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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칸 영화제 결산 - 정성일[7]
박은영 2003-06-07

로우예는 상하이의 시간에 씨줄과 날줄을 그리는 중이다. 1928년 만주에서 연인 사이인 일본인 이타미와 중국 처녀 딩후이(장쯔이)가 헤어진다. 그리고 1930년 상하이. 이타미는 중국 독립군들을 소탕하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고, 딩후이는 독립군을 위해 일하는 중이다. 물론 로우예답게 이 영화의 제목인 ‘자줏빛 나비’는 맥거핀이다. 나비 무늬의 옷 장식은 역에서 사람을 오인하게 만들고, 이제 그들 사이에서 추적활극이 벌어진다. 매우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야기가 너무 유치하고 로우예는 이 영화가 지하전영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갑자기 이야기는 중국 독립군의 활약상을 다룬 프로파간다가 된다.

어쩌면 로우예는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정성을 들이는 것은 30년대 상하이 분위기를 재현하고, 그 안에서 30년대 상하이 통속문학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리 이 영화에 적대적인 이들조차도 탄식하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과 마주해야 한다. 이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타미는 마지막으로 딩후이와 카페에서 만난다. 호화찬란한 상하이제편창의 세트장. 30년대 상하이 가요가 애절하게 흐르고, 이타미는 딩후이와 춤을 춘다. 카메라는 크레인으로 춤을 추듯이 따라가고, 화사한 등불 아래서 두 사람은 숨막힐 듯이 바라본다. 그 침묵의 순간의 화사한 욕망의 빛, 그 안에서 넘쳐나는 요염한 정감, 말 그대로 서로 알고 있는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 로우예가 분명히 이 장면에서 왕가위의 <화영연화>를 빌려오기는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최면을 거는 듯한 로맨티시즘에도 가 닿을 만큼 에로틱한 감정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유령들의 그림자 놀이에도 비유될 것 같은 그 일렁거리는 등불 아래서 춤은 계속되고, 그들의 안타까운 춤의 제스처는 대화를 대신한 것이다. 숏들의 섹스가 일으키는 오르가슴의 순간, 그 엑스터시의 전율. 아, 하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그건 왕가위가 훨씬 잘한다.

그와 똑같은 난처함을 린천셩의 <로빈슨 표류기>에서 마주친다. 린천셩은 이제까지 허우샤오시에의 자장 아래 있었다. 그러나 린천셩이 <동년왕사>와 <비정성시>의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무는 동안 허우샤오시엔은 환골탈태를 거듭하여 <밀레니엄 맘보>에 이르렀다. 린천셩은 따돌림을 당하고 과거에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로빈슨 표류기>에서 린천셩은 놀랍게도 허우샤오시엔을 버리고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과 차이밍량(의 <거기는 지금 몇시입니까>)의 구조와 형식을 빌려온다. 또는 일정 부분 주제를 그들에게 기대고 있다. 린천셩은 대만에 대해서 사고하고 그들의 삶에 대해서 정감있게 다루지만, 종종 지나치게 감상에 빠져든다. 린천셩은 차이밍- ‘센티멘털’- 량이거나 혹은 에드워드- ‘멜랑콜리’- 양이 되려고 한다.

현대의 타이베이. 미국에 성공한 부모를 둔 로빈슨은 타이베이에 돌아와서 친구들과 부동산업을 한다. 그의 사업은 크게 성공했지만, 로빈슨은 그럴수록 공허감에 시달린다. 그는 집을 갖지 않고 호텔에서 지내는데, 그의 관심은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에 있는 크루소 섬을 사는 것이다. 어쩌면 버추얼 리얼리티일 수도 있는 그 섬은 로빈슨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는 동안 애인과는 잘되지 않으며, 친구들과는 점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결국 사업은 위기에 봉착하고, 로빈슨은 자신이 크루소 섬으로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는다.

린천셩은 여기서 타이베이를 평면적으로 다룬다. 그래서 삶의 흔적이 지워져가고, 그 안에서 가족이 거의 지워져가는 모습을 본다. 로빈슨은 현대의 타이베이에서 표류하고 있으며, 그가 사이버 공간의 크루소 섬에 가려는 것은 현실 속의 비전의 상실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린천셩은 여기서 안토니오니의 테마와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린천셩의 신들은 항상 거기서 감정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고 만다. 물론 <로빈슨 표류기>에 마음을 움직이는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로빈슨이 애인과의 데이트가 취소되고, 거리에 그저 혼자 있을 때 같은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일한 (그런데 그를 좋아하는 여자) 동료와 산책을 한다. 이 장면은 아무 사건도 없이, 그저 대화만으로, 타이베이의 야간거리를 밝히는 형광등 불빛의 가로등을 따라, 매우 완만한 감정을 좇아서 영화의 4분의 1 동안 이어진다. 아무런 강조점을 두지 않고 오직 두 사람만의 마음을 따라가는 이 장면은 모더니티의 통속성이라고 부를 만큼의 감상주의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건 린천셩의 진심의 시퀀스이다.

린천셩은 자기의 감정을 절제하지 않을 때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항상 통속적인 데 머물면서 그 대상을 숭고하게 만들지 못한다. <로빈슨 표류기>는 린천셩의 가장 좋은 영화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허우샤오시엔, 차이밍량, 에드워드 양 다음의 이름이다.

