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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상황에서 비롯되는 공포, <쏘우>
오정연 2005-03-08

꾀 많은 스릴러의 첫 번째 조건. 한정된 시공간, 그리고 극단적 선택.

눈을 떠보니 자신이 지옥에 있음을 알게 된 두 남자 아담(리 와넬)과 고든(캐리 엘위스). 허름한 지하실 벽에 연결된 묵직한 쇠줄은 발목을 옥죄고 있고, 반대편 벽에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자신과 똑같은 상태로 묶여 있다. 방 한복판에는 머리를 총으로 쏘아 자살한 남자의 시체가 보인다. 서로의 이름도 알지 못한 채 감금된 이들은 방 안에 있는 모든 단서와 자신의 기억을 활용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러나 진짜 지옥은 이제부터. 둘은 각자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카세트 테이프를 재생시키고, 낯선 목소리는 일방적으로 명령한다. “8시간 안에 고든은 아담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은 물론 고든의 가족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자신과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남을 죽일 것인가. 아무리 애써도 상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두 가지.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위치에 있는 권총 한 자루, 그리고 쇠줄은 끊을 수 없지만 인간의 신체를 자를 만한 두개의 작은 톱뿐이다.

아무런 정보가 주어지지 않은 극한상황에서 비롯되는 공포,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지니게 되는 생을 향한 무참한 의지 등 자극적인 설정이 인상적인 <쏘우>는 이로부터 최대한의 장르적 흥미를 유발하는 데 골몰한다. 스릴러의 가장 큰 묘미는, 연출자가 등장인물과 관객에게 제공하는 정보량에 달려 있는 법. 아담과 고든이 어마어마한 미션을 앞두고도 누가, 왜, 자신들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었는지를 떠올리려 애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기억을 더듬던 고든은 이 살인마의 수법이,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됐던 연쇄살인범의 그것과 유사함을 알게 된다.

고든의 플래시백은 자살 미수 경력의 뚱보, 꾀병이 버릇인 방화범, 무기력한 약물중독자 등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인물들로 하여금 살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연쇄살인범의 엽기행각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환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시한부 인생을 선고하면서 부정을 저지르던 의사 고든이 이러한 위기에 처한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이제 살인범은 희생자들에게 고도의 도덕적 선택까지 강요하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남을 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한 이들은 순간의 공포에 사로잡혀 극단적 선택을 불사한다. 몇 십초 뒤 자신의 머리를 부수어놓을 마스크를 벗어버리기 위해 살아 있는 타인의 배 속에 들어 있는 열쇠를 꺼내야 했던 유일한 생존자가, “그는 나를 살게 해줬어요”라며 가해자에게 감사하는 장면에서는 인간에 대한 나름의 성찰마저 엿보인다. 선택의 여지란 이처럼 얄팍한 착각에 불과하다는 진실, 이해부득의 살인마가 없으면 삶의 소중함도 느끼지 못하는 무기력함,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무슨 리얼리티 프로그램 아니냐”고 되묻는 현대인의 맨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번득이는 아이디어 하나에서 시작했을 법한 이 영화에서, 인간의 죄악을 운운하는 거창한 교훈은 사족에 불과하다. <블레어 윗치> <큐브> 등의 꾀 많은 저예산 장르영화와 궤를 같이하는 <쏘우>는 세기말의 어두운 풍경을 고도의 영화적 완성도로 묘사한 <쎄븐>과는 전혀 다른 영화이기 때문이다. 패기만만한 데뷔 감독의 스릴러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은 연쇄살인범의 일장 연설보다는 한계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행태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제작진이 의도한 진짜 재미 역시 장르적 상황이 유발하는 극도의 긴장감에 있었다. 따라서 무리하게 장르적 재미를 추구한 끝에 등장하는 반전이, 알려진 바와 달리 영화 전체를 뒤흔들 만한 것은 아님은 그다지 결정적 흠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전반부에 비해 다소 맥이 빠지는 후반부의 전개. 영화는 두 인물의 물리적인 거리가 만들어내는 한계 등 애초의 설정을 더 밀고나감으로써 극대화할 수 있는 여러 재미들을 놓친다. 일단은 협력이 필수적이지만 살인범의 주문대로라면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사소한 정보조차 쉽게 전달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순간의 서스펜스는 중반 이후 흔적을 감춘다.

