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안 온다고 불평하는 남자를 여자가 위로한다. “누구나 가끔은 잠 못 이뤄.” 그녀를 향해 돌아누우며 남자가 말한다. “나는 1년 동안 못 잤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고갱이 그린 예수처럼 여윈 몸과 움푹 팬 눈자위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증언한다. 원인 모를 장기적 불면에 시달리는 기계공 트레버 레즈닉 역의 크리스천 베일은 185cm의 몸을 55kg까지 감량했다. 체중조절도 이쯤 되면 스턴트다. 원래 깡마른 배우를 쓰는 편이 쉽지 않았을까? 하지만 <머시니스트>는 관객으로 하여금 “사람이 어쩌다 저렇게 망가졌을까?”라고 절실히 묻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영화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객이 평소 모습을 기억하는 스타가 필요하다.
밤새 깨어 있는 트레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지 않을 때면, 공항 24시간 커피숍의 웨이트리스 마리아(아이타나 산체스 지온)와 창녀 스티비(제니퍼 제이슨 리) 곁에서 안식을 구한다. 일터에서 그는 노동법을 거론할 만큼 똑똑하고, 유머감각도 예민하다. 관객은 마치 복안(復顔) 기술자처럼 예전의 그를 상상하게 된다. 아마도 트레버는 선량하고 활기찬 청년이었으리라. 그러나 트레버의 기억과 감각은 점점 허약해진다. 데자뷰 현상이 잦아지고 침입자를 암시하는 냉장고의 협박 메모는 불안을 가중시킨다. 고용주가 그의 마약 복용 여부를 의심하는 가운데 트레버는 기계조작 실수로 동료의 팔을 절단한다. 신입 용접공 아이반이 그의 주의를 흐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은 용접공의 존재를 부인한다. 만인이 공모해 자기를 해치려 한다고 판단한 트레버는 범인과 동기를 찾아 질주한다.
물론 <식스 센스>와 <메멘토> 이후 구제불능의 불신자가 된 관객은 주인공을 전적으로 믿기 어렵다. 동굴 속에 돌아앉아 벽에 비친 그림자로 세계의 실상을 추리하는 것이 이 게임의 과제다. 그러나 브래드 앤더슨 감독은 특별히 까다롭거나 의미심장한 퍼즐을 출제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보다 <머시니스트>는 숱한 영화의 기억에 매혹된 영화광이 조립한 공포 기계에 가깝다. <악마의 씨>의 고립감, 버나드 허먼의 새된 음향, 데이비드 린치의 불길한 캐릭터를 불러들인 가운데, <머시니스트>는 <쎄븐>과 <파이트 클럽>의 데이비드 핀처에게 가장 깊은 동경을 표한다. 검푸른 멍이 맺힌 창백한 피부 같은 화면의 색감과 닫힌 채 피 흘리는 냉장고의 위협은 그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개봉일 저녁 TV로 방영되는 ‘KBS 프리미어’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