그녀가 세상을 사는 법, 사영화(私映畵)

<사라소주>(沙羅又又樹) 감독 가와세 나오미, 경쟁부문

가와세 나오미는 공주병 환자이다. 누구나 하는 말이다. 그녀는 자기가 주목받지 못하면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스캔들을 만들고, 그걸 즐긴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이다. 가와세 나오미는 카메라를 들고 일본 문학에만 있는 이상한 전통인 사소설(私小說)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세상 안에 스며들어가는 길을 생각한다. 종종 가와세의 영화는 따라가기 힘들다는 불평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공주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세상. 사영화(私映畵)라고 부를 만한 그녀의 전략은 고향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영토에서 ‘살고 있는’ 인물의 내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녀는 전통적인 방법을 기꺼이 버린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친화성은 비디오와 8mm, 그리고 DV캠을 들고 인물을 느낄 때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가와세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동시에 만들고 있는데, 종종 그녀의 영화가 인물을 찍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마음을 찍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은 그 두개의 서로 다른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때이다.

<사라소주>는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시침 뚝 떼고’ 일상생활처럼 따라가는 영화이다. 무대는 1000년이 넘은 고도(古都) 나라. 슌과 케이는 쌍둥이 형제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케이가 실종된다. 그리고 12년이 흐른다. 슌은 쌍둥이 형제를 잊지 못하고 기억에 의지해서 그의 그림을 계속 그린다. 슌은 같은 학교 여자친구 유와 사귀는데, 그 둘의 만남은 이상하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유는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 이 지방 축제가 다가오고, 유는 여기에서 전통 군무의 앞장에 선다. 격렬한 군무. 축제가 지나가고, 슌의 엄마가 아이를 낳는다. 순과 유는 자기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가와세 나오미는 여기서 이상한 방법으로 안토니오니의 <정사>의 ‘실종’의 테마를 끌어들인다. 케이는 끝내 돌아오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 안에 이상하게도 텅 빈 공간이 남아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그 진공의 상태를 메우는 것은 살아가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가와세는 이들의 일상을 DV캠으로 한없이 길게 따라가면서, 그들의 생활의 리듬을 느끼려고 한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슌과 유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장면의 침묵은 기괴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또는 바사라 축제가 벌어지는 거리에서 분장을 하고 유가 군무를 벌이는 그 맨 앞장에서 팔을 흔들며 주문 같은 소리를 외치는 기나긴 롱테이크. 그 장면이 벌어지는 동안 햇빛이 쨍쨍한데 장마처럼 쏟아지는 여우비 속에서도 소리치며 계속되는 축제의 그 빛나는 순간의 눈물날 만큼의 아름다움.

가와세는 자신의 DV캠을 들고 마치 재즈 임프로비제이션의 감흥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우연의 아름다움에 내맡긴 채 인물을 따라간다. 여기에는 (나라라는) 영토의 리듬에 대한 순응, 살아가는 공기에 대한 감흥, 혹은 세상의 기분을 이미지에 담으려는 그 무모한 기다림이 함께 어우러진다. 여기에는 마음의 아름다움이 있다. 가와세 나오미는 자기의 리듬 안으로 끌어들여서 영화의 영혼을 정화시킬 줄 안다. 그리고 <사라소주>는 그것을 ‘정말’ 사적(私的) 이미지로 보여준다. 어쩌면 세상을 자기의 왕국으로 생각하는 공주만이 그것을 할 줄 아는지도 모른다.

가라 미래로, 그 알수없는 세계로

<밝은 미래>(アカルイ ミライ, Bright Future)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경쟁부문

구로사와 기요시에게는 두가지 영화가 있다. 그 하나는 절망의 공간이다. 여기는 무시무시하고, 폐허가 되었으며, 묵시록이 예고된 장소이다. <카리스마>와 <큐어>는 기요시의 어두운 비전이다. 다른 하나는 희망의 시간이다. 여기는 이상한 낙관주의와 기대가 있으며, ‘하여튼’ 모든 일이 ‘기이한 방식으로’ 잘되어간다. <인간합격>은 기요시의 세상에 대한 신뢰이다. 그는 그 둘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고 오간다.

문제는 여기서 생겨난다. 어떻게 절망과 희망 사이를, 혹은 공간과 시간 사이를 거리낌없이 오갈 수 있는가?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영화는 그 둘 사이를 오가는 ‘트랜스포터’이다. 그래서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를 “실천적 이해도 없이, 철학적 은유도 없이, 영화로 세상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폭력적 신앙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시네아스트”라고 불렀다. 하지만 <밝은 미래>를 ‘그 제목만으로’ 희망의 시간이라고 섣불리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미래는 어쩌면 독성을 내뿜는 것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여기서 그의 절망과 희망을 반반씩 뒤섞는다. 더없이 아름다운 메타포 해파리. 그 스스로 푸른 빛으로 발광(發光)을 하면서 물결처럼, 자연 속에서, 춤을 추듯이, 수영하는 이 원시적 생물체는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인간에게 위험한 독을 내뿜는다. <밝은 미래>는 ‘어두운 메타포’이다.

마모루(아사노 타다노부)와 유지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친구이다. 마모루는 해파리를 키우고 있는데, 언젠가는 해파리들이 도쿄 거리를 헤엄쳐 다닐 것이라고 믿는다. 기요시 유토피아? 그러나 마모루는 역겨운 공장 사장을 죽이고, 감옥에서 자살한다. 이제 해파리를 키우는 것은 유지의 몫이 된다. 아들의 유해를 거두기 위하여 마모루의 아버지가 찾아오고, 유지와의 이상한 동거생활이 시작된다. 유지는 마모루를 잊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해파리에게 집착하는데, 그만 그 해파리를 하수구에 빠뜨리고 만다. 그때부터 유지는 도쿄 하수구에 해파리의 먹이를 준다. 그리고 기적의 순간. 그들은 어느 날 밤 강가를 따라 수백 마리의 해파리가 푸른 빛을 내면서 도쿄 시내를 가로지는 것을 본다. 그것은 ‘밝은’ 유토피아인가, ‘음울한’ 묵시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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