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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칸 영화제 결산 [1]
박은영 2003-06-07

최고의 영화제 최악의 해

이해할 수 없는 <도그빌>과 <미스틱 리버> 수상 제외, 라인업도 부실

황금종려상 <엘리펀트> 구스 반 산트(미국)

심사위원 대상 <우작> 누리 빌게 세일란(터키)

감독상 구스 반 산트 <엘리펀트> (미국)

남우주연상 무자파 오즈데미르, 메메트 에민 토프락 <우작> (터키)

여우주연상 마리 조세 코르제 <야만족의 침략>(캐나다)

각본상 드니 아르캉 <야만족의 침략>(캐나다)

심사위원상 <오후 5시> 사미라 마흐말바프(이란)

황금촬영상 <리컨스트럭션> 크리스토퍼 보(덴마크)

황금종려 단편상 <크래커 백> 글렌딘 이빈(호주)

FIPRESCI상 <아버지와 아들> 알렉산더 소쿠로프(러시아)

<아메리칸 스플렌더> 셰리 스프링어 버만(미국)

<그날의 시간들> 제이미 로잘레스(스페인)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 <청춘의 베스트> 마르코 툴리오 지오다나(이탈리아)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상 <크림슨 골드> 자파르 파나히(이란)

비평가주간상 <오타르가 떠난 뒤> 줄리 베르투첼리(프랑스)

칸=글 박은영 cinepark@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취재지원 성지혜

“칸영화제에 대한 기억을 아무리 되짚어 올라가봐도, 올해가 최악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고 예외도 없이 올 칸영화제에 관한 글과 말들에선 ’최악’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았다. 폐막식 무대에 시상자로 등장한 이자벨 위페르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가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줬다”고 말했지만, 여느 때 같으면 공명할 수 있었을 이 말을 귀담아 듣는 이는 거의 없었다. 칸영화제를 찾은 기자와 평자들은 열이틀 꼬박 이런 주문을 외웠더랬다. 오늘은 어제보다 나을 거야.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야. 그러나 실망스런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기습하는 재난, 재난들.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칸영화제는 올해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을 만큼’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엘리펀트> <우작> <야만족의 침략> 세편의 영화에 두개씩 상을 몰아준 심사 결과는, 올해가 얼마나 극심한 흉작의 해였는지를 방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폐막식에서 심사위원장 파트리스 셰로는 “영화제쪽 동의를 얻어 영화제 규정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렸다”고 먼저 고백했다. 그리고 <엘리펀트>의 구스 반 산트에게 먼저 감독상을, 이어 황금종려상을 내쳐 안겼다. 그가 언급한 영화제 규정이란, 한편의 영화에 두개의 상을 안기는 것이 양해가 되는 경우는 둘 중 하나가 연기상일 때에 국한된다는 내용.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한번에 가져간 예는 코언 형제의 <바톤 핑크> 이후 무려 12년 만의 일이다. 다크호스로 꼽혔던 누리 빌게 세일란의 <우작>은 심사위원대상과 남우주연상을, 일반 관객으로부터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드니 아르캉의 <야만족의 침략>은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가져갔다. 심사위원상은 모두가 예견한 대로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오후 5시>에 돌아갔다.

