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 아트하우스 아트큐브, 11월19일부터 일본 다큐멘터리 특별전 상영
일본 대중영화 46편을 무더기로 소개한 메가박스일본영화제(11월10∼24일)에 이어, 일본 현대의 사회상을 스크린을 통해 전언하는 또 하나의 영화제가 열린다. 단, 이번에는 직접화법만 쓰는 영화들이다. 일주 아트하우스와 일본 국제교류기금은 11월19일부터 28일까지, 193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만들어진 일본 다큐멘터리 16편을 한데 모아 상영한다. ‘일본 다큐멘터리 특별전-역동의 기록, 매혹의 필모그래피’라고 명명된 이번 행사에서 상영되는 작품들을 꿰뚫는 테마는, 일본이 체험한 전쟁과 산업화의 격동과 여파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영화가 주시하는 개인의 조건과 카메라의 앵글에 따라, 격동과 여파는 다양한 모습으로 기록된다. 필름은 때로 역사의 이행기를 만나 자신의 노동이 새로운 역사로 직결되는 모습을 목격하는 인간의 감격으로 요동치기도 하지만, 다큐멘터리스트들은 역사의 죄악과 오류가 남긴 낙진 같은 흉터와 후유증으로 신음하는 순간을 더욱 집요하게 응시한다. 상영작 16편의 감독은 11명. 일본 다큐멘터리 역사의 명인들로 기억되는 가메이 후미오, 하니 스스무, 쓰치모토 노리아키, 하라 가즈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작품이 각기 두편씩 소개되어 긴 호흡의 관람을 권유한다. 이 밖에도 다큐멘터리의 역사에 <산리즈카 7부작>과 야마가타영화제라는 귀한 선물을 남긴 오가와 신스케의 1982년작 <일본국 후루야시키 마을>, 미조구치 겐지의 제자였던 신도 가네토 감독이 퍼즐 맞추듯 집요하게 완성한 <어느 영화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의 기록>도 만날 수 있다. 영화제 기간 중인 11월27일에는 이번 프로그램에 포함된 <아가 강에 살다>의 사토 마코토 감독이 연출자이자 다큐멘터리 연구자로서 일본 기록영화의 역사와 전망을 논하는 강연이 마련된다(홈페이지 www.iljuarthouse.org).
김혜리 vermeer@cine21.com
교실의 아이들 敎室の子どもたち감독 하니 스스무 l 흑백 l 35mm l l 30분 l 1954년
1949년 학술 출판사 이와나미 서점이 세운 이와나미 영화제작소는 계몽적인 교육·과학분야 기록영화로 일가를 이뤘다. 문부성 후원으로 만들어진 <교실의 아이들>은 이와나미 제작소의 존재감을 세간에 알린 작품이다. 산만한 소학교 2학년 교실. 온화하고 세심한 여교사는 교실을 휘어잡는 남자교사의 권위가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통솔보다 소통이 우선이라 깊이 믿는 그는 아이들을 독립된 개인으로서 관찰하기 시작한다. 하품을 자주 하는 소녀는 부끄러움이 많고 신체발육이 더딘 소년은 학습 흥미도 덩달아 낮다. 명랑하고 착실한 아이가 있는 소그룹은 과제에 실패해도 웃음이 터진다. 한 오라기의 감정과 생각도 숨길 줄 모르는 아이들의 투명한 얼굴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무기다. 1955년 <키네마준보> 연례 베스트 10에서 3위를 차지했다. 기자재와 촬영 테크놀로지가 충분히 발전되지 않아 기록영화에도 약간의 연출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당시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이 놀라움을 자아냈고 심지어 몰래카메라로 찍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베니스영화제 교육부문상을 탄 1956년의 후속작 <그림 그리는 아이들>과 묶여 개막작으로 상영된다.
어느 기관사 조수 ある機關助士감독 쓰치모토 노리아키 l 컬러 l 35mm l 37분 l 1963년
어촌 주민들의 수은 중독 실태를 고발한 15편의 미나마타 연작으로 명성을 드높인 쓰치모토 노리야키 감독의 초기작이다. 일본국영철도(JR)의 의뢰로 제작됐다. 기관사의 꿈을 오랫동안 키워온 주인공은 일본국영철도의 기관사 조수로 일하고 있다. 쉴새없이 석탄을 퍼넣고 기관의 정비 상태를 점검하며 눈코 뜰 새 없이 기관사를 보조하는 것이 그의 임무. 도쿄에 가까워질수록 열차도 많아지는 철도망에서 운행시각 준수는 사고 예방의 기본이다. 단 몇분의 연착을 안전운행수칙을 준수하면서 만회하는 숨가쁜 과정을 상당한 서스펜스를 의도한 편집으로 재현했다. 영국의 존 그리어슨 감독 작품에 비견되기도 했다.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같은 감독의 영화 <길 위에서>는 택시기사를 주인공으로 도쿄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도시 교향악을 그린 작품이다.
