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짜리 그러나 열정은 30억 영화
봄의 전령이 험한 미시령은 잊고 지나친 걸까. 얼마 전 폭설 때 제설기가 한쪽으로 힘겹게 밀어놓은 눈들이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다. 잠시 내려선 미시령 정상.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한숨 돌리려고 했더니 시시때때 방향을 바꾸어 불어대는 강풍이 몸조차 가누기 어렵게 만든다. 막바지 촬영에 몰두하고 있는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제작진이 카메라를 펼친 미시령 중턱의 원터라는 곳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꾸불꾸불 비포장 도로를 1km 넘게 들어가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개인 사유지에 차려진 캠프. 낮은 곳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은 봄이 왔다고 끊임없이 조잘댔지만, 고개를 들면 아직 분기탱천한 겨울 바람에 제작진은 혼쭐이 나고 있었다.
감독은 땅바닥에 앉아서, 배우는 반사판 들고
겨울을 길에서 났기 때문일까. 여균동 감독의 얼굴 또한 새까맣게 말라 있었다. “여러분이 달리는 순간 다이너마이트가 터져요. 위험하진 않지만 깜짝 놀랄 수 있어 미리 말하는 거예요. 그럼, 각 분대 위치로!” 오늘 처음 출연하는 10여명 남짓한 서바이벌 동호회 회원들에게 여 감독은 오후 촬영에 앞서 주의사항을 직접 일러준 뒤 모니터 앞으로 돌아가 털썩 땅에 주저앉는다. 그러고보니 감독 의자가 따로 없다. 그때야 낯선 풍경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배우 이성민은 조명부 역할인 반사판을 들고 있고, 메이킹을 찍는 스탭의 목에는 스틸 카메라가 달랑거리고 있고, 제작부 3인은 다음 장면 촬영에 들어갈 엑스트라 분장을 하느라 정신없고, 리모컨을 들고 있던 스크립터는 슬레이트 치려고 분주하다.
“3억원짜리 영화지만, 화면은 30억원짜리 같다니까. 정말이야!” 여균동 감독은 저예산영화라고 깔본 것 아니냐고, 뒤늦은 방문을 책망하는 듯한 인사를 뒤늦게 던진다. 이날 촬영은 극중 주인공인 만수가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이들의 싸움에 뒤섞이는 바람에 그가 꼭 대동해야 할 실향민이자 치매를 앓고 있는 배 영감을 잃어버리는 장면. 서바이벌 게임 와중에 배 영감은 과거 한국전쟁의 상흔을 떠올리고 자신을 북쪽의 고향으로 안내해주겠다는 일행들과 헤어지게 된다. 애초 이 장면은 큰 규모의 전쟁신을 계획했지만 예산문제로 진행이 불가능했고, 결국 서바이벌 게임 와중에 과거의 전쟁장면 회상이라는 설정으로 교체됐다. 그런데 잠깐. 너른 갈대밭을 10여명의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과연 채울 수 있을까.
하루에 12시간씩 촬영
최소 1인2역을 맡고 있는 제작진의 발걸음이 슛을 앞두고 더 분주해지는 건 변덕스런 바람 때문이다. “누가 좀 가봐!” 스모그가 제대로 분사되지 않고 흩날린다고 감독이 성화를 부리자 제작부, 연출부 가릴 것 없이 달려나가는데, 곧바로 “다시 돌아오라”는 감독의 귀환 명령이 떨어진다. 순간적으로 원하는 스모그 효과가 만들어졌는지 감독은 스탭들에게 곧바로 촬영 개시 신호를 보낸다. 곳곳에 매설해둔 다이너마이트가 지반에서 2m쯤 튀어올라 터지고, 바람을 맞서고 있는 모니터쪽으로 흙먼지와 파편이 사정없이 날아든 게 두서너번. “다음 장면!” 쉽사리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것이 의심스러워 모니터를 훔쳐보는데, 인물 중심으로 잡은 꽉 찬 화면에 기대 이상의 긴장이 있다.
