진짜 개의치 않을 거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추천하지 말라고 얘기했을 정도니까. 물론 나도 사람인데 서운한 게 있을 거다. 하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또 1등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또 무리해야 될지 모른다. 이제 영화 좀 찍자.
-그래도 막상 1위 자리를 놓친 것으로 결과가 나오면 실망하지 않을까.
=파워 1위라는 자리가 영화판 전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나는 그저 편하게 ‘이번에 안식년 좀 가져봐?’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만약에 CJ가 파워 1위가 됐는데, 나 스스로 ‘이거 좀 이상한데’라고 판단하면 올해 또 무리해서 내년에 1등 하면 된다. (웃음)
-이전까지는 영화인이 파워 1위를 해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는데 만약 CJ의 인사가 1등을 하게 되면 그렇지 않은 결과가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영화판의 거대한 흐름이 바뀐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만약 2년 전이었다면 굉장히 우울했을 거다. 그런데 지금 영화판은 바뀌었다. CJ, 쇼박스, 롯데 이런 대기업들은 극장이라는 하드웨어 때문에 영화사업을 포기할 수 없다. 과거 삼성과 대우가 영화사업을 할 때는 올해 수익 나쁘다 하면 ‘야 접어’ 이러면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길게 사업을 할 수밖에 없다. 롯데도 얘기를 들어보면 자존심이 상해서 배급을 해야겠다는 거다. CJ와 쇼박스가 프린트를 주네 마네 이러는데 눈치봐야 하니까. 그래서 막상 해보니까 <B형 남자친구> 같은 영화로 흥행이 되더라는 거다. 임권택 감독님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도 롯데로 갔다. 롯데도 ‘우리도 좋은 영화 한다’, 이런 욕심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걸 부추겨서 더 많은 영화를 만들게 하는 건 좋은 일이다.
-이번 설문조사를 보니 가까운 인사는 물론이고 친강우석 인사가 아닌 사람들로부터도 지지표가 나오더라.
=요즘 이춘연 사장이 가장 우려하는 게 뭐냐 하면 ‘강우석 쟤는 1등 안 하면 영화 안 한다’는 거다. 내 성격이 모 아니면 도이기 때문에 객기 부리느라 영화를 안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CJ에서 150억원 받은 것도 ‘야 이제 니네들끼리 먹고 살아’ 하면서 손떼는 수순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 처자식이 모두 캐나다에 있다 말이지. (웃음) 친강우석이 아닌 친구들은 내가 설쳐대면 그래도 으쌰으쌰 하는 느낌이 있고, 시네마서비스의 기가 죽지 않으면 투자가 다양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겠지.
-CJ로부터 150억원을 투자받은 것은 진짜 궁해서였나.
=아니다. 라인업돼 있는 영화에 댈 돈은 다 있었다. <공공의 적2> 수금만 하면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150억원은 돈 좀 잊어버리고 영화 찍자는 차원에서 받은 거다. 예비비 같은 개념도 있고, 내년 상반기까지의 영화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혹시 하반기에 느닷없이 <혈의 누>나 <왕의 남자> 같은 영화가 한두개 더 들어간다면 그때부터 돈 구하러 다니는 건 쉽지 않을 거 아니냐.
-투자금은 어디에 들어가게 되나.
=우리 판단에 맞춰서 이 영화 저 영화에 얼마씩 투자하는 거다. 이 돈은 우리에게 굉장히 양질의 자본이다. 조건이 하나도 없다. 하나 있다면, CJ가 중국시장 개척이니 하면서 해외진출을 하려는데 한국영화 편수가 너무 없다더라. 그래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해외부문은 벌써 CJ와 통합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 돈은 계속 굴리다가 3년 뒤에는 돌려줘야 한다.
-이미경 CJ 부회장과 만났다고 들었다.
=여러 번 만났다. 얘기를 해보니까, 스필버그, 카첸버그와 드림웍스 일을 할 때 한국영화 시장이 너무 작아서 할리우드에서 대우받지 못하고 분통이 터졌는데, 1∼2년 사이에 한국영화들이 아시아 시장으로 뻗어나가고 일본시장도 개척하고 그러니까 이제 진짜 한번 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중국, 일본 해서 아시아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한국영화가 아시아 시장에서 동시에 개봉하고. 그런 시장개척을 하고 싶은데 내수시장에 너무 자신이 없다더라. ‘이 내수시장을 키워줄 사람이 감독님 아닙니까’라며 나한테 접근했다.
