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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거장 미조구치 겐지를 만난다 [2]
홍성남(평론가) 2003-07-18

오사카 엘레지 | 浪花悲歌, 1936년, 71분, 흑백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젊은 여성 아야코는 회사 돈을 횡령해 위험에 처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회사 사장의 정부가 된다. 이후에 그녀는 학비를 보내달라는 오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사장의 친구와도 불륜의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자신을 내버린 아야코에게 가족은 싸늘한 냉대의 시선을 보낼 뿐이다. 이 냉정한 세상에서 착취당하기만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오사카 엘레지>는 미조구치의 작가적 성숙을 알렸다는 점에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영화로 평가받는다. 미조구치 스스로도 이 영화에 와서야 일본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오사카 엘레지>

<기온의 자매>

기온의 자매 | 祇園の姉妹, 1936년, 69분, 흑백

<오사카 엘레지>와 같은 해에 만들어진 <기온의 자매>는 그것과 함께 일종의 자매 관계를 이루는 듯한 영화다. 두 영화 모두 동시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억압적인 사회를 살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으며, 게다가 두편 모두 주인공으로 야마다 이스즈라는 배우가 출연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기온의 자매>는 <오사카 엘레지>의 마지막에 집을 나왔던 아야코의 이후 모습인 듯 젊고 반항적인 게이샤 오모차와 그녀보다 나이가 많고 순응적인 게이샤 우메키치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남성 중심 사회에 대응하다가 결국에는 상처받고 마는 이야기를 그린다. 형식적인 면에서 보자면 롱테이크의 체계적 활용이 두드러지는 이 영화를 두고 노엘 버치는 미조구치적인 ‘체계’가 원숙함에 이르렀음을 보여줬다고 썼다.

잔기쿠 이야기 | 殘菊物語, 1939년, 142분, 흑백

<오사카의 여인>(1940), <배우의 일생>(1941)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예도물(藝道物) 3부작’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 가부키 배우인 남자와 그에게 헌신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가부키 명문 가족의 양자인 기쿠는 가부키 배우로서 자신의 실력이 아직 모자란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처음 해준 유모 오토쿠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둘은 서로 사랑을 키워가지만 기쿠의 가족은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미조구치의 롱테이크 구사가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며 내밀하게 봉건가족제도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는 <잔기쿠 이야기>는 미조구치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만한 작품이다.

<잔기쿠 이야기>

<우타마로를 둘러싼 다섯 여인들>

우타마로를 둘러싼 다섯 여인들 | 歌 をめぐる五人の女, 1946년, 106분, 흑백

18세기 일본의 목판화가였던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영화로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그의 주위에 있는 다섯 여인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미군정 치하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 시대극영화는 여성들을 즐겨 그렸고 또 권력층의 억압과 맞닥뜨려야 하는 예술가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미조구치 자신에 대한 비유로도 이해되곤 한다.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으로부터 “대가가 만들어낸, 그동안 무시당했으나 중요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밤의 여인들 | 夜の女たち, 1948년, 105분, 흑백

남편과 아이를 모두 잃은 후사코는 쿠리야마의 집을 나와 비서 겸 애인이 된다. 댄서가 된 여동생 나츠코와 우연히 재회한 후사코는 동생이 쿠리야마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에 휩싸인다. 후사코를 찾아나선 나츠코는 매춘부가 된 후사코와 재회한다. <오사카 엘레지>를 연상케 하기도 하는 이 영화는 오사카 매춘부들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전후 일본의 풍경과 여성들의 고통을 훌륭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들었다.

<밤의 여인들>

<내 사랑은 불탄다>

내 사랑은 불탄다 | わが戀は燃える, 1949년, 96분, 흑백

“이 영화는 여성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를 간청한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되는 <내 사랑은 불탄다>는 고난 속의 여성을 다루는 지극히 미조구치적인 이야기를 정치적 상황 속에 가져다놓은 영화다. 영화는 자유당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는 에이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남자, 즉 현실을 위해 이상을 배신한 전 애인과 여성을 바라보는 데에는 여전히 봉건적인 자유당 지도자로부터 차례차례 실망한 그녀는 여성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새 출발’할 것을 결심한다.

오유우님 | お遊さま, 1951년, 94분, 흑백

신노스케는 시즈라는 여성과 결혼하려고 하나 실제로 그의 마음을 빼앗은 상대는 남편을 잃고 혼자 살고 있는 시즈의 언니 오유우이다. 탐미적 세계를 펼쳐 보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스크린 위에 옮겨놓은 영화로 미조구치에게는 색다른 도전일 수도 있었지만 그 스스로 그다지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하루의 일생 | 西鶴一代女, 1952년, 148년, 흑백

미조구치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요다 요시카타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하루의 일생>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만든 영화다. 요다의 회고는 <오하루의 일생>은 미조구치가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 만든 영화라고 일러주는데, 미조구치의 그런 노고는 그에게 베니스영화제 국제비평가상을 쥐어주는 것으로 보답이 되었다. 영화는 늙고 추해져 남자들의 관심을 끌 수 없는 거리의 작부가 지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야기를 펼쳐낸다. 궁녀였다가 결국에는 매춘부로까지 전락하는 그녀의 지난한 삶의 과정들을, 미조구치는 그 특유의 유장한 스타일로 그려내며 거기에 불가사의한 초월의 분위기를 부여하려 한다.

