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랑이 아닌 공포에 반응한다.” 정치 고단수였던 리처드 닉슨의 이 말은 비단 매카시즘이 판치던 냉전시대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사회적 공포감 조성을 통한 표몰이는 한국이나 미국을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그 효용성을 인정받아온 전통 깊은 ‘정치기법’이다. 공포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이들은 비단 정치가뿐만이 아니다. 안보위기를 부추겨 무기를 팔아먹는 군수업자나 센세이셔널리즘으로 충격효과를 노리는 언론 등은 모두 이 ‘공포 문화’의 수혜자들이다. 이들 세력이 무서운 이유는 단지 공포를 조성함으로써 돈과 권력을 획득하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공포를 생산한다는 데 있다.
조너선 드미의 <맨츄리안 켄디데이트>가 서 있는 지점 또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포가 공공연히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미국의 정치판이다. 12년 전 걸프전에 참전했던 벤 마르코 소령(덴젤 워싱턴)과 레이먼드 쇼 상사(리브 슈라이버)의 부대는 적의 급작스런 공격을 받지만, 쇼의 영웅적 활약으로 2명만이 희생된 채 귀환한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되며, 부대원들도 그렇게 기억한다). 전쟁영웅이 된 쇼는 상원의원인 어머니 엘리노어(메릴 스트립)의 후광을 업고 하원의원으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마르코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밤마다 무시무시한 악몽에 시달린다. 모든 부대원들이 전장이 아닌 어떤 실험실에서 쇼가 전쟁영웅임을 세뇌받고, 심지어 쇼가 동료들을 죽이는 내용의 이 꿈은 갈수록 생생해진다. 비슷한 꿈에 시달리던 부대원들이 차례로 의문의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 마르코는 쇼에게 접근해 진실을 캐려 하고, 첨단무기를 제작하는 군수업체인 ‘맨츄리안 글로벌’과 엘리노어가 그 이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04년판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리처드 콘돈의 원작소설과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의 1962년 영화와 배경은 다르지만, 맥락은 비슷하다. 62년작에서 상원의원인 쇼의 계부는 “국방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근거없는 폭로전을 펼친다. “그런데 도대체 공산주의자가 몇명 있다고 해야 하지?”라고 아내에게 일일이 물을 정도로 무능력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는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최신작의 상원의원 엘리노어는 테러로부터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아들이자 전쟁영웅인 쇼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할 것을 당원들에게 강변한다. 공산주의와 테러리즘이라는 허구의 공포를 자극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려 하는 미국 정치의 폐부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드미는 원작과 메시지를 공유한다.
두 영화에서 가장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는 쇼의 어머니다. 쇼가 다른 상원의원의 딸과 사귈 때 어머니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관계를 훼방놓았고, 지나칠 정도로 쇼의 삶에 개입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레드 콤플렉스와 기묘하게 디졸브된 원작과는 달리 드미는 군산복합체와 ‘내연’의 관계에 놓여 있는 어머니 엘리노어를 통해 다른 이미지를 투사한다. 어떤 매체가 인터뷰에서 드미에게 “왜 이 영화의 제목을 <핼리버튼 켄디데이트>로 정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던졌을 정도로, 엘리노어는 군수업체 핼리버튼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미국 부통령 딕 체니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드미가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지난해 대통령 선거와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 영화를 발표했다는 점 등은 정치적 의도에 대한 심증도 갖게 한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화씨 9/11>과 함께 가장 많이 거론된 영화라고 해서 <맨츄리안…>을 정치 슬로건으로 가득 찬 영화로 파악하면 곤란하다. <맨츄리안…>은 드미의 대표작 <양들의 침묵>이 그랬듯, 미국사회와 미국인의 무의식 속에 박혀 있는 어두운 무언가를 건드리는 흥미로운 영화다. 마르코가 사람들에게 악몽의 고통을 호소할 때, 쇼가 마르코에게 “사실 나도 악몽에 시달려왔다”고 고백할 때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과 증오심으로 ‘세뇌’된 미국사회의 ‘암흑의 심장’은 비로소 박동한다. “<양들의 침묵> 이후 드미 최고의 드라마틱한 영화”라는 짐 호버먼의 호의적인 평가나 “예외적으로 지적인 엔터테인먼트이자 조너선 드미 영화 중 최고 지점”이란 케네스 튜란의 극찬은 한동안 방황을 겪었던 이 할리우드의 숙련가의 ‘귀환’에 대한 반가움의 표시가 아닐까.
정치영화와 심리스릴러, 그리고 액션이라는 세 장르의 한가운데에 놓인 이 영화가 나름의 성취를 얻은 데는 배우들의 공헌도 크다. 덴젤 워싱턴의 과장되지 않은 모습뿐 아니라 탐욕스럽고 편집증적인 분위기의 메릴 스트립이나 내면의 혼란을 순간순간 스칠 듯 드러내는 리브 슈라이버의 연기는 영화에 힘을 불어넣는다. 원작의 파격성과 도발성이 바래졌다는 사실이나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느슨해진다는 점에 아쉬움을 표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대의 공기와 흐름을 완성도 높은 영화적 틀 안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맨츄리안…>은 요즘 보기 드문, 솜씨있는 정치영화임에 틀림없다.
1962년판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 관해서
이때의 공포 대상은 ‘공산주의’
1959년 리처드 콘돈이 쓴 동명소설에 근거한 1962년판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드미의 버전과 배경과 기본 설정이 약간 다르다. 프랭크 시내트라, 로렌스 하비, 안젤라 랜스버리(<제시카의 추리극장>) 등이 주연한 이 영화에서 주요한 공포의 대상은 공산주의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벤 마르코와 쇼의 부대는 정찰 도중 누군가에 의해 어디론가 붙잡혀간다. 얼마 뒤 쇼는 화려한 팡파르 속에 귀국하고, 그의 가슴엔 국회 명예훈장이 달린다. 적군에 납치된 그가 적을 모두 무찌르고 동료를 구했다는 것이다. 마르코는 중국인, 러시아인들이 부대원들을 세뇌한 뒤 쇼를 살인자로 만드는 내용의 악몽을 매일같이 꾼다. 사실 마르코의 부대는 러시아 부대에 의해 만주 어딘가로 납치돼, 미국 내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세뇌된 것이다. 군은 처음엔 마르코의 꿈을 허황된 것으로 간주하지만 부대원들이 똑같은 내용을 기억한다는 점에서 특별수사대를 만들어 마르코를 기용한다. 흑백화면과 실험적인 앵글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공산주의와 매카시즘을 동시에 비판한다는 점이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직설적으로 묘사된다는 등의 이유로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특히 원작에서 노골적으로 묘사됐던 쇼와 어머니의 ‘특별한’ 관계는 영화 안에서도 어머니의 진한 키스로 비교적 과감하게 표현된다.
특히, 개봉 다음해 일어난 1963년 존 F. 케네디 암살사건은 이 영화를 더욱 유명하게 했다. 이 사건과 범인인 오스왈드는 영화의 설정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것. 사실, 당시 민주당의 관계자들은 데탕트 국면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영화의 제작을 반대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가 주연을 맡은 친구 프랭크 시내트라와의 연분을 고려해 제작사인 MGM 사장에게 이 영화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비로소 만들어지게 됐으니, 이건 지독한 아이러니다. 이후 판권을 찾은 시내트라는 한동안 이 영화를 극장에 걸지 않았고, 재상영은 1988년에야 이뤄졌다. 2004년판의 프로듀서로 시내트라의 딸인 티나가 참여한 것도 이러한 인연 또는 악연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