-다른 자본의 제의도 있었을 텐데 왜 CJ와 협력관계를 맺게 됐나.
=SK 돈을 받든, KT 돈을 받든, 롯데 돈을 받든, 하여간 받아야 했는데 시네마서비스의 지분구조는 나와 CJ엔터테인먼트가 6 대 4로 돼 있다. 만약 다른 데 돈을 받기 위해 CJ와 분리하고 하면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애초에 150억원도 CJ에서 안 받고 싶었는데 이미경 부회장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사실 난 한국영화 제작, 한국영화 시장 이런 데만 관심이 있거든. 해외영화 시장 개척 이런 건 꿈도 안 꾼다. 이미경 부회장의 꿈은 나하고는 배치되지만 내수시장과의 연결관계는 나와 딱 맞았다. 나는 한국영화 많이 만들게 해달라고 했고 그는 해외시장 개척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했다. 거기서 두 회사가 접점을 찾았다고 할까.
-시네마서비스가 CJ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고 배급을 포기할 것이란 소문도 나돌았다.
=C일보니 뭐니에서 마치 내가 양아치들 돈 받아 배급을 다 넘기고 제작만 한다는 논조로 썼더라. 그건 때려죽여도 말이 안 된다. CJ에서 바라는 것도 그게 아니고. 만약 우리 영화를 모두 CJ에 독점으로 공급한다 치자. 그러다가 우리 게 쫙 망하면 어떡하나.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있다. 만약 CJ 배급 라인업이 너무 우울해 보인다면 협조 차원에서 우리 영화 몇편의 배급권을 던져줄 수도 있다. 배급 포기를 전제로 돈을 받는다면 난 딴 돈을 받았을 거다. SK도 우리에게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왕이면 앞으로 이 산업을 키우려는 쪽과 손을 잡아 힘을 보태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 CJ와 한 것이다.
-배급을 계속 하는 이유는 뭔가.
=아직은 배급사가 존재해줘야 제작을 하는데 더 밀어붙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아직은 CJ와 배급을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할 시기다. 박동호 대표와 이미경 부회장한테 “누가 잘하나 보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중에 가면 ‘배급은 우리가 할 테니까, 너네는 제작이나 해’, 이럴 수도 있다.
-극장체인인 프리머스 공영화 제안은 물 건너간 건가.
=CJ가 지분 70%를 갖고 있는데 시가로 420억원이나 된다. 그걸 무슨 수로 가져오나. 프리머스는 현재 독립법인으로 독자 상장하려고 하고 있다.
-프리머스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을 때 마음이 아팠겠다.
=아픈 정도가 아니라 절망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확실히 극장이 포화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렇게 스크린이 많은데 똑똑한 영화가 자기 소유의 스크린이 없어서 배급을 못 잡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극장도 매출전쟁이 치열해서 잘되는 영화를 트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결국 배급력이란 말은 무의미해졌다. 물론 개봉 초반에야 극장도 계열사의 영화에 유리한 조건을 줄 거다. 나도 <공공의 적2> 개봉 첫주엔 내 영화를 객석이 가장 많은 관에 틀고, <말아톤> 두 번째 큰 거 주라고 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말아톤>으로 바꿔서 상영하고 있던데. (웃음)
-올해 파워50에서 또 하나의 변화는 스타파워가 부상한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현재 기획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걸 헛 거라고 본다. 정말 적재적소에 연기자가 공급되고 있냐는 거다. <말아톤>을 보자. <하류인생>이 망했을 때 조승우의 티켓파워가 하나도 없네, 사람들이 이랬다. 그런데 <말아톤>의 조승우는 기획에 딱 맞는 배우였다. 그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배우가 먼저 서고 시나리오가 뒤따라붙는 영화가 있다. 그런 영화는 잘되기 힘든데 투자가 들어온다. 반면 시나리오가 좋아도 배우가 조금 상업성이 낮으면 투자는 잘 안 된다. 올해 시네마서비스는 상업성이 덜한 배우들을 내세워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매니지먼트사를 운영하겠다는 생각은 없나.
=예전에 정태원 대표가 한다고 할 때 도와준 적 있는데 나는 진짜 그거 싫다. 배우란 존재와는 조금 떨어져 있어야 약간 신비감도 생기고 하는데, 내가 만약 매니지먼트를 한다고 해봐라. 배우들과 몰려다니면서 같이 술 먹고, 이 영화해라 저 영화해라 그럴 것 아니냐. 그러다가 누군가 ‘이 영화 못하겠습니다’ 하면 내 성격에 ‘나가, 이 자식아’ 그럴 것 같다. (웃음) 또 그러다보면 내가 그동안 아꼈던 감독들, 작가들, 스탭들이 다 멀어질 거다.