<오하루의 일생>

<우게츠 이야기>

우게츠 이야기 | 雨月物語, 1953년, 97분, 흑백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우게츠 이야기>는 그 세계에다가 중요한 예술가로서 미조구치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인식케 해준 첫 번째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다. 영화는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성공에 눈먼 두 남자가 헛된 길로 빠져들었다가 결국에는 부인들의 희생을 치르고난 뒤에야 후회하며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의 고된 여정을 따라간다. 시적인 리얼리즘과 매혹적인 신비주의가 정묘하게 결합된 이 아름다운 영화에 대해 고다르는 “그리피스, 에이젠슈타인, 장 르누아르와 동일한 위치에 데려다준 작품”이라고 썼다.

게이샤 | 祇園 子, 1953년, 85분, 흑백

자매와도 같은 두 게이샤가 남자들로부터 이용당하는 이야기를 그린 현대극이란 점에서 <게이샤>는 미조구치의 1936년작인 <기온의 자매>의 자매편 혹은 리메이크에 해당하는 영화다. 비록 보는 이에게 씁쓸함을 안겨주는 이야기를 다루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두 여성과 그들 사이에 깊어지는 자매애에 대한 좀더 동정적인 시선이 감지되기에 <기온의 자매>보다는 덜 어둡게 느껴질 수도 있다.

<게이샤>

<치카마츠 이야기>

치카마츠 이야기 | 近松物語, 1954년, 102분, 흑백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지카마쓰 몬자에몬의 인형극을 각색해 만든 작품. 부유한 표구상과 사랑없는 결혼을 했던 오상과 그 표구상 아래에서 일하는 달력 제조인인 모헤가 주위의 오해를 받고 함께 도주를 하게 된다. 알고 보니 그것은 정말이지 ‘사랑의 도주’였다. 영화는 이들의 진실한 사랑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억압적인 분위기를 정신적으로 이겨낼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주제는 공간의 표상이라든가 프레이밍 등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적절히 표현이 된다. 30년대의 미조구치를 높이 평가했던 데 반해 전후의 미조구치는 폄하했던 노엘 버치조차도 이 영화만은 미조구치의 후기작들 가운데 돋보인다고 평한 바 있다.

산쇼다유 | 山椒大夫, 1954년, 120분, 흑백

<오하루의 일생> <우게츠 이야기>에 이어 3연속 베니스영화제 수상의 영광을 미조구치에게 안겨준 <산쇼다유>는 일본의 가장 유명한 전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주시오와 안주 남매는 어머니와 함께 유배된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그만 인신매매단에 속아 어머니와 떨어져 산쇼다유에게 노예로 팔려간다. 오랜 고통의 시간을 보낸 뒤에야 주시오는 탈출에 성공한다. 인간 영혼의 고결함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영화이면서 미조구치의 유려한 형식미가 특히 돋보이는 미적인 영화인 <산쇼다유>는 <카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양귀비 | 楊貴妃, 1955년, 98분, 컬러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인 가운데 하나인 양귀비와 당 현종의 유명한 이야기를 영화화한 <양귀비>에서 미조구치는 양귀비를 마치 그의 다른 여주인공처럼 주위의 사악한 힘에 압도당하는 인물, 그러면서 희생을 통해 고결함을 살려내는 여성으로 그려낸다. 미조구치가 만든 최초의 컬러영화로 큰 예산이 든 영화인 만큼 호화로운 비주얼은 볼 만하지만 미조구치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범작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수치의 거리 | 赤線地帶, 1956년, 87분, 흑백

<수치의 거리>는 국회에 매춘방지법이 상정되어 있을 동시대를 배경으로 ‘꿈의 고향’이라는 유곽에서 일하는 다섯 여성들의 굴곡진 사연들을 교직해 보여주는 영화다. 자신의 마지막이 될 이 영화에서 미조구치는 후기영화들에서 특히 집착했던 미학주의(이를테면 유장한 롱테이크)를 굳이 고수하려 하지 않으며 흥미로운 현대 여성 보고서를 작성해냈다. 그런 점에서 <수치의 거리>는 만약에 미조구치가 더 살아서 영화를 만들었다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공상도 하게 만드는 영화다.

미지의 거장 미조구치 겐지를 만난다 [1]

미지의 거장 미조구치 겐지를 만난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