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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에 대한 세밀한 접근,<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한다>

한국을 껴안은 임권택에 대한 간절하고 세밀한 접근

난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 책은 무려 607장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같은 분량으로 2권이다. 1214쪽으로 이루어진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한다>는 임권택 감독과 정성일 평론가 사이의 대화다. 아니 강박이며 집념이며 집요함이다. 나는 그 대화에, 그 간절함에 귀를 기울인다. 한국 영화사와 근대사의 틈새 속에 봉인되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빨치산의 아들로 성장한 임권택이 ‘무국적’의 액션영화들과 검술, 사극, 새마을영화를 거쳐 한국의 근대사를 담아내기까지 그의 말들은 정말 가슴에 “사무친다”. 예컨대 임권택은 70년대를 이렇게 말한다. “이를테면 세상은 가고 그저 변두리에서 우물우물 따라사는 그런 인간으로 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면서”(216쪽), 연좌제에 묶여 살다가 장관의 특별한 허가를 얻어 대만영화제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아무도 한국에 관심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혼자 나무 그늘 아래서 이런 생각을 했다. “한국,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남들이 볼 때는 딱하기 그지없는 불쌍한 나라…, 싫든 좋든 그 땅에 사는 놈들이 사랑하지 않으면 어느 놈이 그 땅을 사랑하겠냐는 생각을 하는 거요. 그때 비로소 내가 사는 땅을 껴안은 거요. 처음으로.”(305쪽)

그래서 대담자 정성일의 말처럼 임권택의 영화 속으로 구체적인 한국이 걸어들어가게 된다. “조선조 유교의 그 무거운 형식,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삶, 해방 이후의 이데올로기 공간, 한국전쟁의 체험, 박정희, 그리고 80년 5월 이후”가 첫 번째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에서 <왕십리> <깃발 없는 기수> <길소뜸>을 거쳐 <취화선>에 이르는 98편의 작품을 낳았다.

이 책에서 임권택은 한국 근대사와 한국 영화사의 행간을 읽게 하는 실마리다. 그러나 정작 실타래는 엉켜 있다. 60년대 임 감독이 만든 <남자는 안 팔려>는 작가가 일본 시나리오를 그대로 베낀 영화였으며, 연좌제에 걸린 가족사가 문제가 될까봐 동시대로부터 떠난 사극이나 새마을영화 혹은 반공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엉킨 실타래를 대담자 정성일은 예의 조심스러움과 대담함 그리고 섬세함으로 풀어내고 있다. 최대한의 구원적 비평을 시도하면서 각 영화 텍스트들의 형식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찾아 말하자면 어떻게 반공영화가 사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텍스트로 슬그머니 바뀌는가를 추적한다. 이 방식은 대부분의 작품 해석의 경우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정성일씨가 재발견한 임권택의 걸작 <속눈썹이 긴 여자>(1970)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1971)를 정말 보고 싶었다- 때로 독자를 주저하게 만든다. 실제로 <아내들의 행진>에 대한 해석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즉, 임권택 자신이 분명 한국 근대사의 상처를 품고 있으며, 그 역사에 비감하게 홀려 있긴 하지만 <아내들의 행진>은 유신시대에 새마을영화를 빌려 ‘기어이’ 고향에 돌아가는 영화(243쪽)라기보다는 유신과 새마을에 더 가까운 영화라고 난 여전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의 대단한 성과는 텍스트에 대한 이데올로기 분석보다는 정말로 그 시대를 주변에서 맴돌며,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를 계속 생산해야 했던 영화감독 임권택의 삶에 대한 세밀한 접근이다. 이를 통해 한국영화의 다른 궤적이 문득 드러난다. 즉 할리우드영화를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하다가 그 불가능함을 알아채고 홍콩 무협활극이나 이탈리아 웨스턴영화와 새롭게 마주치는 순간의 임권택에 대한 주목 같은. 즉 임권택의 <뢰검>이나 <황야의 독수리>는 호금전의 <방랑의 결투>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아류가 아니라 사실은 탈할리우드의 과정 혹은 탈식민화의 과정이었고 그것이 <서편제>나 <취화선>의 임권택을 낳은 것이다.

이 책은 당대의 한국영화를 대표하게 된 임권택 감독이 어떻게 무국적 영화에서 한국영화로 환골탈태하게 되는가를 기록하는 것이지만 나는 사실 이 두껍고 굉장한 책을 거꾸로 사용하고 싶다. 즉, 임권택과 더불어 우리가 어떻게 한국영화라는 단위를 무국적 영화도 아니고 또 초국적 영화도 아니며 그렇다고 편협하게 민족적이지도 않은 트랜스한 영화로 끌고 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이드로. 결국 <취화선>은 장승업이라는 하층 화가를 통해 중국과 조선 내부의 위계 그리고 막 지평선에 얼굴을 내밀던 서구적 근대라는 거인에 대한 처연한 비판을 동시적으로 시도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다비식과도 같은 자기 소멸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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