-얼마 전 조직개편을 한 뒤 일은 많이 줄었나.
=경영 파트로 일을 많이 줬다. 김정상 사장과 김인수 부사장, 두 사람이 투자하겠다고 결정하면 나한테 묻지 않고 그냥 간다. 오히려 외부 제작사의 영화들은 내가 안 나서주면 좋겠더라. 회사가 젊어져야 하는데 내가 있으면 자꾸 노인네만 찾아온다. (웃음) 내 일은 시네마서비스의 자체 제작 영화들을 꾸리는 일이다. 여기 감독들은 잘난 척하는 놈들이라 오버한다나. 요놈들은 잡아야 한다.
-올해 시네마서비스의 계획은.
=영화를 지난해보다 많이 한다. 시장이 위축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고, 흥행에 대한 감각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들이 올해 우리의 라인업을 보면 되게 꿀꿀해 한다. 남들이 안 하는 것에만 질렀다. <혈의 누>나 <왕의 남자>는 다들 시나리오는 좋아하는데 투자를 망설이는 작품이다. 방은진 감독의 <오로라 공주>? 다 기겁한다. “방은진이 감독을 해요?”라고 묻는다. 남들이 보기에 돈 될 영화는 워낙 돈이 안 드는 <여고괴담4: 목소리>와 정지우의 <사랑니> 정도다. 우리 라인업으로 돈은 좀 못 벌지는 모르지만 공개하고 나면 ‘이런 영화도 나오네’ 하는 느낌도 줄 거다. 그래서 오히려 올해가 흥행이라는 면에서는 더 (화투패를) ‘쪼는’ 맛이 있다. 배급쪽에 그렇게 얘기했다. “초호화 캐스팅 영화들, 큰 규모의 영화들 옆에다 우리 영화를 하나씩 붙여라, 누가 이기나 보게.”
-신작 제목은 정말 <택스>로 할 건가.
=좋잖아. 세금. (웃음) 얼마나 좋은가.
-무슨 괴수영화 제목 같다.
=좀 있어봐라. 아주 꿀꿀한 캐스팅을 할 거니까. (웃음) 유명한 사람들이 하나도 안 나온다. ‘저 배우들을 데리고 흥행을 시키겠다고?’, 이런 느낌이 들 거다. 이번에는 <투캅스> 1편 때처럼 영화의 힘으로 처음엔 관객이 안 들지 몰라도 뒤로 갈수록 차고 올라가는 그런 영화를 한번 만들고 싶다.
-<공공의 적2> 같은 경우 영화가 너무 직설적인 것을 문제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택스>도 제목으로만 볼 때는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작가의 고민이 그거다. <공공의 적2>에 대해 “이거 통쾌해요”, 이런 사람이 있는 반면 “이거 공권력을 너무 미화한 것 아니에요?” 이런 사람도 많더라. 영화가 자꾸 소리를 질러대니까. 그리고 갈수록 후자쪽의 반응이 많아졌다. 그건 나나 김희재 작가나 전혀 계산 못했던 반응이었다. 과거에는 공권력에 매질을 했지만, 지금은 사회 전반에 그들을 격려하는 분위기가 조성이 됐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렇지는 않더란 얘기다. 흥행이 400만에서 멈춰버린 이유도 바로 그 때문 아닌가 생각된다. 검찰 직원들과 회식을 하면서 “검찰에 대한 인식이 왜 이리 안 좋으냐”며 원망하기도 했다. (웃음) 이번 영화는 외치되, 거부감 없게 외쳐보자는 거다. 권선징악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가보자고 했다.
-<공공의 적> 1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인가.
=그땐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잡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힘이 너무 없는 애가 상황의 힘을 받아서 간다. 그러니까 관객의 힘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작가도 지금까지 쓴 영화 중 가장 어렵다고 하더라. 내가 다시 공권력을 건드리는데 이번에도 <공공의 적2>와 같은 반응이 나온다면 난 진짜 나쁜 놈이지. 내가 이번엔 세무공무원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니까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고. 혹시 18대 국회에 나가세요? (웃음)
-<택스>는 언제쯤 들어갈 계획인가.
=4월20일 시나리오 초고가 나오는데 그걸 보고 결정할 거다. 잘 나오면 서두를 것이고 아니면 조금 늦어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