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신문 제15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39 ~ 1940
저주받은 영화 <게임의 규칙>
관객·비평가 모두 혹평, 프랑스 정부 상영금지 처분까지
무려 250만 프랑의 제작비를 들인 <게임의 규칙>은 장 르누아르 감독의 야심과는 달리 관객과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들어왔다.
1939년 말,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의 상영이 중단됐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한 뒤, 프랑스 정부는 이 영화가 “국민의 사기 저하를 초래한다”며 상영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정부의 처분은 그렇지 않아도 <게임의 규칙>으로 모진 고초를 겪을 대로 겪은 장 르누아르에게 가해진 최후의 일격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게임의 규칙>의 수난은 1939년 6월22일 파리에서 가진 첫 시사회에서 시작됐다. 관객은, 그들을 흥분시켰던 영화 <거대한 환상>의 감독이 만든 신작에 대해 ‘거대한 환상’을 품고 시사회장에 왔다. 하지만 공개된 영화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만족은커녕 관객은 이 어둡고,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에 대한 분노 때문에 야유와 조롱을 쏟아냈다. 극장을 태워버리겠다고 신문지에 불을 붙인 관객도 있었다. 비난일색이긴 비평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장 르누아르는 이러한 관객의 반응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르누아르는 <거대한 환상>의 성공에 힘입어 독립제작사를 차린 뒤 무려 250만프랑의 제작비를 들여 <게임의 규칙>을 완성했다. 그런 야심작이 이처럼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자 르누아르는 어떻게든 영화를 ‘건져볼’ 심산으로 필름의 상당 부분을 들어내 상영시간을 23분이나 줄였다. 또한 영화의 첫 도입부에 ‘이 영화는 사회비판이 아니라 단순한 오락물로 제작된 것입니다’라는 자막을 삽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만들어져 극장에 개봉된 80분짜리 최종본은 관객의 불만을 가중시켰을 뿐이다. 필름이 너무 많이 잘려나가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편, <게임의 규칙>이 가져다준 좌절로 영화계 은퇴까지 고민했던 르누아르는 1939년 8월, 정부의 명령으로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거대한 환상>에 감동했던 무솔리니가 프랑스 정부를 통해 르누아르를 이탈리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르누아르는 루키노 비스콘티와 함께 <라 토스카> 제작에 착수할 예정이다.
팥밥 아닌 식은밥이 문제?
오즈, 나루세의 신작, 어처구니 없는 검열에 걸려
일본 정부의 영화검열이 가혹해지고 있다. 1939년 10월1일 영화제작 전 과정을 정부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마련된 새 영화법이 시행되면서 창작의 자유가 극히 좁아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의 신작에 가해진 처벌이다.
하사관으로 중국 전선에서 싸우고 돌아온 오즈의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찻물에 만 식은 밥맛>은 시나리오 사전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소집영장을 받은 주인공 부부가 이를 의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시나리오의 내용으로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부부가 출정전야에 식은 밥을 찻물에 말아먹는다는 설정을 크게 문제삼았다. “전쟁터로 남편을 떠나보낼 때 아내가 팥밥을 지어먹이는 것이 일본의 전통인데, 찬밥을 먹어서야 되겠냐”는 것이었다.
한편 나루세 미키오는 가난한 인쇄공 일가를 그린 리얼리즘영화 <일하는 일가>의 호평에 힘입어 다시 가난한 최하위층 노동자들을 취재해 영화를 만들려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 소재 자체를 기각했다. 국민이 총력을 모아 전쟁에 노력을 집중해야 할 시기에 전쟁수행에 방해가 되는 ‘빈곤’이라는 주제는 허가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나치의 영화법을 참고해 만든 새 영화법은 시나리오 사전검열은 물론, 정부 허가 없이 영화를 제작·배급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고 했다. 또한 공익에 저해된다고 판단할 경우 언제든지 허가를 취소할 수 있고, 감독이든 스탭이든 배우든 시험을 통과해 정부에 등록된 영화인에 한해서만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감독·배우·작가 달달 볶아야 좋은 작품 나오죠”
주목! 이 사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
‘셀즈닉의 할리우드.’ 요즈음의 할리우드는 정말 이렇다. 데이비드 셀즈닉(David O. Selznik)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할리우드의 정상에 우뚝 섰다. 대릴 자눅, 새뮤얼 골드윈 등 쟁쟁한 제작자들이 있긴 하지만 어느 누구도 셀즈닉처럼 단 한편의 영화로 미국, 나아가 전세계 극장가를 평정하지는 못했다.
