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에 관해 쓰기에 앞서 영화 <진주만>의 포스터를 본다. 포스터 하단에는
제목 위에 커다란 전투기 한대가 박혀 있다. 그 위로 지그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영화 속 세 남녀 주인공들의 얼굴이 보인다. 인물들과 전투기
사이에는 빨간 글씨로 다음과 같은 카피가 씌어 있다. “전세계가 숨죽여 기다렸던 사상 최대 전투액션 블록버스터!” 특색없고 진부한 데다가 부조화의
기미마저 내비치고 있는 이 포스터는 그런 대로 영화 <진주만>의 성격- 멜로드라마와 전쟁영화의 어정쩡한 결합- 을 잘 요약해놓고
있다.
컴퓨터 게임을 닮아가는 드라마
새벽하늘을 가로지르며 저공비행으로 몰려오는 300여대의 전투기들, 전함으로 돌진하는 어뢰, 그리고 붉은 불길과 함께 침몰하는전함들과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숱한 사람들. 이러한 이미지들이 스펙터클한 소재를 찾는 제작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이런
제작자들의 관심으로 만들어지는 할리우드영화들이 대개의 경우 수긍하기 힘든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그에 관해 상세히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게다가 <진주만>은 그러한 논의에 적합한 영화라고도 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시 말하고자
한다). 문제는 위와 같은 스펙터클 속에서 내러티브의 논리가 깡그리 무시당하고 있는 최근 할리우드영화의 경향 속에 있다.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의
탄탄한 내러티브가 의심스러운 이데올로기(들)의 작동을 강화하고 있다는 옛 영화이론가들의 주장이 일견 타당함을 인정한다 해도 할리우드영화의 그러한
구성방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임과 동시에 미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의 경향-
무엇보다 디지털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을 따라가보건대 고전적 영화들의 드라마적인 강점은 점점 실종돼가고 있는 듯하다. 내러티브를
포기하는 대신 블록버스터영화들이 취하는 새로운 전략은 컴퓨터 게임의 단순하지만 흡인력 강한 구조를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최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들은 다소 긴 인트로와 피날레를 가진 컴퓨터 게임을 관전하는 관객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부쩍 자주 진행되고
있는 컴퓨터 게임의 영화화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혀진다. <진주만>은 할리우드영화의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서 받아들여진다(유사한
시기에 개봉되는 <미이라2>나 <툼레이더> 등도 더불어 언급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진주만>에서 인트로와
피날레를 구성하는 것은 30년대 말에서 40년대에 걸쳐 만들어진 낡아빠진 전쟁멜로드라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애수>(1940),
<카사블랑카>(1942) 등등- 의 관습이며 중심적인 볼거리는 대략 <지상 최대의 작전>(1962)이나 <도라 도라
도라>(1970)와 같은 전쟁영화의 몇몇 이미지들을 좀더 다이내믹하게 업그레이드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진부함과 유치함, 탈출구가 없다
<진주만>은 스펙터클과 드라마라는 상이한 조합을 절묘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대로 볼 만하게 엮어내는 데도 실패한 영화이다. 게다가
<진주만>이 모델로 삼고 있는 30, 40년대 전쟁멜로드라마의 플롯은 현재의 관객에게는 너무 진부한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도중 객석에서
터져나오는 한숨과 비아냥거림은 주로 그러한 사실에 원인이 있다.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져 있을 즈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가 살아 돌아오고
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다는 설정-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인해 생긴 갈등은 결국 남성들간의 화해의 제스처로 마무리되거나(<카사블랑카>)
여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애수>). 싸구려 감상주의로 이데올로기를 돌파(라기보다는 은닉)해가는 방식. 이러한 방식에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한 멜로드라마의 거장은 단연 파스빈더(<마리아 브라운의 결혼>(1978), <릴리 마를렌>(1980))이다-
이 너무 낯간지럽고 단순하다고 생각했던지 시나리오 작가인 랜달 월레스는 몇 가지 플롯을 더 추가해놓았다. 두 남자 주인공의 유년 시절, 아버지가
없는 레이프(벤 애플렉)는 전쟁후유증에 시달리는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대니(조시 하트넷)에게 일종의 보호자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관계는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유지되지만 영화 후반부의 도쿄 공습 이후 이 관계는 역전되어 대니는 자신의 몸으로 총탄을 막아내며 레이프를 대신해 죽는다.
이후 연인 에블린(케이트 베킨세일)과 재회한 레이프는 대니의 아들인 또다른 대니- 아버지를 잃은 아들- 의 자상한 보호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은 유치함을 더할 뿐이다.