<엘리펀트> <우작> <야만족의 침략>은 제각기 본상 하나씩은 가져갈 만한 수작들임에 분명하지만, 여섯개의 본상을 셋이서 나눠 가진 것에 대해서, 뒤늦게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 나온 것은, <도그마>와 <미스틱 리버> 때문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급진적인 영상 실험이 돋보인 <도그빌>은 영화제 기간에 발행되는 각종 데일리 평점에서 선두를 놓치지 않았던 작품으로, 가장 유력한 황금종려상 후보로 꼽혔었다. 또한 학대와 폭력의 내상을 세 친구의 관계 속에서 풀어간 스릴러 <미스틱 리버>도 안정적인 연출과 연기로 뭉클한 감동을 전한 수작이었고, 이제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상을 받아갈 차례라는 입소문이 퍼져나간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 두 감독은 물론, 남녀주연상 수상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던 <미스틱 리버>의 숀 펜과 <도그빌>의 니콜 키드먼조차,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됐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이들 작품이 어떤 이유에서 그토록 철저히 외면당했는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도그빌>이 탈락한 배경에는 이 노골적인 ‘안티아메리카’영화를 심사에 참가한 두 미국인(그것도 주류 영화인) 스티븐 소더버그와 멕 라이언이 극렬 반대했을 거라는 설이 유력하고, 무대예술의 대가인 파트리스 셰로의 눈에 연극과 접합한 영상 실험이 진부해 보였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미국 언론이 들끓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언론 <르몽드>도 “주제와 형식에서 야심적인 작품들과 전형적이고 관습적인 작품들, 이 두 타입의 단절을 뛰어넘는 <도그빌>과 <미스틱 리버>가 수상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라고 밝히고 있다.

<도그빌>

수상 결과에 대한 뒷말이 언제든 나오게 마련이라면, 올해 칸영화제의 좀더 근본적인 문제점은, 다시 라인업이라 할 수 있다. 잉마르 베리만, 테오 앙겔로풀로스, 에미르 쿠스투리차, 코언 형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왕가위, 제인 캠피온, 쿠엔틴 타란티노 등 기대했던 스타감독들이 제때 작품을 완성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언제나 거장과 베테랑과 신성의 작품을 골고루 소개하는 데 자부심을 보여온 칸영화제는 올해 기대했던 감독들이 채우지 못한 빈자리에 가장 안전하고 무난한 명패를 놓는 게으른 선택을 했다. 가장 큰 패착은 베르트랑 블리에의 <커틀렛>과 푸피 아바티의 <마음은 어디에나>를 불러온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의 좌충우돌 사랑 찾기를 기괴하게 그려낸 베르트랑 블리에의 신작 <커틀렛>은 기자시사장에서 격렬한 야유와 원성을 샀다. 설상가상으로 제작자인 뤽 베송이 <팡팡 라 튤립>을 개막작으로 주면서, <커틀렛>을 ‘끼워팔기’식 거래로 본선에 들이밀었다는 의혹이 일어, <커틀렛>은 이래저래 추문의 영화가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치네치타 스튜디오의 소장 푸피 아바티의 영화도 페데리코 펠리니 회고전을 계기로 구색을 맞추려 가져왔다는 소문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지난 4월 라인업 발표 당시 영화제에서 자랑스러워한 부분은 “경쟁부문에 첫 진출한 감독이 6명이나 된다”는 사실. 칸영화제가 번번이 ‘가족잔치’에 그친다는 비난을 의식한 결단이었던 듯싶다. 그러나 그들도 신참이라 부르기엔 좀 민망한, 이미 다른 경로로 자국 내외에 널리 알려진 감독들이었다(구스 반 산트와 구로사와 기요시가 여기 포함된다). 뚜껑을 열어본 결과, 그 가운데도 대단히 새로운 발견은 없었다. 이중 절반을 차지한 아시아영화의 부진이 이에 한몫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와 가와세 나오미의 <사라소주>는 각기 그들의 범작에 그쳤고, 서구 평자들의 눈에 ‘요령부득’의 관념적 영화로 비치며, 일찌감치 관심권 밖으로 멀어졌다. 로우예의 <자줏빛 나비>는 상업적이고 전형적인 영화라는 이유로, ‘영화제에 왜 왔니?’라고 외면당한 케이스. 경쟁부문 첫 진출작 중에서 “참신하다”는 평을 얻은 영화로는 베르트랑 보넬로의 <티레시아>가 유일했다.