그래도 제작진으로선 아쉬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루에 찍는 분량이 1.2일 분량이다. 무조건 30회 이내로 끝내야 한다. 0.2일 분량을 찍지 못해 다음날 하루를 허비할 수 없다. 매일 공무원처럼 영화를 찍고 있다.” 여균동 감독은 한 장면 촬영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분량 촬영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다. 3시간밖에 시간을 내줄 수 없다며 갑작스럽게 통보해온 서바이벌 동호회쪽의 사정 때문에 “오늘 같으면 현장에서 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새도 없이 머릿속에 그려온 대로만 맞춰 찍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인다. 제작진의 촬영일정은 그야말로 강행군이다. 일주일에 하루 휴식을 제외하곤 12시간 촬영을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 폭설이 내린 날도 포클레인으로 눈을 긁어내고 촬영을 했다.
5년 만에 로드무비로 돌아온 여균동
이번 영화는 여균동 감독의 데뷔작 <세상 밖으로>(1994)를 떠올리게 하는 로드무비다. <세상 밖으로> 초반부에 잠깐 나와 탈옥수들을 붙잡고서 ‘어서 가자우’라고 재촉했던 치매에 걸린 실향민 할머니와 그의 아들의 후일담일 수도 있다는 게 감독의 설명. 요즘 젊은 관객에게 어쩌면 여균동은 생소한 감독일지 모른다. 원치 않게 탈옥수가 된 두 남자가 결국 한국사회에 숨겨진 더 큰 감옥을 깨닫게 된다는 블랙코미디 <세상 밖으로>(1994)를 통해 데뷔한 그는 <맨?> <죽이는 이야기> <미인> 등을 만들었고, 틈틈이 단편 <외투> <내 컴퓨터> <대륙횡단>을 내놓은 중견감독이다. <비단구두…>는 <미인> 이후 5년 만에 그가 메가폰을 잡은 장편영화.
극중 여정을 책임지는 만수는 흥행에 참패한 뒤 제작자가 진 빚을 대신 떠안게 된 영화감독이다. 빚을 탕감해줄 테니 치매에 걸린 자신의 아버지 소원을 들어달라는 사채업자의 협박을 받게 된 만수는 결국 개마고원이 고향인 사채업자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가짜 북한 방문을 계획한다. 로드무비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여균동 감독은 “길을 보면 이야기가 자꾸 생각난다. 실내 세트에선 소진되는 느낌인데, 길 위에선 충전되는 느낌을 받는다. 인터넷으로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는 세상인지라 로드무비는 사양품목이지만 내겐 아직도 유효한 몇 가지 길 이야기가 남아 있다. 덩어리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또한 무디고 게으른 내게 맞는 방식 같다”고 말한다.
캐스팅
비단구두 신고 길 떠난 사람들
최덕문(만수 역) _ “쥐새끼 같은 인물이죠” ‘짧은 출전, 깊은 인상.’ 최덕문이 되뇌인 모토다. 사창가에 끌려온 여인을 사모하는 조폭 똘마니(<나쁜 남자>), 언제나 노란 우비를 입고 대로에서 교통정리하는 남자(<…ing>), 선배 뒤를 따라 쌈마이 조폭으로 변신하는 형사(<목포는 항구다>). 얼굴을 뚜렷이 각인시키진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모토에 어긋나지 않는 연기를 선보여왔다. 서울예대를 졸업한 뒤 극단 차이무에 둥지를 틀고 10년 가까이 무대에 서왔던 그는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번에도 조연이겠지” 했는데 주인공인 영화감독 만수 역할을 맡아달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만수요? 대사 중에 ‘개량종, 불여우, 쥐새끼’라는 말이 있는데 딱 만수 두고 하는 말이에요. 이기적인 인물이죠. 저 대학 1학년 때를 보는 것 같아요.” <남극일기>에서 송강호와 함께 도달불능점을 향해 떠나는 탐사대의 일원으로 나오는 그는 뉴질랜드 촬영 때와 비슷한 스케줄이라 이번 강행군이 버겁진 않았지만, 전체 극을 끌고 가야 한다는 부담은 만만치 않았다고.
