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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피쉬>의 팀 버튼, 스필버그식 거짓말에 손을 대다

미국식 신화 만들기에 대한 존 포드의 영화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문사의 편집장은 현명하게도 “진실과 전설 중 결국 기록되는 것은 전설이게 마련이지”라고 충고한다. 영화의 배경이 된 전시(戰時) 상황에서 신화가 사실을 압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특수성마저도 팀 버튼의 (거의 주기적으로 시도되는) ‘감상적 신화쓰기’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는 <빅 피쉬>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팀 버튼의 전체 경력 속에서 살펴보자면 대니얼 월러스의 동명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그의 최신작 <빅 피쉬>는 거의 성숙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작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 <빅 피쉬>는 브래드버리(역주: 미국의 소설가, 환상문학 계열의 작품들을 썼다)에 의해 시도된 마술적 리얼리즘의 향취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동화적 판타지를 보여주지만, 또한 강력한 가족주의적 드라마에 정서적 기반을 두고 있다. 사실 <빅 피쉬>의 주요 내용은 얀 카달 감독의 유서 깊은 가족드라마 <아버지의 거짓말들>(Lies My Father Told Me)을 거의 차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아버지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뭐가 진실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마을 호수의 심연에서 동아시아의 공산국가에 이르기까지 영화 <빅 피쉬>는 풍부한 상징들로 넘쳐난다. (빌리 크루덥이 절제된 모습으로 연기한) 윌 블룸은 임신한 프랑스인 부인과 함께 임종을 암두고 있는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앨버트 피니)을 만나기 위해 파리에서 돌아온다. 그는 아버지와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내 온 터인데 기자인 윌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버지 애드는 구제불능의 허풍선이로 말도 안 되는 자기 과시와 엉뚱한 몽상으로 (영화 속에서 이 이야기들은 이완 맥그리거가 등장하는 과거의 모험담로 보여진다) 어린 시절 감수성 예민한 아들의 마음을 형편없이 뒤헝클어놓은 ‘환상적인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어린 시절 이웃의 마녀를 만나는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에드워드의 모험담은 5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시작되는데,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현수막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데 이것이 남부 지역의 낙후한 지역상을 부각하기 위해 일부러 철지난 광고물로 설정해놓은 것이 아니라면 그 배경은 50년대 초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마을에 나타난 거인과 대적하고 그 이름조차 ‘유령마을’인 숲속의 신비로운 마을을 탐험한 뒤 활달하기 짝이 없는 늑대인간(대니 드 비토)이 운영하는 서커스단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기발한 아이디어가 계속 이어지지만 영화는 변변한 극적 긴장 없이 늘어져만 가는데, 에드워드가 미래의 배우자(앨리슨 로먼)를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아무런 특색없이 흘러나오던 대니 엘프먼의 음악처럼 영화 속의 시간이 멈춰 서버린다. 공중을 가득 채운 흩날리는 팝콘 알갱이들이여!

팀 버튼은 무뚝뚝한 느낌의 슬랩스틱을 연출하고 있는데, 그의 영화가 늘 그러하듯이 프로덕션디자인만큼은 흠잡을 곳이 없다. <빅 피쉬>는 미국의 남부를 탈자연화해서 거의 강박적으로 만화스러운 화면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말하자면 좀더 관대한 버전의 <오, 브라더>라고나 할까?

한때 스필버그가 연출을 고려했던 작품답게 (그는 신화적 집착의 좀더 어른스러운 시도라고 할 수 있을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연출하기 위해서 본 작품의 연출을 고사했다) 영화 <빅 피쉬> 속에는 대칭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주택지구와 같이 <오즈의 마법사>를 참고한 몇몇 시각적 아이디어들이 발견된다. 하지만 영화 속의 드라마가 화려했던 과거와 굳어버린 현재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사이 주인공 에드워드의 연대기는 좀 이상하게 꼬여가는데, 따져보면 그는 한국전쟁에 너무 늦게 참전한 셈이고 (그는 여기서 디지털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쌍둥이 자매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아들 윌은 너무 일찍 태어난 셈이 된다. 60년대에 에드워드는 외판 영업원이 되는데 그는 여기서 우연히 과거의 동료(스티브 부세미)를 만나 영화 <보니와 클라이드>에서처럼 이미 망해버린 은행을 털게 된다. 자신의 인생을 황당한 엉터리 드라마로 꾸며내는 땅딸막한 모양새의 앨버트 피니는 가히 매력적이라 할 만한 확장력을 보여주는데, 이는 아마도 허술한 작품 속의 진공을 채우려는 자연의 섭리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빅 피쉬>는 이완 맥그리거가 히죽거리는 특유의 웃음을 보여주지 않는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일 텐데, 대신 제시카 랭이 과시하듯 그녀의 매력적인 웃음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영화 <빅 피쉬>는 윌 스스로가 아버지가 될 거라는 임박한 사실이 명확해질수록 점점 어리석어진다. 아버지의 허풍을 받아들이려는 아들의 노력을 멍청하리만큼 과도하게 드러내고 있는 영화의 후반부는 지긋지긋하게 펠리니적이라고 할 대단원과 스필버그적인 자극으로 그 절정에 도달한다. 자고로 마법은 두번 일어나지 않는 법이나니…(아니면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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