데이비드 셀즈닉은 할리우드 밑바닥에서 시작해 32살에 제작사 대표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02년 영화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DLJ MGM에서 주급 100달러의 스크립터 리더로 할리우드에 발을 들인 뒤 파라마운트, RKO, 장인의 회사인 MGM을 거치며 승승장구했고 1935년에는 소원대로 독립제작사 ‘셀즈닉 인터내셔널’을 차렸다. 셀즈닉은 지독한 완벽주의자, 불같은 고집쟁이, 일벌레로 정평이 나 있으며 어떤 영화든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지 않으면 못 참는 인물이다. 배우고 감독이고 가차없다. 오죽하면 “감독, 배우, 작가를 잡아먹는 제작자”라는 수군거림이 있을까.
제작 중에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 영화가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는 조지 쿠커, 빅터 플레밍, 샘 우드로 세번이나 감독을 갈아치웠다(영화 완성 뒤 셀즈닉은 감독의 지분을 분배했는데, 빅터 플레밍이 가장 많은 45%를 받았다. 그 덕에 플레밍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속기사에게 받아적게 한 메모 단어가 150만개에 이를 만큼 영화제작에 깊이 관여했던 그는 심지어 새벽 3시에 클라크 게이블을 깨워 연기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차기작인 <레베카>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성공이 그에게 더 큰 자기확신을 불어넣은 탓인지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사사건건 따졌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경험을 밑천삼아 히치콕에게 ‘소설을 영화화하는 방법’을 가르치려들었다. 히치콕은 이 영화를 유머가 삽입된 심리스릴러로 만들길 원했지만, 셀즈닉이 원작이 지닌 감상적인 로맨스가 그대로 살아나도록 요구했다. 영국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영화를 찍었던 히치콕은 ‘셀즈닉식’ 제작환경에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두 사람의 갈등은 편집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이렇듯 제작진을 ‘달달 볶아가며’ 영화를 만드는 탓에 누구도 그와의 작업을 편치 않게 여긴다. 셀즈닉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셀즈닉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일할 때 최고의 결과를 얻으며, 나는 그들을 괴롭히며 많은 걸 가르친다”라고 확신하고 있다.
좋은 영화 놓치기 아까워서…
<분노의 포도> 호화 파티 시사회 눈길, 사회비판성 감출 연막작전
영화는 포장해서 팔기 나름. 이십세기 폭스 사장 대릴 자눅은 그렇다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다. 그가 주최한 <분노의 포도> 월드 프리미어 행사를 보면 그런 심증이 간다. 그는 최하층 노동계급의 암울하고 고통스런 삶을 그린 이 영화의 시사회를, 뉴욕 상류층의 파티처럼 치렀다.
1939년 뉴욕 코르넷 시어터. 밤 9시30분에 시작될 <분노의 포도> 상영을 앞두고 극장에는 뉴욕 사교계, 패션계, 예술계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들에겐 아직도 샴페인 냄새가 났다. 감독인 존 포드는 대경실색했다. 누구보다 분노한 것은 시나리오 작가인 누날리 존슨이었다. 술기운 때문에 영화가 끝날 때쯤 아예 잠들어버린 관객이 적잖았고, 이에 존슨은 “절망에 빠졌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많은 관객이 종영 뒤 박수를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자눅의 기대대로 다음날 일간지들은 <분노의 포도> 시사회를 지면에 올렸다. 비록 대부분의 기사가 영화내용이 아니라 파티 같았던 시사회 풍경을 다뤘긴 하지만.
