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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레이스
2001-06-19

오! 그레이스

■ STORY 영국 콘월지방의 부둣가 마을. 남편을 여읜 아마추어 원예가 그레이스(브렌다 블리신)는 고인이 엄청난 빚더미만 유산으로 남겼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빈털터리 그레이스는 하는 수 없이 정원사 매튜(크레이그 퍼거슨)를 해고하지만, 매튜는 그가 교회 뜰에 몰래 키워온 대마가 시들자 그레이스에게 보살펴달라고 맡긴다. 집을 경매당할 궁지에 몰린 그레이스는 대마가 비싼 상품이란 사실을 듣고 그녀의 온실에서 마리화나를 수경 재배해 딜러에게 팔자는 제의를 한다. 매튜의 임신한 애인 닉키(발레리 에드몬드)에게 매튜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한 그레이스는, 손수 ‘물건’을 들고 딜러를 만나러 런던으로 나선다.

■ Review

십자수 도안처럼 예쁜 집의 온실을 완벽하게 건사하고, 마을 부인들의 티 파티를 주재하는 주부 그레이스. 그녀는 자신의 소우주를 자애롭게 다스리는 행복한 여왕이었고 이웃은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남편이 비행기에서 낙하산도 없이 몸을 던진 그날 이후, 그레이스는 남편이 실은 그리 튼튼한 울타리가 아니었음을 발견한다. 장례식에 나타난 낯모르는 여인, 그리고 무책임과 불성실의 흔적으로 얼룩진 청구서들. 그러나 <오! 그레이스>는 평생 사랑한 남자의 배신에 직면한 여성의 슬픔을 연민하기보다, 이웃과 차 한잔을 나눌 수 있는 거실과 열정으로 가꿔온 온실을 빼앗기게 된 존경할 만한 중년 부인의 곤경을 염려한다. 그레이스의 위기는, 온정과 덕을 최고의 가치로 믿는 공동체에 있어서도 심각한 위기다. 살아 생전 남편의 탈선을 그레이스에게 쉬쉬했던 마을 사람들은, 자살이 분명한 부음을 듣고도 “혹시 화장실 문으로 착각했던 게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입을 뗄 만큼 세심하다. 구멍가게 주인은 장 보러 온 그레이스에게 물건값이 5펜스라고 우기고, 길거리 자선모금에 나선 이웃 부인은 그레이스가 다가오자 한사코 모금함을 숨긴다.

그러나 길바닥에 나앉을 지경에 이른 그레이스의 곤경이 홍차 한잔의 정다운 위로로 해결될 리 만무하다. 크레이그 퍼거슨과 마크 크라우디의 시나리오는, 대마의 대량 재배라는 엉뚱한 돌파구를 아마추어 원예가인 주인공에게 찾아줌으로써, 이 미담을 일탈과 위반의 감미로움을 옹호하는 코미디로 이끌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범’들의 역할. 정원사 매튜와 그레이스의 ‘부적절한’ 사업을 신부님은 태연히 눈감아주고 동네 의사는 한수 거든다. 그런가 하면 나머지 한가한 주민들은, 대마를 키우느라 그레이스의 온실에서 치솟는 백열 조명을 감상하기 위해 3D영화 관객처럼 보안경까지 쓰고 기다린다. <오! 그레이스>의 공간은 자조(自助)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오! 그레이스>는 그 원칙에 입각해 중앙의 ‘법’을 지방 공동체 나름의 도덕률로 슬쩍 밟아버리며 무해하고 애교스런 ‘범죄’에 능청스런 윙크를 보낸다는 점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이웃의 복권 당첨금을 둘러싼 아일랜드 촌로들의 소동을 그렸던 <웨이킹 네드>와 한통속이며, 스코틀랜드 촌락의 밀수 소동을 그린 일링 스튜디오의 1949년 코미디 <위스키 갤로어!>의 후예다. 굳이 직계를 따지지 않는다면, <오! 그레이스>는 괴짜 주민들의 앙상블 연기와 집단적 액션으로 드라마의 결론을 끌어내는 <로컬 히어로>, <잉글리시 맨> 같은 영국식 지역 공동체 코미디의 최신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레이스가 그녀의 정다운 마을을 떠나 마리화나를 팔기 위해 대도시 런던의 살벌한 거리로 나서는 대목은 주인공과 영화 모두에게 최대의 고비다. 그러나 나이젤 콜 감독은 마약 딜러 자크조차 그레이스의 순수와 선의에 반해 그녀의 안온한 지붕 밑으로 투항하도록 만든다. 이쯤에서 영화의 원제인 ‘세이빙 그레이스’(Saving Grace)는 세 가지 의미를 드러낸다. 그레이스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을 돌보는 재능을 지닌 여성이고, 영화는 곤경에 처한 그레이스를 구조하는 스토리이며, 그레이스와 이웃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황폐한 세상의 ‘세이빙 그레이스’(한심한 전체를 구제하는 유일한 미덕)인 셈이다.

