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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웨이>와 알렉산더 페인 [2] - 독립영화 선언문
박은영 2005-02-22

동시대 미국을 관찰하는 다큐멘터리스트

스파이크 존즈, 데이비드 O. 러셀, 폴 토머스 앤더슨 등과 ‘한묶음’의 유망주로 소개됐던 알렉산더 페인에게 그들과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묻지 말자. “1999년은 <일렉션> <존 말코비치 되기> <쓰리 킹즈> <매그놀리아>가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던 해다. 그래서 비교가 되는 것 같다. 공통점? 모두 35mm필름, 1초에 24프레임의 컬러 스테레오 영화를 만든다. 나이도 비슷하고.” 이렇게 면박에 다름 아닌 대답이 돌아올 테니까. 그러고보면, 알렉산더 페인은 그중에서 가장 부지런히 활동해왔고, 미국사회와 미국인의 ‘리얼리티’에 천착한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알렉산더 페인을 대면한 누군가는 그에게 상대가 불편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고, 대답하기보다는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알렉산더 페인의 아내인 배우 샌드라 오도 거든다. “그는 늘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캐내고 싶어하고, 요즘 시대 미국 남자들의 심리를 탐구하려 든다.” 이처럼 알렉산더 페인은 관찰하고 탐독하고 기록하는 걸 즐기는 자칭 “다큐멘터리언”이다.

동세대 미국 남성들의 일상과 심리를 담아내는 그의 영화에서 인물만큼 중요한 것이 공간이다. 그가 <시티즌 루스> <일렉션> <어바웃 슈미트>를 고향 오마하에서 촬영한 건 그런 이유다. “내가 나고 자랐기 때문에 가장 잘 알고 있고, 그만큼 특별하게 담아낼 수 있는 도시가 오마하다.” 오마하는 헨리 폰다, 말론 브랜도, 프레드 아스테어, 닉 놀테 등 창의적인 영화인들을 배출한 곳이지만, 영화 속에서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었다는 게 그의 불만. 무미건조하고 황량한 그의 영화 속 오마하는 보편적인 중서부 미국인의 정서, 보수적이고 이중적인 도덕성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사이드웨이>를 계기로 오마하에서 벗어난 그는 촬영 전 4개월을 캘리포니아 와인 농장에서 머물렀고, 전과 달리 “그림엽서 같은 느낌”으로 포도밭과 햇살을 담아냈다. 있는 그대로의 공간, 분장도 머리 손질도 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인물 등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스타일만은 변하지 않은 채다.

그리스계로, 한때 저널리스트를 희망했고, <스타워즈> 대신 안토니오니에 열광했던 까닭일까. 알렉산더 페인은 미국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기가 부족한 현실을 성토하곤 한다. “1970년대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영화가 자주 만들어졌다. 영화에 누드와 욕설이 처음 등장한 그때는 현실의 리얼리티와 영화의 리얼리티가 아주 가까웠다. <이지 라이더> <졸업> <미드나잇 카우보이> 같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사랑받았다. 지금은 어떤가.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카툰 같은 영화 일색이다. <21그램> <미스틱 리버>처럼 우리 사회를 반영하고 진짜 사람들을 보여주는 영화가 더 많이 필요하다.”

공동작가 짐 테일러랑 동아리식 영화 만들기

마음이 맞는 스탭들로 진용을 짜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다. 페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데뷔작 <시티즌 루스>부터 최근작 <사이드웨이>까지 각본 크레딧에 그와 함께 앤드(&)로 엮여 올랐던 짐 테일러다. 친구의 친구로 안면만 트고 지내던 그들이 환상의 콤비로 맺어진 것은 재정 상태가 악화된 테일러가 페인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들은 서로를 웃기는 재주가 있고, 메시지에 대한 강박이 없는 스토리텔러라는 점에서 통해, 컴퓨터 한대에 키보드 둘을 꽂아 ‘함께’ 집필하기 시작했다. 하루 6시간씩 글을 쓰고, 오후 4시쯤 낮잠을 청하는 습관도 같이 들었다. “우리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아웃라인을 정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매일 만나서 어제를 정리하고, 오늘은 무슨 일을 벌일까 고민하는데, 우리 자신을 놀라게 하는 쪽으로 몰고 간다. 원작이 있어서 결론은 알고 있지만, 과정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크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짐 테일러의 증언이다. 미술의 제인 앤 스튜어트, 편집의 케빈 텐트, 의상의 웬디 척, 음악의 롤페 켄트도 페인과 3작품 이상을 함께한 ‘좋은 친구들’이다.

