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외딴집. 수미(임수정)와 수연(문근영) 자매가 이곳에 도착한다. 그들은 서울에서 장기간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아버지 무현(김갑수)과 함께 막 돌아왔다. 오랜만에 집에 온 그들은 집 근처의 저수지로 달려나가 물에 발을 적시며 즐거워한다. 집에 들어가자 계모인 은주(염정아)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지만, 자매는 그녀에게 강한 적대감을 표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가족의 집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수연은 누군가가 자신의 방에 몰래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느끼고 불안해하며 수미는 끔찍한 모습의 귀신이 눈앞에 나타나는 꿈을 꾼다. 은주 또한 예외없이 불안에 시달리지만 오직 가장인 무현만이 냉정을 유지할 뿐이다. 그 가운데 두 자매와 은주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해져간다.
■ Review감독의 의도대로라면 <장화, 홍련>은 분명 ‘죄의식에 관한 탐구’가 되어야 했을 영화다. 작자미상의 소설 <장화홍련전>을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사악한 계모를 향한 원귀의 복수극을 가지고 죄의식에 관해 탐구해보겠다고? 하지만 원귀라는 (비)존재가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은 미처 풀리지 않은 원한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추어두고는 도저히 배기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들끓는 (원귀를 만들어낸) 가해자의 죄의식 때문이라면? 즉 죄의식은 본디 피학적인 주체의 상상이며 원귀는 그 상상이 만들어내는 판타지에 다름 아니다. 달리 말하면 원귀가 복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이 원귀를 ‘아주 간절하게’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원작 <장화홍련전>에 나타난 계모가 결코 피학적인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결국 김지운의 세 번째 장편영화 <장화, 홍련>은, ‘아주 간절하게’ 원귀를 불러들이는 죄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간단히, 원작을 포기한다. 단적으로 말해, 김지운의 <장화, 홍련>은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로’ 원작소설 <장화홍련전>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장화와 홍련의 이야기가 되었다(또한 ‘최초로’ 필름이 보존되는 장화와 홍련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대신 김지운의 <장화, 홍련>은 원작소설에 직접 대면하기보다는(원작소설 또한 거기 속해 있는) 좀더 보편적이고 고전적인 원귀 서사의 내부에서 죄의식을 부각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더불어 감독의 장르적 상상력의 공간을 구성하는 몇몇 공포영화들을 마치 원귀처럼 불러들인다. 예컨대 영화의 시작은(그 공간과 미장센, 그리고 숏의 사이즈에서) 흡사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1997) 도입부를 연상시킨다. 한 정신병동, 의사와 여환자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다. 의사는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말해보라고 한다. 장면이 바뀌면 우리는 이제 장화와 홍련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감독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장화홍련전>과 맺고 있는 관계는, 영화 <큐어>가 <푸른 수염>과 맺고 있는 관계만큼이나 느슨한 것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인 수미와 수연 자매가 요양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외딴 곳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일본식 가옥을 본뜬 그 외양 덕택에 일견 <조용한 가족>(1998)의 산장을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김지운은 여기서 모든 유머를 걷어버리고 서서히 진짜 ‘유령들린 집’ 이야기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다소 종잡을 수 없지만, 분명 영화를 보다보면 슬그머니 의혹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여기 모인 가족들- 수미와 수연, 계모인 은주, 그리고 아버지 무현- 가운데 누군가는 ‘이미’ 죽은 상태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누구란 말인가?
누군가는 ‘이미’ 죽은 상태임을 밝혔다고 해서 이걸 스포일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식스 센스>(1999), 그리고 <디 아더스>(2001)를 이미 본 이들에게 이제 이런 추측은 너무 쉬운 것이며 게다가 감독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장화, 홍련>에는 또 하나의 트릭 혹은 반전이 덧씌워진다. 이때 수미와 수연 자매, 그리고 계모 은주 사이에서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아버지 무현의 그 냉담한 위치가 점점 중요한 것으로 자리매김된다. 아내와 딸들이 신경전을 벌일 때, 손님을 초대한 자리에서 아내가 기이한 태도를 보일 때,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고 동생을 학대하는 계모에 대한 원한이 수미에 의해 폭발할 때, 그는 시종 냉담함을 견지함으로써 영화의 핵심에 놓인 ‘왜, 이 가족은 이렇게 기묘한 행동을 보이는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자꾸 유예시킨다. 또한 <장화, 홍련>은 미이케 다카시의 <오디션>(1999)과 나카다 히데오의 <링>(1998)으로부터 차용한 것이 분명한 장면을 후반부에 무리하게 배치하면서까지, 우리가 그 ‘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저지하려든다. 여기서 힌트, 그 ‘왜?’에 대한 답변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가운데 한편 속에 있다.
