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홍반장>에서 로맨틱코미디의 힘과 가능성을 발견하다
맥가이버만큼 다재다능하고 섹시하며 순돌아빠만큼 만만하고 다정다감한 남자, 홍반장. 편의점 알바에 퀵서비스, 철가방에 부동산 중개까지 모든 것을 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 그러나 그를 진정한 ‘진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그의 만능 엔터테이너적 재능이 아니다. 그는 페인트공을 하든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든 고급 인테리어를 하든 반나절이면 2만5천원, 반의반 나절이면 1만2500원을 받는다. 홍반장은 다양한 노동분과를 ‘일당 5만원’이라는 철저한 원칙 아래 등가화한다. 노동과 노동 사이에 어떤 질적 차이나 위계도 없다. 게다가 하루도 똑같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 혁명적 노동의식으로 무장한 창조적 백수의 출현! 마을 곳곳을 유목하며 타인의 노동을 즐거이 땜빵해주는 그가 퀵서비스하는 진짜 우편물은 행복과 우정이다. 이러한 유쾌한 노동-유목민이 범람하는 잡초처럼 무섭게 번져나간다면, 청년실업이나 고용불안도 우리의 도발적 상상력으로 거뜬히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일찍 고아가 된 홍두식을 차마 고아원에 보내지 못한 마을공동체는 돌아가면서 그를 키워낸다. 홍두식은 기꺼이 홍반장을 자처하며 마을을 지키는 독수리 형제가 된다. 이 작은 파라다이스에는 기브 앤 테이크식의 ‘교환’이 아닌, 조건없는 ‘증여’의 기쁨이 넘쳐난다. 또한 홍반장이 백마 탄 왕자가 아닌 이유는 그가 극중 엄정화를 돕는 형식이 시비걸기와 딴죽걸기로 일관되기 때문이다. 부자아빠에게 양육비까지 차근차근 갚아나가는 독한 그녀가 백마 탄 왕자의 느끼한 배려를 참아낼 리 없다. 때론 목욕탕에서 등을 빡빡 밀어줄 듯한 동성 친구, 때론 동성애적 우정을 나누는 수호천사, 가끔은 누구보다 섹시한 연인의 이미지를 뿜는 남자. 엄정화는 우정과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세 가지 코드를 홍반장을 통해 한꺼번에 향유한다. 노동해방과 성적 차이화로부터의 해방을 한방에 쟁취하는 캐릭터를, 그것도 로맨틱코미디에서 발견하다니.
홍반장이 바닷바람을 마시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엄정화에게 시시콜콜 눈감아라, 바람의 냄새를 느껴보라 주문할 때, 난 얌전히 따라했다. 눈도 질끈 감고 극장에서 불어나오는 히터바람에 몸도 맡겼다. 로맨틱코미디에 저항해온 인간까지도 이토록 고분고분하게 만들다니.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에 실망한 ‘솔로레타리아’ 남자친구들은 말한다. 자기가 바로 홍반장인데, 세상은 홍반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여자들은 아직도 전구 잘 갈아끼우고 자동차 수리 잘하는 홍반장보다는 의사나 변호사를 좋아한다고. 그러나 ‘소셜 포지션’이 달라도 한참 다른 엄정화가 홍반장에게 뿅 가는 건 홍반장의 번쩍번쩍함이 아니라 “그녀가 절대로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로맨틱코미디는 문화적 호기심을 채워주지만 지적 허기는 채워주지 못한다는 선입견.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세련된 진화과정이 곧 로맨틱코미디의 역사라는 편견. 물론 로맨틱코미디에는 ‘깨갱’, ‘얼차려’ 해야 하는 스케일 큰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누구나 로맨틱코미디를 보고 나오면 한마디라도 거들고 싶어한다. 부담없이 떠들 수 있고, 나의 이야기를 슬쩍 대입할 수도 있다. 그건 전쟁영화나 SF영화가 넘볼 수 없는 로맨틱코미디만의 미덕이다. 하여 로맨틱코미디에는 어떤 ‘퀴어’ 코드도 원활하게 탑승할 수 있다. 아무리 과격한 혁명적 구호들도 로맨틱코미디에 녹아들어가면 뽀사시하고 달콤쌉싸름해지니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웨딩싱어> <미술관 옆 동물원> <사랑의 블랙홀> 등은 수많은 퀴어 코드와 탈주의 철학으로 꿈틀대지 않는가. 혁명을 꿈꾸는 감독들이여, 로맨틱코미디 속에 ‘향기나는 폭탄’과 ‘리본을 단 슬로건’을 장전할 의향은 없으신지.
정여울/ 미디어 헌터 subur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