격돌! 프랑스 vs 미국 “미국에 왜 칸영화제 같은게 없는지 자문해보라”

칸영화제의 수장 질 자콥(사진)과 프랑스 대표 언론 <르몽드> <리베라시옹>이 발끈했다. 영화제 내내 삐딱해 있던 미 영화지 <버라이어티>가 5월12일치와 25일치에 칸영화제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실은 것이 사단이었다. <버라이어티>는 “칸영화제에 초대되기 위해선 프랑스와 배급이건 합작이건 커넥션이 있어야만 한다”며 이를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칸영화제가 지나치게 작가영화들을 편애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작품 선정과 심사위원단 구성 모두 협잡의 결과라면서, <르몽드>와 <리베라시옹>이 영화선정 위원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두 언론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리베라시옹>은 해명할 가치도 없다는 듯 “우리을 그렇게 과대평가하다니 영광이다”라고 냉소했다. <르몽드>는 영화선정위원단은 영화제에서 위촉한 평론가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주지하면서, 칸영화제와 프랑스 영화산업의 밀월관계를 운운한 것을 두고, “인도, 프랑스, 한국을 제외한 전세계에서 할리우드영화가 박스오피스의 70% 이상을 싹쓸이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질 자콥은 <르몽드>와의 인터뷰를 자청해, <버라이어티>를 반격했다. 그는 영화제에 진출하려면 프랑스와의 커넥션이 있어야 하냐는 데 대해 “물론이다. 프랑스 파트너를 갖는 것이 유리하다”고 당당히 긍정했다. 프랑스가 투자한 다양한 국적의 영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 또한 작가영화 편향 지적에 대해서도 “칸은 작가에 의한, 작가를 위한, 작가감독들의 영화제로 남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는 “미국에는 왜 칸영화제 같은 영화제가 존재할 수 없는지 자문해보라”면서, “영화를 수출할 줄만 알지, 수입하는 데는 관심없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특정 감독을 편애한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펠리니는 12번이나 초대됐다면서, 그런 거장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칸의 자부심이라고 응대했다. 출품작 국적이 ‘빈익빈 부익부’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나라별로 배당된 편수만큼 맞춰 출품하는 과거의 부작용(러시아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대신 관변 영화를 출품시켰다는)을 상기시켰다. 그는 어떤 압력과 반발에도 흔들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작품을 선정하는 현 시스템을 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브라운 바니>- 칸 사상 가장 히스테리컬한 이벤트

<브라운 버니>

‘서프라이즈’가 귀했던 올 영화제에서 유일하게 돋보인 해프닝은 빈센트 갈로의 <브라운 바니>의 상영이다. 당초 후반부의 오럴섹스신 때문에 지난해 <돌이킬 수 없는>에 버금가는 스캔들이 될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브라운 바니>는 그보다는 감독의 자아도취가 도를 넘는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기자시사에서 못 말리는 자아도취적 로드무비로 판정받은 <브라운 바니>는 감독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차리기 마련인 공식시사에서도 관객 상당수가 상영 중에 자리를 뜨고, 남은 관객으로부터도 야유와 조소 등의 냉담한 반응을 얻어내, 주연배우 클로에 셰비니가 울고, 감독 빈센트 갈로가 공식사과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이쯤 되니 이 영화의 지지자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디언>은 이날 시사를 가리켜 “칸영화제 사상 가장 히스테리컬한 이벤트”라며, <브라운 바니> 살리기에 나섰다. <리컨스트럭션>으로 황금카메라상(신인상)을 수상한 덴마크의 크리스토퍼 보 감독은 수상 소감 대신 “빈센트 갈로,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는 관습적인 영화에 끝까지 저항해야 합니다”라고 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칸영화제의 예술감독인 티에리 프레모는 올 칸 진출작들은 “경향이 없는 것이 경향”이라고 했지만, 영화제 중반이 지나고부터 두드러져 보인 색깔 중 하나가 바로 ‘반미주의’였다. <도그빌>과 <야만족의 침략>은 9·11을 직간접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고, <엘리펀트>는 미국인들의 트라우마인 컬럼바인 사건을 건드린 영화. 미카엘 하네케의 <늑대의 날>처럼 설명이나 해답을 주지 않고 모호함으로 일관하며, 해석의 책임을 관객에게 돌린 영화가 유난히 많았다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형식적으로도 하나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는데,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등은 연극적 무대와 표현방식을, 피터 그리너웨이의 <툴스 루퍼 슈트 케이스>는 인터넷의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급진적인 영상실험을 감행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리베라시옹>은 올 칸영화제 결산 기사에서 재미난 정의를 하나 내렸다. “칸영화제용 영화: 명품과 같은 격조를 지니면서도, 스캔들을 불러일으킬 요소가 가미된, 순응주의적 영화(주의/ 작가영화와 칸영화제용 영화는 동의어가 아니다).” 정확한 지적으로 보인다. 칸영화제는 올해 몇 가지 골치 아픈 숙제를 떠안았다. 그간 고수해온 바로 그 ‘영화관’을 재고할 때가 왔다는 것이 그중 하나. 작품 선정에 보수적이고 안일한 태도를 보였다가는 올해처럼 낭패를 볼 것이 자명하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올해 베를린영화제, 그리고 올해 칸영화제에서 연달아 문제시된 상영작의 ‘함량문제’가 단순히 이즈음 영화계에 ‘보릿고개’가 찾아왔다는 사실만을 반영하고 있진 않은 것이다.