사실 자눅이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시사회를 연 데에는 다른 속내가 있었다. 영화에 내장된 사회비판성을 숨기기 위해서다. 공개 전부터 할리우드에는 <분노의 포도>가 정치적인 영화가 될 거라는 소문이 분분했다. 제작자들은 존 스타인벡의 원작을 영화화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잭 워너는 이 소설을 “순수한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영화화를 검토했던 제작사들도 두손을 들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영화를 만들기엔 시대 분위기가 험악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MPPDA의 검열이 심했고, 무엇보다 세계대전 발발 뒤 미국사회가 급격하게 보수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원작이 마음에 들었던 자눅은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분노의 포도> 제작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영화의 쓴맛을 감출 ‘당의정’으로 이색 시사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서부영화에도 이런 스펙터클이”
1939년 모뉴먼트 밸리가 영화의 풍경 안으로 들어왔다. 존 포드는 13년 만에 서부영화로 귀환하면서 미국의 신화가 깃든 듯한 이 광활하고 신비한 유타의 사막을 배경으로 끌어왔다. 그동안 싸구려영화로 인기는 있었으나 대접은 받지 못했던 서부영화는 드디어 존 포드의 <역마차>를 타고 ‘고귀한’ 땅에 도착했다.
단 신 들
캐서린 헵번 <필라델피아…>로 부활
1940년 12월 <필라델피아 스토리>의 대성공으로 캐서린 헵번이 “박스오피스의 독”이라는 오명을 벗었다. 일례로 이 영화는 뉴욕의 대극장 ‘라디오 시티 뮤직홀’의 역대 개봉작 중 최고의 흥행수익을 올리고 있다. <필라델피아 스토리>는 성공한 브로드웨이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 연극에 출연했던 헵번은 직접 이 연극의 판권을 사서는 MGM을 설득해 영화화하도록 했다. 헵번으로서는 그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최근 몇년간 헵번의 출연작이 번번이 흥행에 실패하자 1938년 잡지 <포토플레이>는 그를 두고 “박스오피스의 독”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이 대목은 그뒤 별명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조지 쿠커가 감독하고 헵번과 함께 캐리 그랜트, 제임스 스튜어트가 주연한 이 코미디는 <레베카> <해외공작원> <위대한 독재자> <분노의 포도> 등과 함께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장 가뱅, 프랑스 최고의 흥행배우
1939년 3월. 장 가뱅이 프랑스에서 최고의 흥행배우로 선정됐다. 가뱅은 최근 극장주들이 투표로 뽑은 ‘상업적 가치가 가장 큰 배우’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새벽> <안개 낀 부두> <인간야수> 등에 출연한 가뱅은 주로 운명의 덫에 걸린 하층계급 노동자의 비극을 그려왔다. 한편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과 그레타 가르보가 외국배우로는 유일하게 10위권에 들었다.
맥다니엘, 아카데미 첫 흑인 수상자 영예
1940년 2월29일 해티 맥다니엘이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유모로 출연했던 맥다니엘은 제1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또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그 밖에도 작품상, 여우주연상(비비안 리) 등 8개 부문을 석권했다.
반나치 <어느 나치 스파이의 고백> 공개
1939년 5월6일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 반나치영화 <어느 나치 스파이의 고백>이 공개됐다. 에드워드 로빈슨이 주연한 이 영화는 실존인물인 전 FBI 첩보원 레온 G. 투로의 이야기를 옮긴 것. 그는 미국에서 극비리에 독일 스파이의 조직망을 침투시켰다. 제작진은 영화 촬영 도중 익명의 협박편지에 시달렸다. 워너브러더스는 베를린 사무소 대표가 파시스트 자객에게 암살당한 뒤 이 영화기획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