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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와 개그가 도발이라고?
2001-05-23

사나운 인물들이 주접부리는 <휴머니스트>

● 글을 쓰기 위해 두번을 다시 보았는데도 주제나 의미를 잡을 수 없었으며 뒷맛도

영 개운치 않았다. 사막에서 헤매던 끝에 구정물 한 그릇을 들이켠 기분이 이런 것일까. 감독이 겨냥한 게 관객의 짜증과 불쾌감이었다면 그런

대로 성공을 거둔 것 같다. 영화 중반쯤에 감독의 분신으로 보이는 사내가 “깔끔떠는 새끼들은 딱 질색”이라며 거품을 문다. 이 대사가 <휴머니스트>의

핵심을 찌르는 칼날이 될지도 모르겠다. 당신들은 깔끔떠는 족속이니 나는 주접을 부리겠다?

여러 편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고 팝 칼럼니스트에 TV연예프로그램 리포터로까지 활약하는 등 감독이 워낙 전방위적 재주꾼이어서 그의 데뷔작에

거는 기대감은 부풀 수밖에 없었다. 첫 메가폰을 잡는 표정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나는 세상과 대중문화판을 갈아엎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 영화로

표현하는 것이다.” 한 영화광의 순진한 분노에 갈아엎어질 만큼 세상이 허술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곡소리 그칠 줄 모르는 요즘 한국영화지만 등장하는 인물의 몰골 또한 갈수록 사납고 추레해지고 있다. <휴머니스트>도

휴머니스트는커녕 휴머니즘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배덕과 추악, 비루와 패륜의 자식만 수두룩하다. 비정한 현실주의자들의 눈길처럼 이무영도

세상이란 권력과 돈과 섹스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군장성 출신의 부동산 졸부로 자식에겐 포악하고 젊은 여자와 변태적 성행위를 즐기는 아버지(박영규)가

복마전의 중심에 놓인다.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경찰관을 실수로 죽인 마태오와 유글레나, 아메바가 마태오의 아버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은 죽은 경찰관의 동료가

사건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거액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세 녀석이 부패한 경찰관의 협박에 못 이겨 납치극을 벌이기는 하지만, 그들 사이엔 이미

어릴 적부터 권력의 역학관계가 성립되었으며 저마다 물질의 막강한 효능을 체험했다. 유글레나는 고자라고 놀린 아메바의 머리를 깨뜨려 바보로 만들었고,

마태오는 돈으로 아메바의 목숨을 구해주고 노예처럼 부려왔다. 그들 사이엔 싸움과 복수만이 진행될 뿐 사랑과 화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대로 마태오에게서 히틀러 같은 압제자를, 유글레나를 통해 그 구조를 깨는 반역자를, 아메바로부터 ‘민중의 표본’을 읽기는

어렵다. 세 친구가 소년기에 반목함으로써 세상은 권력과 물욕의 현장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지금 여기의 비극으로 연결되어

긴장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그 인식은 설익은 관념으로 떨어져버린다. 할말이 너무 많아 부담을 느낀 탓인지, 아니면 치기를 도발로 착각한 것인지

감독은 초반부터 엽기와 개그로 화면을 채워나간다.

구더기와 똥물과 정액은 기본이고 삽자루로 머리통을 짓이겨 피를 튀기기까지 온갖 수법을 동원하지만 관객이 그 비릿함과 흉포함의 실체에 정서적인

공감을 일으키긴 힘들다. 부패한 사회를 뒤엎는답시고 썩어가는 다리를 도끼로 잘라내는 장면은, 연출력이 얼마나 여리고 순진한가를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한마디로 분노는 막연하고 적개심은 도식적이고 해결책은 규격화되어 있다. 영문학도 출신 거지의 ‘때철학’에 관한 장광설은 실소를 자아낸다. 씻지

않은 죄, 50번의 몽둥이 찜질, 사살, 탈영, 25년 동안 도망 따위의 구슬픈 사연을 군사문화에 대한 지적 관찰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터이다.

트로트에서 인디밴드의 연주까지 두루두루 끼워넣은 이무영은 소문난 영화광다운 이력을 과시한다. 구로사와 아키라를 비롯하여 코언 형제와 타란티노의

화폭을 끌어들이고 <조용한 가족>을 곁눈질한다. 그런가 하면 부감과 앙각, 와이드렌즈 등으로 등장인물들의 위악성을 강조하더니 마침내

카메라에 침까지 뱉는다. 침뱉기의 원조라면 하길종 감독을 꼽아야 한다. 하길종은 두 번째 작품 <수절>(1974)에서 야만의 군사정권에

가래침을 날렸다. 그렇게 저주스럽던 시절을 기념하자고 법석을 떠는 판국이니 세상사란 분통 터지도록 야릇한 것이겠다.

호남 사투리를 사용하는 수녀의 등장은 이 작품의 자충수로 지적받아 마땅하다. 지역차별에 대한 야유로 보기엔 미련하고, 오늘 종교의 타락상으로

받아들이기엔 서투르기 짝이 없다. 특히 묶인 채로 공포에 떠는 그녀에게 마태오가 표준말 연습을 시키며 겁주는 대목은 악취미로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민중의 표본이라는 아메바가 수녀를 두번씩 강간하려 들자 그녀는 ‘찡기지 않았으니’ 무효라고 대꾸한다. 이런 게 기발한 유머라고 우긴다면

유랑극단의 만담은 에스프리일 것이다.

끝까지 위악적으로 몰아붙였다면 뱃심이라도 인정받았을 터인데, 결말부는 희대의 흉악범이 제 아비의 건강을 걱정하는 눈물겨운 멜로로 돌변한다.

무엇보다 주접 풍성하고 치기 충천한 마지막 장면을 보는 일이 괴롭다. 기자야말로 ‘죽일 놈’이라는 뜻인가. 옳게 살아야 할 시기가 아직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니면 무능한 연출력을 고백하는 것인가. <휴머니스트>는 세상살이의 지혜 하나를 남겨준다. 도토리묵이란 본디 미끄러운

음식이니 반드시 나무젓가락을 사용하라는 말씀이다.

박평식|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