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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2]

이스트우드식 비온정주의

평론가 폴린 카엘은 돈 시겔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티 하리> 시리즈를 두고, “파시스트적인, 비도덕적인 영화”라고 비난했는데, 그 말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비온정주의’적 도덕관에 관한 반대의견인 것처럼 들린다. 그 선고는 꽤 오랫동안 그를 뒤쫓아다녔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거기에 수긍할 생각이 여전히 없다. “그녀 생각에는 그것이 정말 비도덕적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더티 하리>가 파시스트영화는 아니다. 그건 단지 그녀가 동의하지 않는 다른 도덕일 뿐이다”라고 못 박는다. 그의 어떤 영화에도 온정주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되짚을 필요가 있다. 온정어린 행위로 사건이 해결되는 경우가 그의 영화에서는 거의 드물다. 해리 칼라한이 매그넘 44 권총으로 세상의 도덕을 바로잡는 원칙은 90년대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형식적 도약을 이뤘음에도 다른 방식으로 변함없이 다뤄지고 있다.

법적 도덕이 거리의 법보다 무력할 때가 있듯이, 악한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악행을 저질러야 할 때가 있듯이,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악행으로 규정되어야 할 때도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선과 악의 구분이 확실하다고 믿고는 있지만, 어느 쪽의 힘이 더 강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사이에는 죄와 과오와 속죄와 진실 매장 등이 자리한다. 그것을 용이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들이 90년대 이후 채택하고 있는 범죄소설 원작들의 미스터리 구조다. 그는 아무리 그 상황이 온정을 필요로 할 때라 하더라도, 진짜 도덕적 결단은 그것을 배제하는 수밖에 없는 경우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미리 말하자면, 최근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도덕적 핵심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이스트우디즘의 총체 <밀리언 달러 베이비>

먼저, 장르주의, 고전주의, 보수주의(또는 가장 책임주의), 비온정주의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퍼펙트 월드>와 <미스틱 리버>가 ‘독법’을 제시하는 영화라면, <트루 크라임>과 <미드나잇 가든>이 주제를 구조화하고 있는 영화라면, <용서받지 못한 자>와 <스페이스 카우보이>가 장르의 운명론을 고백한 영화라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장르적으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멜로드라마’이고, 의미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루었던 <퍼펙트 월드>의 다른 버전이다.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늙었지만 실력있는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다. 어느 날, 매기 피츠제랄드(힐러리 스왱크)라는 여자 복서 지망생이 그를 찾아와 트레이너를 맡아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이와 성별을 따져가며 프랭키는 거절한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프랭키 대신 그의 동료 스크랩(모건 프리먼)만이 매기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하면서 도움을 준다. 결국 복싱에 대한 열정으로 프랭키를 감동시킨 매기는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게 된다. 천부적인 자질을 갖춘 매기는 빠른 속도로 챔피언 타이틀전까지 올라간다. 한편, 딸과의 불화로 반송되는 편지만을 받아보아야 하는 프랭키와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하는 가족들을 가진 매기 사이에는 아버지와 딸의 감정이 서서히 스며든다. 마침내 챔피언 타이틀전. 매기는 승리를 눈앞에 두지만, 상대 선수의 반칙으로 병상에 실려가고 만다. 반식물인간이 된 매기는 프랭키에게 어려운 결단을 부탁하고, 프랭키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여자 복서 매기 역으로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남장 여자를 훌륭하게 연기했던 힐러리 스왱크가 낙점을 받았고, 동료 스크랩 역으로는 <용서받지 못한 자>에 이어 모건 프리먼을 다시 한번 초대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대중영화의 최선으로 만들었다. 대중영화의 최선이란 곧 장르영화의 기술적 최고를 말한다. 복싱을 소재로 했다는 이유로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손에 땀을 쥐는 스포츠영화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이 영화는 눈물을 피하기 힘든 멜로성의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의 장르주의가 이번에는 가족 멜로드라마를 선택한 것이고, 슬픈 감정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중년의 사랑으로 한없이 최루성 짙은 멜로드라마의 한점을 보여주었듯이,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멜로드라마적 구조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 있어 결코 소홀함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아버지와 딸, 희망과 꿈에 관한 영화

그 안을 채우는 주요한 내용은 딸에게 외면받는 아버지와 가족에게 이용당하는 딸이 서로를 대안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영화를 보는 누구나 이 점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주제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대부분 그와 비슷한 답변을 한다. “내 생각에 이건 복싱영화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딸의 러브스토리이고, 희망과 꿈에 관한 것이지요. 그것이 복싱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라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명확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프랭키는 딸과 소원해진 관계에 놓여 있고, 그 딸의 자리를 대신하여 매기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 둘의 관계는 바로 ‘트레이너와 선수’라는 관계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프랭키가 매기를 트레이닝하는 과정은 곧 새로운 딸을 키우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 “네 스스로 너를 보호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가르침은 트레이너가 선수에게 하는 말이기보다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인생의 교훈이다. 또한 프랭키는 영화 내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더듬더듬 읽어가는데, 그것은 취미생활이기보다 매기의 선수 닉네임을 찾아주기 위한 조사행위에 가깝다. 결국 매기는 프랭키에게서 이름을 얻고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내 이름이 아닌 당신이 지어준 그 이름으로 (링 위에 선) 나를 불렀어요”라고. 매기는 프랭키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아,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지어준 모쿠슈라(mokulsha)라는 말의 뜻이 바로 “내 사랑, 내 핏줄”인 것을 알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는 매기의 나쁜 가족들이 등장하여 가슴을 후벼놓고, 그 상처를 프랭키는 대신 끌어안는다. 그건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아버지의 책무를 맡은 가장의 우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스크랩이 프랭키의 딸과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말은 “난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말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이다.

