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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아카시아> 아직도 ‘행복한 가족’ 믿나요?
2003-10-17

가족의 행복이란 작은 금 하나로 깨져버리는 거울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올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아카시아>에서 박기형 감독은 그 파멸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똑똑히 지켜본다. 가족이 공포의 소재라는 점에서 <장화, 홍련>을 상기시키지만 남는 느낌은 다르다. 이 개별인간의 소통의 불가능함에 절망한다면, <아카시아>는 가족을 지키려는 현대인의 무의식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영화랄까. 한가닥 희망도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선 더 비관적이고 지독하다.

금슬좋고 풍족한 미숙(심혜진)과 도일(김진근) 부부에게 단 하나 고민은 결혼 10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다는 것이다. 미숙은 뭉크 같은 어두운 그림을 그리는 6살 진성(문우빈)에게 끌려 그를 입양한다.

티 하나 없어 보이는 하얀 목조의 미숙 부부의 집처럼, 처음엔 행복했다. 그런데 박 감독은 그 순간조차 미니멀할 정도로 단정한 화면을 통해 기이한 느낌으로 풀어낸다. ‘행복한 가족’ 국정홍보물 같이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가족과 그 곁에서 더이상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아카시아 나무의 부조화처럼.

미숙이 뜻밖에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으면서 진성에 대해서도 본의아니게 마음이 멀어진다. 비가 내리치던 밤 진성이 뛰쳐나가자 아카시아 나무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온 집을 삼켜버릴 듯 진한 향기를 풍기는 나무 밑에서 가족들은 하나씩 죽음을 맞는다. 시아버지, 친정엄마… 금슬좋던 부부는 원수처럼 변한다. 저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아이의 저주일까. 공포영화라기보다는 미스테리에 가깝다. 그리고 숨겨졌던 진실이 드러날 때 영화는 단단한 행복을 지키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어두운 초상이 된다.

짧은 꿈과 환상장면에서 충격효과가 있지만, <아카시아>가 인상적인 건 호흡이 긴 화면으로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할 때다. 무표정한 듯 맑게 어른들을 꿰뚫어보는 진성의 눈처럼 말이다. <여고괴담> 1편에 비해 박 감독은 한층 세련된 솜씨로 사회적 발언을 해냈다.

때론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기가 지루할지 모른다. ‘핏줄’에 집착하는 친정엄마처럼 어떨 땐 주제를 위해 지나치게 설명적이 되고, 미숙의 캐릭터처럼 정작 파고드는 게 필요한 부분에선 발걸음을 멈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들이대는 날카로운 거울의 파편 같은 기억은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그들이 ‘선의’를 품었고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었기에 절망감은 더 깊다. 17일 개봉.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