이성민(성철 역) _ “단순무식한 놈이에요” 가장 먼저 <비단구두…>에 합류한 차이무 멤버. “처음엔 성철의 비중이 그렇게 큰 줄 몰랐어요.” 여균동 감독, 최덕문과 함께 촬영장소 헌팅까지 함께하는 것으로 워밍업을 시작했다는 그는 극중 보스의 명을 받들어 만수를 감시하는 깡패 성철 역할을 맡았다. 후반부에서 성철은 빚을 탕감받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만수보다 더 열성적으로 가짜 개마고원 투어에 열을 올린다. “단순한 놈이죠. 그러다 만수를 만나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변화하는 인물이에요.” 사채업자의 오른팔인 성철은 온몸에 거대한 용문신을 달고 있는 설정. “가슴 타고, 목 타고 올라 여의주를 문 용을 상상했는데 예산 때문에 그냥 팔에만 그렸어요.” 정해진 합(合)없이 찍었던 액션장면 촬영에서 다시 한번, 을 외치는 감독의 채근 때문에 쉴 틈도 없이 주먹을 날리느라 구토할 뻔한 적이 여러 번. 그러나 밤샘 촬영 마치고 녹초가 되어 수면을 취했을 때의 달콤함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민정기(배영감 역) _ 미술가에서 연기자로 1980년 오윤, 임옥상 등과 함께 ‘현실과 발언’ 동인 활동을 시작한 민정기 화백은 이후 왕성한 창작을 통해 한국 민중미술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 대학 시절 연극반 활동이 연기 경험의 전부라는 그는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나갔던 자리에서 여균동 감독의 간청에 손을 들었고, 북녘의 고향 그리다 정신을 놓아버린 70대 노인 역을 맡게 됐다. “난 아마추어예요. 연기에 대해선 할말 없다고”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무거운 톤의 대사들을 사투리로 내뱉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결국 털어놓는 걸 보면 프로 못지않다. “인천 촬영 때 30m쯤 뛰는 장면이 있었는데 영화라는 게 될 때까지 하는 건 줄은 몰랐지”라며 고된 행군의 기억을 떠올린 그는 “월남한 뒤 북에 두고 온 어머니만 평생 그려온 선배 화가 이동표 화백의 서러움 가득한 화폭을 떠올리면서” 매번 카메라 앞에 섰다.
김다혜(홍매 역) _ 더이상 아역배우라 부르지 마라 출연진 중 나이 어린 축에 속하지만, 충무로 짬밥으로 따지면 김다혜는 여균동 감독보다 위다. 친구 만나러 충무로 한 다방에 들른 엄마 곁에서 요란스레 찡얼대다 배창호 감독을 만난 것이 4살 무렵.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의 오목이 역을 시작으로 <고래사냥2> 등의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했다. “배 감독님이 되게 예뻐해주셨어요. 전쟁장면 찍을 때였던 것 같은데 소품이었던 주먹밥도 직접 챙겨서 주셨거든요.” 중·고등학교 시절 간간이 TV에 얼굴을 내밀었던 김다혜에게 <비단구두…>는 본격적으로 연기에 뛰어들겠다고 맘먹은 뒤 참여한 첫 영화. 옌볜 출신으로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살아가다 만수 일행과 동행하게 되는 20대 중반의 홍매가 그녀의 몫이다. 칼바람 때문에 입에 핫팩을 대고 있어도 정작 대사 칠 때면 ‘어버버’ 했다는 그녀는 현장에서 감독과 옌볜 사투리를 수시로 나눈 탓에 이젠 북쪽 말이 아예 입에 붙었다.
민성욱(조감독 역) _ 무대를 사랑하는 청년 현장에서 제작진들로부터 “카메라 앞에 서면 항상 작아지는” 배우라고 놀림받는 민성욱은 아직 학생이다. 용인대 연극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고2 때 극단 차이무의 <비언소>를 보고 넋을 잃었고,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망을 지피기 시작했다. 아직 무대에 서진 못했지만 끈질긴 구애 덕에 차이무의 어엿한 멤버 중 한명이다. 극중 그가 맡은 역할은 만수를 따르는 조감독. 유학을 다녀왔지만 아직 입봉을 하지 못한 20대 청년으로 스릴러영화에 홀딱 빠져 있는 마니아다. “진지하긴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항상 액세서리에만 신경 쓰는” 인물이라고. 힘 좀 쓰는 동네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 기절하는 장면 촬영 때 실제로 때리고 맞으라는 감독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다 정신을 잃을 뻔했다. 배 영감 역을 맡은 민정기 화백은 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촬영분량이 끝났지만, 한방 쓰는 최덕문과 이성민이 놔주질 않아, 학교에 가지 못하고 볼모로 잡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