영화 속에서 프랭키는 이미 딸의 자리에 들어온 매기를 위해 어떤 고통스런 결단을 내린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믿는 종교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매일처럼 빼놓지 않고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가는 성실한 신도이면서도, 언제나 신부를 붙들고 짓궂은 질문하기를 서슴지 않는 프랭키의 캐릭터 설정은 영화의 후반부에 배치된 이 순간의 결단을 위해 설정된 것이다. 그가 행하는 (보기에 따라서는) 비온정주의적 행위를 관객의 판단으로 남겨놓기 위한 설정이다. 관객은 여기서 프랭키와 동일하게 선택을 요구받을 것이다. 과거에 스크랩을 돕지 못해 그의 실명을 막지 못한 프랭키는 이번에야말로 행동에 옮긴다. 영화의 초반부 “복싱은 모든 것을 반대로 해야 한다”는 영화의 대사는 왜 프랭키가 그의 종교가 가르치는 바를 거슬러 행하는지에 대한 암시이며, 그 행위의 도덕성에 대한 옹호가 될 것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어느 무엇보다 흥미로운 자리는 지금까지의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로서의 스크랩의 위치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스크랩의 목소리를 통해 프랭키와 매기의 이 이야기를 프랭키의 딸 케이티에게 들려준다. 더 정확히는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렇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왜 이런 화법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 이유가 있다면, 이 아버지와 딸의 드라마를, 화자를 내세워 다시 한번 더 드라마 안으로 밀어넣기 위한 전략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화자가 영화를 끌어간다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고전주의적 발현이다.

그가 예이츠를 읽으면 영화는 눈물을 부른다

이제 사족처럼 마지막으로 덧붙여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스크랩은 매기의 요구를 들어주는 프랭키의 마지막 행위를 모두 ‘본다’. 이 장면은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적인 상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감정이 폭발하는 고조점에 언제나 ‘시선과 시점숏’(아마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이것만으로도 다른 글 한편이 가능할 것이다)이 새겨져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로버트 킨케이드와 프란체스카가 서로를 마지막으로 보는 이별장면을 기억하면 될 것이고, <미스틱 리버>에서 떠나가는 차창 뒤 베이브의 뒷모습을 보는 션과 지미의 시선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영화의 중요한 지점에 인물들의 시선을 잊지 않고 걸어놓는다. 이 점에 기반해야, 스크랩이 거기서 프랭키의 행위를 지켜보아야 하는 이상한 설정을 이해하기 쉬워진다. 이건 일종의 장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트레이닝시킨 장르적 무의식의 발현이라 생각되는데, 서부영화에서 익숙하게 사용되는 시선의 교차를 노년에 들어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제 감정과 철학을 담은 시선으로 바꾸어 의미화한다. 그런데 그런 장면이 들어설 때마다 자꾸 눈물이 난다. 모던한 영화를 만들려고 모두가 발버둥치는데, 이 노인만큼은 촌스러운 방식으로 감정을 승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키는 예이츠의 시를 읽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이어 두 번째 예이츠를 읽는 것이다. 그는 사랑과 눈물이 많은 영화에서마다 예이츠를 읽나보다.

<이니스프리 호수섬> _ 예이츠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욋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라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새의 날개 소리 가득한 그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중에서-

뮤지션 이스트우드

<버드>부터 <더 블루스> 시리즈까지, 그가 관여한 재즈 관련 영화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감독과 배우뿐 아니라 음악까지도 맡고 있다. 그는 이미 <승리의 전쟁>(1986), <용서받지 못한 자>(1992), <앱솔루트 파워>(1997), <미스틱 리버>(2003)에서 음악을 맡아 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감성적으로 만드는 데 그가 맡은 음악 또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음악 사랑, 특히 재즈에 관한 사랑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행보 중 독특한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저런 식으로 참여한 재즈 관련 영화들이다.

<버드>(1988)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야심차게 만든 전기영화이자, 본격적인 재즈에 대한 애정고백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여기서 술과 마약에 절어 살았음에도 음악적 혼을 놓치지 않은 재즈 아티스트 찰리 파커의 비운의 삶을 조망한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이 작품으로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칸에도 초대받았다. 애초에 컬럼비아영화사에서 굴러다니던 시나리오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눈독을 들여 만들게 됐고, 찰리 파커 역은 포레스트 휘태커가 맡아 연기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작품으로 작가로서의 자질을 한층 더 인정받았다. 또 프랑스 감독 베르트랑 타베르니에가 워너브러더스에서 만든 미국인 재즈 뮤지션과 프랑스인 사이의 예술적 교감을 그린 영화 <라운드 미드나잇>(1989)의 제작 배경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었다. 그는 타베르니에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워너브러더스에 다리를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덱스터 고든의 연주도 들을 수 있다.

한편, 또 다른 재즈 아티스트 델로니어스 몽크의 다큐멘터리 <델로니어스 몽크>(1989)와 <몬트레이 재즈 페스티벌: 전설의 40주년>(1998)의 총제작을 맡기도 했다. 2003년에는 마틴 스코시즈, 빔 벤더스 등과 함께 <더 블루스> 시리즈에 참여하여 <피아노 블루스>를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기라성 같은 피아노 재즈 뮤지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연주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미 카네기홀에서 연주를 한 바 있는 능숙한 재즈 뮤지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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