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이혼 전문변호사 마일즈 매씨(조지 클루니)는 부유한 부동산업자 렉스의 이혼소송을 맡는다. 렉스의 부인 마릴린(캐서린 제타 존스)은 남편의 불륜비디오를 입수한 상태. 하지만 마일즈는 마릴린이 위자료 챙기기 바쁜 전문 꽃뱀임을 밝혀내어 승소한다. 마릴린에게 첫눈에 반했던 마일즈는 이제 솔로인 그녀와의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패배에 격분한 마릴린은 석유부호 하워드(빌리 밥 손튼)와 보란 듯이 결혼하며 마일즈의 구애를 뿌리친다. 6개월 뒤 그녀는 다시 이혼한 채 나타난다.
■ Review바야흐로 꽃뱀의 전성시대인지, <버스데이 걸>에선 외국의 홀아비들을 등쳐먹는 국제적 꽃뱀이 나타나더니, <참을 수 없는 사랑>에선 한술 더 떠 멍청한 갑부들을 거덜내는 상류층 꽃뱀이 등장했다. 후자가 한수 위인 까닭은, 남자들에게 이용당하던 순박한 러시아 처녀의 ‘삥땅’이 불법이었다면, 남자들을 구워삶는 베벌리힐스 독신녀(?)의 ‘영업’은 극히 합법적이라는 데 있다. 꽃처럼 어여쁘고 뱀처럼 교활한 이 하이클라스 팜므파탈에게, 결혼은 재테크용 투자이며 이혼은 이윤 회수일 뿐이다. “부와 독립과 자유”를 위한 “살벌한 전쟁터”에서 전리품을 챙기려면 ‘악어의 눈물’과 위장결혼, 위장결혼을 위한 위장결혼까지도 해치워야 한다. 마일즈의 두번에 걸친 청혼마다 “믿어도 돼요?”라고 묻는 마릴린은 실상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다. 세상 속이고만 살았던 그녀는 스스로를 못 믿을 만큼 프로 사기꾼이다. <위험한 관계>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능구렁이 귀부인들이 시대의 제약 속에 사랑 자체를 반문하기라도 했다면, 부티 좔좔 흐르는 눈부신 마릴린은 오직 신자유주의적으로만 사랑을 거래할 뿐이다. 그녀에게 자본주의 결혼제도는 축복 자체다.
중요한 기본적 사실은 <참을 수 없는 사랑>이 안 어울리게도 코언 형제의 로맨틱코미디라는 점이다. 장르부터 정해놓고 비틀기를 궁리하는 이들에겐 고로 두 가지 길밖에 없다. 천태만상 이혼풍속에도 불구하고 낭만적 사랑을 끌어내는 것과, 바로 그 요지경 세상을 블랙유머로 풍자하는 것. 일단 첫 번째 장르공식은 큐피드가 화살을 날리는 동화적 애니메이션의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암시된다. 한차례 우여곡절 뒤 결혼에 골인한 마일즈가 법률학회에서 행한 사랑의 연설은 손쉬운 결말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두려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닌 좋은 것”인 사랑이 순식간에 배반당함에 따라, 고전적 할리우드 스타일은 ‘그럼 그렇지’라는 조롱 속에 패러디될 뿐이다. 큐피드의 화살은 약발이 다할 무렵에야 뒷심을 발휘하고, 해피엔딩은 쉽사리 성취되지 않음을 증명한 뒤에야 가까스로 성취된다.
반면 장르 뒤틀기는 그나마의 해피엔딩에서조차 엿볼 수 있다. 빈민가 무료변론을 다짐하던 마일즈는 불륜현장 몰래카메라를 방영하는 리얼리티쇼의 바람꾼으로 전락한다. 파파라치가 캐낸 ‘부적절한 관계’는 변호사 돈벌이용에서 엔터테인먼트로 둔갑할 정도니, 사생활을 볼거리 삼던 <컨페션> 속의 쇼프로들이 일취월장한 셈이다. 결혼비디오도 아닌 ‘이혼예감비디오’가 “딱 걸렸네!”의 가학적 관음증에 기대어 상업적 스펙터클을 양산하는 세태는 아무리 웃겨도 뒤끝이 씁쓸하다. 또한, 마일즈의 악몽은 코언 형제다운 환상적 블랙유머를 잘 보여준다. 모차르트 <레퀴엠>에 휩싸인 법률회사 사장은 남들의 이혼을 먹고사는 자본주의적 법률산업의 우스꽝스럽고도 끔찍한 말로를 대변한다. 내러티브를 일탈하는 말장난과 엎치락뒤치락 반전들, 초기영화부터 자신들 영화까지 간간이 삽입된 인용 등도 코언 영화임을 알려준다.