그런데 <장화, 홍련>은 <장화홍련전>과 기이하게 다시 만난다. 감독은 원작을 마음껏 ‘훼손’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지만, 실제로 그가 한 일이란 동시대 호러장르 영화의 요소들을 고전적(원형적?) 원귀서사 내부로 끌고들어가 배열시키는 것이었다. 즉 ‘훼손’된 것은 고전적 원귀서사이지 <장화홍련전>이 아니다. 그리고 고전적 원귀서사의 한 특수한 사례라 할 <장화홍련전>은 본래의 고전적 서사와의 관계 이외에 ‘훼손’된 서사인 <장화, 홍련>과 특수한 관계를 지니게 된다(이것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가령 원작에서 장화를 모함하기 위해 그녀의 이불 속에 몰래 가죽 벗긴 쥐의 시체를 넣어두는 계모의 행위는 왜 <장화, 홍련>에서 수연(홍련)의 생리장면 및 잉꼬 살해라는 이중의 사건으로 분리, 변형되었는가 따위).
<장화, 홍련>은 <조용한 가족> 이후 단편 <메모리즈>(2002)를 거쳐 김지운이 다다른 공간에 관한 사유를 명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영화기도 하다. 여기서 그는 거의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공간적 특성을 지워버리고자 한다. 이국의 공간과 가구들이 빈 자리를 대신 채우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기묘한 아름다움 속에는 낯섦과 부조화가 동시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처 봉합되지 못한 빈 틈으로 유령이 출몰한다.
그런데 이 공간은 바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끌어들인 모든 요소들은 그 무엇에 대한 알레고리도 아니며, 그저 장르적 유희를 위한 게임의 규칙을 따라 기능할 뿐이다. 그리하여 <장화, 홍련>은 제법 섬뜩하게 공포감을 유발하기도 하는 앤틱 디자인의 깜짝상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공간을 사유하는 방식을 고려할 때 김지운이 사실은 전작들로부터 그리 멀리 나아가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영화 또한 되는 것이다.
:: 역대 <장화홍련전> 영화제작 기록
72년까지 5편 제작, 보존 필름은 없어
김지운의 <장화, 홍련> 이전, 우리나라에서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은 1924년에서 1972년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영화화되었다. 이들은 비교적 원전에 가깝게 영화화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나중에 제작된 것일수록 장화와 홍련의 복수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진 괴기물 내지는 공포영화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현재까지 필름이 남아 있는 작품은 한편도 없다.
최초의 작품은 김영환이 연출한 무성영화 <장화홍련전>(1924)이다. 이 영화는 제작에 참여한 전 스탭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영화였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의의와는 별도로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가죽이 벗겨진 쥐가 보여지는 장면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낸 이들도 있었다. 홍개명이 연출한 1936년 작품은 유성영화로 제작되었다. 해방 뒤 만들어진 최초의 장화, 홍련 이야기는 정창화의 <장화홍련전>(1956)이다. 이상의 영화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남아 있지 않은 것과는 달리, 정창화가 1962년에 만든 <대장화홍련전>과 이유섭 감독의 <장화홍련전>(1972)은 각각 줄거리와 시나리오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 두 영화에서는 장화와 홍련의 원귀가 벌이는 복수행위가 두드러지게 강조되었다고 한다.
소설 <장화홍련전>은 <김인향전> <숙영낭자전>과 함께 이른바 ‘아랑형’ 계열의 소설로 간주되는 고전소설이다. ‘아랑 전설’이란 남성에게 겁탈당할 위기에서 거기에 저항하다 살해당한 여성이 원귀가 되어 사또에게 나타나 하소연하자 사또가 가해자를 찾아내 징치한다는 이야기를 일컫는다. 이 이야기는 근대 작품들에서도 차용되는데, 행복하게 살던 여성이 겁탈당한 뒤 살해당하거나 자결하는 것, 혹은 간통누명을 쓰고 죽음에 이르는 것, 남성에 의해 배신당해 죽는 것 등으로 변주된다(이상의 내용은 백문임의 박사학위논문 <한국공포영화연구-여귀의 서사기반을 중심으로>(2002)를 참조, 정리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