미군 참모부과 워싱턴, 그리고 일본군 함대를 오가는 영화적 구성은 앞에서 언급한 <지상 최대의 작전>이나 <도라 도라 도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전신을 이용한 일본군의 정보교란작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을 들으며 하와이에 가까이 왔음을 짐작하는 일본군들의
모습, 갓 설치된 레이더에 잡힌 물체에 대한 보고를 듣고서도 본토에서 날아오는 B-17 폭격기일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장교의 모습
등은 <도라 도라 도라>에서 묘사되었던 바 거의 그대로이다. 재미있는 것은 <도라 도라 도라>가 보여주는 전쟁영화의 구성과
스펙터클에 억지로 멜로드라마를 교접시키기 위해 취하는 인물선택의 방식이다. <진주만>은 <도라 도라 도라>에서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몇몇 인물들을 과감히 주인공 및 비중있는 조역의 자리로 올려놓고 있다. <도라 도라 도라>에서 진주만 공습 도중 간신히
전투기를 이끌고 출격해 나가던 두 조종사는 <진주만>의 두 주인공 레이프와 대니의 모델이 되었음이 분명하며, 함상에서 일본 전투기들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던 한 흑인병사는 쿠바 구딩 주니어가 연기한 자존심 강한 취사병- 사실 <진주만>에서 이 캐릭터만큼이나 줄거리와의
별 연관없이 따로 노는 이도 없다. 굳이 이러한 인물을 집어넣은 것이 진주만에서 희생당한 흑인병사들이나 <진주만>을 보러올 흑인
관객을 위한 배려였다고 해도 솔직히 말해 그저 ‘같잖을’ 따름이다- 에 의해 좀더 구체화되었다. 이 인물들은 두개의 상이한 장르 속을 부지런히
옮겨다니며 어떻게든 이야기를 한줄에 꿰어보려고 시도하지만 역부족이다.
참혹함이나 진중한 성찰 대신 전쟁의 스펙터클뿐
이처럼 <진주만>은 그야말로 게으른 드라마투르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제리 브룩하이머-마이클 베이 콤비에게어차피 이야기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게다. 그들의 관심은 영화 중·후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습 시퀀스에 쏠려 있다.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워 게임’으로서만 역사를 다루기 위해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참혹함이나 <씬 레드 라인>(1998)의 진중한
성찰은 모두 물러나야만 한다. 그 결과, 진주만 공습 시퀀스 뒤에 이어지는 병원의 아비규환장면은 매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장면을 보는 관객이 전쟁의 참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거나 비인도적인 진주만 공습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저 이건 지루한 인터미션일 뿐이다. 흡사 게임의 한 단계가 끝날 때마다 화면에 떠오르는 전적 데이터를 보는 기분이랄까. 게임의
주관자로서 제리 브룩하이머-마이클 베이가 보여준 솜씨의 과시는 바로 이 병원장면쯤에 이르러 역겨움을 유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별 중요치 않은
인터미션은 곧 지나가고 게임의 제2단계- 두리틀 대령과 그 대원들에 의한 도쿄 공습- 가 시작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건 단계가 진행될수록
난이도가 하향조정되는 게임이었던가. 두 번째이자 마지막 전적 데이터- 도쿄 공습의 의의에 대해 설명해주는 에블린의 내레이션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를 접할 때쯤이면 뭔가 속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여하간 게임의 구성이야 어찌 되었든 게임이 다 끝나고 나서 화면 위에 떠오르는 전적 데이터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쿄 공습이 끝나고 두리틀 대원들의 귀환장면이 나오기가 무섭게 자리를 뜨는
관객도 몇몇 있었다. 영화관람의 경험이 점점 게임관전의 경험을 정말 닮아가는 것일까? 혹은 그 반대인가? ).
컴퓨터 게임의 구성자들에게 메시지란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이런 게임을 닮아가는 영화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들>에서 읽은 바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정보보다도 삶에 더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위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이를 역으로 뒤집으면, 매스미디어는 정보들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각결핍을 예방하기 위해 정보를 발신하고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2)이나 <크래쉬>(1996) 같은 영화의 해석에나 적합한 구절인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신호발생기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진주만>을 보면서 (졸지 않는 동안은) 내내 이 구절을 떠올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신호발생기가 그리 썩 잘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진주만>과 같은 영화에서
그 이데올로기적 함의 따위를 논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일이 아닐 거라고 지적했다. 그건 부분적으로 <진주만>이 설파하는 이데올로기가
워낙 구시대적이고 한심한 것이라 현대의 관객에게는 도무지 먹혀들지 않을 거라는 짐작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엉성하게 만들어진 게임과도
같은 영화 <진주만>의 구성 자체에 이유가 있다. 전쟁멜로드라마의 감상주의와 전쟁영화의 스펙터클 사이를 임의적으로 넘나들고 있는
영화 <진주만>은 장면들의 편의적 배열과 고색창연한 행위 및 대사들로 인해 예상치 않은 ‘소격 효과’를 낳는다. 이는 스스로가 설파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조롱거리로 만든다. 덕분에 관객은 안심하고 스펙터클이 주는 자극에 온전히 몸을 내맡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심이 결국 우울한 근심으로 바뀌는 것은 영화를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나만의 병일까?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