칸 이모저모남우주연상 수상자에게 명복을

고인이 된 수상자 - <우작>에서 일자리를 구하러온 시골 청년을 연기해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한 메메트 에민 토프락(사진)은 <우작>의 칸 진출이 결정된 직후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는 이미 이 작품으로 터키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하고, 갓 결혼해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감독 누리 빌게 세일란은 자신의 사촌인 토프락이 “영화제 초청 소식을 듣고 칸으로 신혼여행을 가겠다고 좋아했는데, 그 다음날 교통사고를 당했다”며 안타까워했다.

파티보다 니콜 - 니콜 키드먼은 올 칸영화제 기간 중 최고의 대우를 받은 VIP 게스트였다. 영화제쪽과 <도그빌>의 제작·배급사 등은 니콜 키드먼에게 전세 제트기를 제공하고 특급호텔 특급객실에 묵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니콜 키드먼 덕에 레드 카펫은 빛났지만, <도그빌> 팀은 그 흔한 파티 한번 열지 못했다. 키드먼을 모시는 데 너무 큰 출혈이 있었기 때문.

터미네이터 심사위원장 - 심사위원장 파트리스 셰로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절도 있는 행동으로 현지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렸다. 하이라이트는 폐막식날 그가 차려입은 의상. 그는 검은 턱시도와 나비넥타이를 버리고, 흡사 가죽으로도 보이는 광택 소재의 검은 슈트를 입고 나타나 객석의 탄성을 자아냈다. 단 <뉴욕타임스>는 “버전3.0의 터미네이터 같았다”고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단평을 달았다.

트로마의 광란 - 영화 귀족들이 오가는 크로와제트에서 광란에 가까운 홍보전을 펼치는 것으로 악명 높은 트로마 필름스의 활약은 올해도 대단했다. 민망한 의상, 외설스럽고 과격한 언행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트로마’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것이 그들의 전략. 가짜 피나 오물을 끼얹는 등의 행동도 불사하는 이들은 홍보전을 준비하느라 아파트를 더럽혀 퇴출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사미라의 쇼맨십 - 사미라 마흐말바프는 칸이 총애하는 감독답게 굉장한 쇼맨십을 발휘했다. 카메라 앞에선 스스로를 모델처럼 연출했고, 마이크 앞에선 정치적인 발언을 거침없이 해댔다. “내 영화의 주인공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아프칸 소녀다. 하지만 조지 부시가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대통령인 이 형국에,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다.” 수상 소감으로 이 멘트는 어울리지 않았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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