이 기분 좋은 영화는 주인공들의 사소하지만 명백한 범법 사실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리고 그레이스의 빚은? 관객이 미처 근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오! 그레이스>는 만사를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해피엔드로 척척 해결한다. 이처럼 <오! 그레이스>는 관객을 밀고 당기는 극적 요령이나 풍자와 페이소스의 신맛은 덜한 영화다. 마리화나 연기에 취한 시골 사람들과 그레이스를 뒤쫓아온 런던 사람들이 연출하는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클라이맥스도 결백하고 천진한 환희의 한순간일 뿐, 전복의 해방감이 넘치는 카니발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행복한데, 게다가 아무도 다치지 않는데, 이것이 어떻게 죄일 수 있을까?” 하는 표정을 짓는 영화에 대고, 마리화나와 관련된 현실의 윤리적 딜레마나 결론의 사실성을 정색하고 묻는 것은 머쓱한 노릇이 될 성싶다. 그래서 <오! 그레이스>의 마리화나 연기는 <풀 몬티>의 실직 철강 노동자를 일으켜 세운 스트립쇼나 <브래스드 오프>의 폐광 노동자들을 위무한 오케스트라 연주보다는 <문스트럭>의 로맨틱한 달빛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오! 그레이스>는 분명 영국영화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영국영화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2000년 선댄스영화제 관객상 수상작이며 미국 개봉 당시 30개관에서 개봉했다가 약 800개관으로 확대 상영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브렌다 블리신 아름다운 주책의 힘!

하염없이 웃다가 그 웃음이 어느 순간 울먹임으로 넘어가는 연기가 누구보다 자연스러운 배우. <세이빙 그레이스>의

헤로인 브렌다 블리신(55)은 그녀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세 번째 영화 <비밀과 거짓말>의 신시아 역으로 세계에 얼굴을

알린 늦깎이 여배우. <비밀과 거짓말>이 개막작으로 선정된 제1회 부산영화제 당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영국 켄트 출신인 블리신은

대학 졸업 뒤 은행, 철도회사, 광고 에이전시 등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기 수업을 시작했고, 오디션을 거쳐 연극,

TV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마이크 리 감독과 처음 만난 1980년 TV 영화 <성인들>은 배우로서 대전기를 마련해준 사건. 극중

인물의 인생을 재구성하다시피하는 마이크 리의 연기지도 방식은 “그때까지 내가 매우 게을렀음을 깨닫게 했다”고 블리신은 회상한다.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또다른 국내 비디오 출시작은 뉴욕에서 공연된 연극 무대가 인연이 되어 캐스팅된 <흐르는 강물처럼>. 브래드 피트의 어머니

역으로 모습을 보인다.

<비밀과 거짓말>의 성공 탓에 “청승맞고 불행한 늙은 여인 역만 들어온다”던 웃음 섞인 불만을 털어놓았던 브렌다 블리신은, 이후

<겨울의 암흑 속에서> <다른 방에서 들리는 음악> <리틀 보이스> 등에서 다양한 색깔의 에너지를 발산해왔다.

그중에서도 연약한 듯 끈질긴 생의 의지와 정감가는 주책스러움, 선의와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잘 모르는 여성의 비애 등은 블리신의 장기. <오!

그레이스>에서도 블리신은 20년 전 혼수로 해왔을 법한 촌스러운 정장을 입고 마약 호객에 나서 객석의 폭소를 자아내는가 하면, 당신은

이런 일을 할 쓰레기가 아니라는 딜러의 의심에 “쓰레기라면 나도 꽤 족보가 있어요. 죽은 남편이 인간쓰레기였거든요”라고 당차게 대꾸한다. 제작

1년 전에 공동 작가인 크레이그 퍼거슨과 마크 크라우디를 만나 출연에 동의한 <오! 그레이스>에서는 “상황이 좀 비현실적인 만큼

연기가 리얼해야 슬랩스틱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기초로 영국 TV 코미디에서 상종가를 누리고 있는 매튜 역의 크레이그 퍼거슨(<빅

티즈>), 뱀포드 의사 역의 마틴 클룬스(<품행나쁜 사내들>) 등과 함께 훌륭한 화음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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