배우 캐스팅은 조금 다르다. 알렉산더 페인은 특별히 선호하거나 늘 함께하는 배우는 없다. 하지만 물주의 입김이 쉽게 작용하는 캐스팅만큼은 그 결정권이 감독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파라마운트는 <일렉션>의 매튜 브로데릭 역할에 톰 크루즈나 톰 행크스를 원했다. 100만년이 지난들 그들이 내 영화를 거들떠나 볼까. 스튜디오는 스타 캐스팅을 흥행 보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어바웃 슈미트>의 잭 니콜슨처럼 서로의 요구가 잘 맞아떨어지면 다행이지만, 그런 행운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다시 <사이드웨이>의 캐스팅 이야기. 두 주인공 중 삼류 배우 잭 역할을 탐낸 조지 클루니를 받아들였다면, 영화의 때깔과 제작 환경은 조금 더 ‘럭셔리’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인은 단호했다. “당신처럼 잘생기고 성공한 스타 배우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루저를 연기한다면, 관객이 그걸 믿겠냐”고 설득했고, 클루니도 수긍하고 물러났다. 그가 옳았다. 아닌 건 아니었다. 대신 페인은 <일렉션> <어바웃 슈미트>의 오디션에서 고배를 마셨고, 잭과 비슷한 인생 역정을 거치며 잊혀져간 토머스 헤이든 처치를 불러 앉혔는데, 처치는 다른 세 배우와 어우러져, 너무 실감나서 믿기 힘들 정도의 리얼리티와 에너지를 발산해냈다.

한 인터뷰에서 페인은 “작가주의를 배격하는 할리우드에서 당신은 어떻게 살아남았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건 재미난 코미디이고, 저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스튜디오에 어필하되, 그의 구상과 다른 지시나 제안이 떨어지면, 달려가 싸운다고, 싸워서 이긴다고.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페인의 고백은, 감독은 자신의 영화 세계에서 완전무결한 ‘자치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의 땀이고 눈물이며 콧노래다.

알렉산더 페인의 독립영화 선언문

“감독의 목소리 담긴 작은 영화가 늘어나길”

냉전 시대 비동맹 회의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사실 지구상의 비동맹 국가는 미국과 소련, 두 나라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미국 독립영화에 대한 질문을 들을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오늘날의 독립영화는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만든다. 오직 그들만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선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작비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다. 마틴 스코시즈는 1억달러짜리 스튜디오영화를 찍지만 누구도 그의 독립성을 의심하지 않고, 선댄스에는 ‘날 고용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저예산영화들로 넘쳐난다.

내가 바라는 건 두 가지다. 감독의 목소리와 진심이 담긴 영화가 늘어나는 것, 지적이고 인간적인 작품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스튜디오영화와 독립영화 사이의 간극이 안타깝다. 스튜디오가 19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개인적이고, 위험하고, 정치적인 영화들에 투자해주었으면 한다. 이건 순진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이야기다. 지난 25년간 미국영화는 존재했지만, 미국에 관한 영화는 부재했다. 공식에 짜맞춰진 영화들이 맥도널드 햄버거처럼 소비됐을 뿐이다. 하지만 2004년은 풍요로운 해였다. <이터널 선샤인> <기품있는 마리아> <비포 선셋> <화씨 9/11>이 있었고, 웨스 앤더슨과 마이크 니콜스와 스티븐 소더버그의 영화가 있었고, 알모도바르와 월터 살레스와 장이모의 영화도 만날 수 있었다. 작고 사적이고 지적인 영화가 늘어났고, 상업 대작에도 개성 강한 감독들이 투입됐으며, 폭스 서치라이트처럼 작은 영화를 제작지원하는 영화사들이 생겨났다.

왜 지금일까? 야수가 죽을 때 새 피를 찾는다는 말처럼, 대작이 좌초하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400만달러짜리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5천만달러를 벌어들인 건, 관객이 새로운 영화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작은 사람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 해가 지고 있을 때, 라는 말이 있다. 부시와 그의 타락한 친구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더 깊이 성찰하게 된다.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영화가 절실한 건 그래서다.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 박탈당한 이들의 이야기,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 모두가 정치적 행동이다. 선량한 사람들이 침묵할 때 나쁜 일이 생기는 법이다.

스튜디오는 대작을 위해서 작은 영화들을 희생시킬 게 아니라 작은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주길 바란다. 그러면 감독들도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스튜디오와 감독들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새 시대가 열렸다. 내 이런 바람이 머지않은 미래에 실현되길 소원한다. 스튜디오는 단순히 ‘독립’ 영화감독들과 협력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독립영화’의 산실로 거듭날 수 있다.

※<버라이어티>에 기고한 알렉산더 페인의 글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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