가라유키 상 からゆきさん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l 컬러 l 16mm l 76분 l 1973년
평론가 사토 다다오에 따르면,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극영화의 소재와 모델을 하도 철저히 취재한 나머지 급기야 조사과정 자체를 영화로 만드는 편이 편리한 지경에 이르렀다. <마담 옹보로의 생활>과 <가라유키상>도 그런 경우. <가라유키상>은 일본이 처음 인력을 ‘수출’한 태평양 전쟁기에 납치되어 말레이시아 사창가에 팔려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73살 키쿠요 할머니의 이야기다. 납치당해 실려온 배삯부터 당장 벌어야 했던 19살 매춘부는 늘어만가는 빚더미를 겨우 갚고 몇 남자와 살림도 차리지만, 타국에서 손자들에게도 경멸받는 노년을 보낸다. 일본은 외화벌이에 이용한 그녀들을 전혀 기억하지 않았고, “담배만 있으면 족하다”고 말하는 할머니는 포주에 대한 증오조차 더이상 느끼지 않는다. 진짜 충격은, 덤덤한 할머니의 진술을 듣고난 감독이 일본에 돌아와 할머니의 옛 고용주와 이웃을 만났을 때 찾아온다. 제3자가 증언하는 키쿠요의 가족사와 인생은 너무나 가련하고 참혹한 것이어서, 그녀가 얼마나 불행에 둔감해졌는가를 관객에게 일깨우기 때문이다.
천왕의 군대는 진군한다 ゆきゆきて、神軍감독 하라 가즈오 l 컬러 l 16mm l 122분 l 1974년
2차대전 말 뉴기니에 참전했던 62살의 오쿠자키 겐조는 인육까지 먹는 극한 상황에서도 결사항전 명령에 내몰리는 생지옥을 경험하고 생환한다. 이후 그는 전쟁 책임을 면제받은 천황을 저격하는 등 여러 차례의 테러로 13년9개월을 복역한다. 석방 뒤에는 종전선언에도 불구하고 탈영 죄목으로 사살된 두 젊은 병사의 살해경위를 조사한다. 정의실현과 진실규명이야말로 자신을 살려둔 신의 뜻이라 믿는 그는 새로운 의미의 ‘신군’이 되어 가차없이 진군한다. “목적은 폭력을 정당화한다. 살아 있는 한 폭력에 의존할 것”이라고 말하는 오쿠자키 겐조의 취재는 드물지 않게 멱살잡이로 끝난다. 형제를 죽이고 먹었을지도 모르는 자와 유족이 마주앉은 테이블에 흐르는 긴장은 소름끼친다. 종교적 열의에 들뜬 주인공, 명료한 선악구분, 명예율의 충돌,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는 직설적 대사와 액션, 거짓이 섞인 증언의 조각으로 진상을 맞추어가는 과정이 어느 미스터리스릴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흡인력을 발휘한다. 하라 가즈오 감독의 또 다른 상영작 <극사적 에로스>는 그를 떠난 전처를 쫓아다니며 페미니스트로서 분방하고 격렬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생활을 담은 끈질긴 다큐멘터리다.
어느 영화 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의 기록 ある映畵監督の生涯 溝口健二の記錄감독 신도 가네토 l 컬러 l 16mm l 150분 l 1975년
미조구치 겐지가 타계하고 18년이 지난 1974년, 제자였던 신도 가네토는 카메라를 들고 살아 있는 미조구치의 이웃과 영화동료를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조구치는 촬영 중 집중을 깨기 싫어 간이 용변기를 쓴 감독이었고 밤새 지은 세트를 2m 옮기려고 몇번을 지었다 부순 폭군이었으며 현장에서 원한에 찬 여인에게 피습당한 바람둥이였고 사케 마시는 법을 아는 술꾼이었다. 신뢰하는 배우와 스탭일수록 가혹한 기대치를 강요하는 고집쟁이였지만,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념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사내이기도 했다. 압권은 <오하루의 일생>의 주인공 다나카 기누요의 인터뷰. 말년의 미조구치가 공공연히 구애했던 여배우는 침착하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선생은 나를 통해, 오하루나 오치카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물기를 반짝이며 조용히 덧붙인다. “후일 나도 사랑 비슷한 것을 느끼긴 했지요.” 150분의 회고는 쓸쓸히 숨진 미조구치의 마지막 노트로 끝난다. “벌써 가을의 한기가 왔다. 당신들 모두와 다시 한번 일하고 싶다.”
우민추: 노인과 바다 老人と海감독 존 준커만 l 컬러 l 16mm l 110분 l 1990년
남지나해 연안 마을의 늙은 어부. 아침에 바다로 나선 그가 쪽배 한척과 낚싯줄과 작살로 청새치를 뒤쫓는 동안 늙은 아내는 남편의 무사한 귀가와 풍어를 기도한다. 그러나 잡히는 것은 저녁거리 잔챙이뿐. 정성스런 기원과 기다림 끝에 할아버지가 거대한 청새치를 낚아올린 날, 가족과 따스한 밥상에 둘러앉은 노인의 뺨에는 어린애 같은 홍조가 어린다. 30년간 일본에서 거주한 존 준커만은 2개월 일정으로 어부의 생활을 찍기 시작했으나 청새치를 잡는 장면을 얻기까지 2년이 소요됐다고 한다.
내 아내는 필리핀 여자 妻はピリピ?ナ감독 데라다 야스노리 l 컬러 l 16mm l 100분 l 1993년
1990년대 초 일본 청년이 체험한 국제결혼의 실상을 스스로 기록한 사적인 다큐멘터리. 그러나 우리에게도 보편적인 생각거리를 준다. 영화학도 데라다가 도쿄 유흥가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 테레사와 결혼을 결심하자 가족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동생은 오빠를 이용하려는 결혼이 아닌가 의심하고 아버지는 절연을 선언한다. 둘은 결혼하고 딸도 태어나지만, 테레사는 필리핀의 가족에게 송금하기 위해 계속 술집에 나간다. 혼자 버려지다시피 자라온 그녀는 딸에 대한 모성보다 친정에 대한 부양의무를 더욱 무겁게 느끼는 것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멀지만, 젊은 부부는 소소한 다툼과 갈등을 감당하며 서두르지 않고 가정의 둥지를 틀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