문제는 자잘한 장난들에도 불구하고 코언식 뒤집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들은 코언의 피조물치곤 지나치게 주류적이고 부유하며 덜 독창적이다. 속물성과 낭만을 겸비한 중년 남성과 그를 사로잡는 미녀는 익숙한 고전 캐릭터의 변주인 만큼, 영화의 축은 이들 프로 사냥꾼이 유혹과 튕김의 언어로 펼치는 스크루볼코미디의 기싸움일 수밖에 없다. 그 매력은 번지르르한 조지 클루니와 화면을 주름잡는 캐서린 제타 존스의 스타성에 의존하는 바 크다. 속내 모를 욕망의 대상이던 그녀가 일순간 함락될 때는 비판적 뒤틀기의 지점들이 장르적으로 봉합돼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메이저급 로맨틱코미디로 만족하려 해도 찜찜함이 남는다. 마릴린의 위장결혼이나 마일즈에 대한 살의가 ‘재신임’으로 변하는 순간 등은 작위적인 구석이 다분하고, ‘재신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확신케 할 신뢰감은 여전히 부족하다. 한국 관객에겐 위자료에 관한 혼전서약서 해프닝이 낯설 것도 같다.
코언 형제는 결국 사랑에 대한 냉소를 균열의 씨앗처럼 품고 있는 매우 애매한 로맨틱코미디를 보여준다. 남편 성(姓)을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마릴린은 원제대로 ‘참을 수 없는 잔인함’을 밑천 삼아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결혼 놀음에 몰두한다. 거기엔 돈이 튀는 바람둥이들과 떡고물을 얻어먹는 변호사들이 어슬렁거린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은 곧 ‘참을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이며, 이때 참을 수 없는 건 사랑이 아니라 가벼움이다. 이 때문에 가볍게 봐달라는 듯한 영화를 보고나도 마음이 가볍지 않을 수도 있겠다.
오 형제여, 얼마나 웃길 건가 코언 형제의 코미디영화들진지함과 경쾌함의 스텝을 번갈아 밟는 코언 형제는 10편 중 5편을 코미디로 채웠다. 그럼에도 하위장르와 소재는 매번 달라지며, 영화는 현실에 앞서 영화에 대한 영화가 된다. <아리조나 유괴사건>은 당시 유행하던 아기 관련 코미디를 인디영화풍의 슬랩스틱액션코미디로 담아냈다. 카메라 워킹은 전례없이 독자적이며, 집 지키는 개는 <참을 수 없는 사랑>에서도 패러디된다. <허드서커 대리인>은 고전기 스크루볼코미디 색채를 가미해 5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뒤트는 코미디다. 스릴러풍의 <위대한 레보스키>는 백만장자의 계략에 말려든 백수건달의 모험담을 미스터리코미디로 풀었다. 점점 늘어나는 환상장면 중 볼링공 시점숏을 포함한 볼링장 판타지는 압권이다. 오디세이를 근대 미국으로 옮겨온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는 어드벤처로드무비이자 뮤지컬코미디다.
코언 영화들은 모두 인물들이 좇고 있는 공통의 대상 혹은 그들 사이를 떠도는 비어 있는 중심을 통해 구조화된다. <아리조나 유괴사건>의 아기, <허드서커 대리인>의 ‘블루레터’, <위대한 레보스키>의 돈가방,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의 보물과 아내, <참을 수 없는 사랑>의 결혼이나 혼전서약서 등은 끝없는 사건들의 화수분이자 그것들의 바람을 빼놓는 맥거핀이다. 이 떠도는 기표, 전달되지 않는 편지, 부재하거나 조작된 진실은, 유괴와 오인을 낳고 교체와 변질을 겪으며 코언식 내러티브의 처음과 끝을 주파한다. 그에 따라 인물들도 쉼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뒤통수치며 나타나서는 관객의 허를 찌르고 배꼽을 빼간다. 갈수록 능란해지는 코언 형제의 코미디가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