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채굴에 실패한 탐사팀을 실은 화물 수송기가 몽골의 고비 사막에서 거대한 모래폭풍을 만나 추락한다. 무전 안테나가 뽑히고 비행기 끝부분이 완전히 잘려 날아가는 공포의 순간이 지나고, 간신히 사막 한가운데로 착륙한 10명의 승객들은 끔찍한 서바이벌 게임에 직면한다. 냉소적인 조종사 프랭크(데니스 퀘이드)와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힌 비행기 디자이너 엘리엇(지오바니 리비시)은 비행기 재건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 때문에 대립하게 되는데….
<피닉스>의 숨막히는 초반부 추락신(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로스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은 간만에 보는 재난영화의 잔혹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빠르고 급하고 강력하게 실감나는 모래폭풍, 그리고 이후 사막에서 견뎌내야 하는 삶은 일종의 충격 효과이다. 한낮에는 탈수로, 한밤에는 추위와 방향감각 상실(<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사막을 떠올려보라. 수직선이 보이지 않는 끝없이 평평한 공간이 주는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주는 공포로 죽어가야 하는 인간의 처지는 무력하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사막의 약탈자 베두윈족은 이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피닉스>는 스스로 재미없어지는 길을 선택한다. 아마도 이 영화가 무척 재밌어질 수 있는 지점은 원작에서 이미 다 발휘되어서였는지도 모른다. B급 감수성을 지닌 ‘남자들의 영화’의 제왕 로버트 알드리치의 1965년작 <피닉스의 비행>에는 10명의 승객들이 모두 남자였다. 그들은 거개가 오합지졸 취급받던 ‘육체 노동자’들이다. 어떤 초인적인 힘이나 뛰어난 두뇌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들의 팔다리를 이용해서 사막에서 탈출한다는 드라마는 폭발하는 듯한 마초적 아드레날린의 한판 승부가 될 수도 있었다(비행기라는 기계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남성들의 판타지). 그러나 2004년작 <피닉스>에는 홍일점 켈리(미란다 오토)가 존재한다. 이글거리는 수컷들 틈 한가운데 끼어 있는 이 여성이 어떤 욕망이나 긴장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대체 왜 새삼스럽게 여성으로 설정되었는지 정말 이상하다. 게다가 살아서 가족에게 돌아가자는 지고의 휴머니즘의 가치가 수도 없이 반복되면서 영화의 후반부는 몹시 지루해진다. 캐릭터 묘사도 일관성이 없는데, 가장 ‘생뚱맞은’ 캐릭터는 비행기 디자이너 엘리엇이다. 처음엔 연약하고 겸손하게만 보이던 그가 어느 순간 사이코로 돌변하여 “나에게 ‘제발’이라고 빌어! 내가 대장이야!”라고 외칠 때는 거의 실소를 자아낼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