고작 120만달러의 제작비로 6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린 <쏘우>를 둘러싼 전체적인 평가는 그닥 우호적이지 않다. 물론 특정 장르에 열광하는 관객에게 영화의 논리적 완결성 혹은 평론가들의 평가는 이미 관심 밖이다. 연쇄살인범과의 두뇌게임, 희생자들이 자해와 가해를 거듭하는 하드고어적 짜릿함으로 무장한 <쏘우>는 지난해 할로윈 시즌을 겨냥하여 미국에서 개봉한 뒤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프로듀서 오렌 쿨스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영화의 마지막 20분 동안 관객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그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환각제를 먹은 것처럼 고함을 지르거나, 입을 떡 벌리고는 ‘도대체 이게 뭐야!’라는 표정을 짓거나”라며 낄낄댄다. 흥미진진한 한판 게임에 가까운 영화를 만든 감독과 제작진은 영문을 모르는 희생자의 반응을 지켜보는 연쇄살인범과도 같다. ‘도대체 왜!’ 혹은 ‘도무지 말이 안 돼’라는 푸념은 별 의미가 없다. 영리하게 고안된 심술궂은 이 게임은, 기꺼이 뛰어들어 최대한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아이디어만 있다면

<쏘우>는 어떻게 시작됐는가

호주의 로열 멜번 인스티튜트를 갓 졸업한 제임스 완은 틈새시장을 겨냥한 비디오용 영화를 생각하며 동기인 리 와넬과 함께 <쏘우>의 시나리오를 썼다. 할리우드로 건너갈 비행기표를 장만할 돈도 없었던 그들은 프로모션용 DVD를 만들어 매니저 스테이시 테스트로를 통해 미국의 제작자들에게 전달했다. 머리에 씌워진 커다란 덫을 벗어버리기 위해 누군가의 배를 갈라 열쇠를 꺼내는 희생자(실제 영화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상황 중 하나)의 신을 담고 있는 이 단편에서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에서 아담을 연기했던 리 와넬은 직접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이 밖에도 덫의 녹을 표현하기 위해 실제로 덫을 소금물에 담그는 등 여러모로 조야한 환경에서 제작될 수밖에 없었던 이 DVD는 <101 달마시안> <조지 오브 더 정글> 등을 제작했던 그렉 호프먼에게 도착한다. “DVD를 보는 몇분 동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는 그는, 이내 다른 두명의 제작자들에게 충격적인 영상을 소개한다. 다음날 아침 이들로부터 연락을 받은 두 작가가 14시간의 비행 끝에 할리우드에 도착하는 데는 2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10분간의 미팅 이후 제임스 완은 감독제의를 수락했고, 리 와넬은 출연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워킹비자를 받자마자 준비를 시작한 영화는 18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

제작에 소요된 돈은 모두 120만달러. 12억3천만원 정도에 해당하는 <쏘우>의 제작비는 한국의 소규모 상업영화의 평균제작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한정된 공간에,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인물만이 등장하는 시나리오 덕분에 특별히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뿐인가. 감독은 연출료도 받지 않고 개봉 이후 발생하는 수익을 분배받는 조건으로 계약에 응했고(이는 이후 지극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밝혀진다), 두 사람이 감금된 장소만을 세트로 제작했을 뿐 다른 모든 장소는 로케이션을 활용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쏘우>의 제작은 제작비 대비 50배에 달하는 흥행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데이비드 린치나 다리오 아르젠토와 같은 감독들로부터 기괴함을 물려받으면서도 관객이 쉽게 따라올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가진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27살내기 영화학도의 꿈은 그렇게 실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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