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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 50대 청춘 ` 김유진 감독 [3]
문석 200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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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들이여, 은근과 끈기를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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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 세대가 보여줄 수 있는 거라면, 굶어죽어도 엄살부리지 않고 자존심 지키는 것 아니겠냐. 유진이나 나나 노선은 이거다. 서두르지 말고 쉬지 말자는 것.” - 씨네2000 이춘연 대표

<약속>이 대성공을 거둔 뒤 흥행 비결을 묻는 한 기자에게 김유진 감독은 “버티면 다 산다”고 답했다. 숱한 흥행 실패와 온갖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김유진 감독이 현재까지도 충무로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뭐니뭐니해도 영화에 대한 열정이었다. “영화에 들어온 이후 하나 확실한 것은, 한번도 영화 이외의 것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그의 고백은 괜한 힘이 들어간 말은 아닌 듯 보인다.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에 오뚝이처럼 계속 일어나 자신의 지위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겐 비교적 탄탄한 가업(家業)이 있어 경제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린 적이 없긴 하지만, 한때는 그 역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영화 만든다고 친구들 등쳐먹은 적”도 있었다. 이춘연 대표는 김유진 감독이 그런 상황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영화에 대한 열정과 함께 정도(正道)를 걸으려는 의지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엄살부리지 않고 여유있게 기다릴 줄 안다. 한번 고민하기 시작하면 집요하게 파들어가지만 무리하게 일을 벌이지는 않는다.” 결국 장수 감독으로 가는 데는 왕도가 없는 것이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1991년 | 감독 김유진 | 제작 고규섭 | 출연 원미경, 이영하

김유진 감독의 존재는 9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영화계의 급속한 세대교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장급들이 해줄 몫이 풍부함을 보여준다. 그의 지속적인 도전은 분명 한국영화가 장르적 다양성, 미학적 다양성과 함께 패기와 관록이라는 연륜의 다양성을 갖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런 강렬한 바람을 담아 김유진 감독이 동료 감독들에게 부치는 메시지. “부디 지치지들 말고 잘 버텨달라!”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편집 권은주 kez77@hani.co.kr

Self Biography

1950년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남.“…(서울 출신이라는 데 왜 의외라는 반응일까?)”

1970년 중앙대 연극영화과 진학.

“뭐 살다보면 그냥 흘러흘러 가는 게 있는 것 아니겠어요? 어떤 사람은 공부 못해서 갔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확실한 뜻이 있어서 갔을 수도 있고. 나는… 음….”

1974년 대학 졸업. 해병대 장교로 입대.

“대학 다닐 때는 줄곧 연극 연출만 했어요. ‘극회 동인무대’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는데, 거기 나중에 유인촌씨도 들어오고 그랬어요.”

1977년 군대 제대. 오퍼상에 취직하다.

“사실, 4학년쯤 됐을 때부터 연극을 왜 했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먹고사는 것도 걱정이 되고. 그리고 내게 과연 순수한 열정이 있을까, 자신이 없더라니까.”

1985년 회사 퇴사. 이춘연과 함께 영화사 대진엔터프라이즈 설립. 데뷔작 <영웅연가> 준비.

“직장 오래 다녔죠. 나중에는 형님 회사에서 일을 도와드렸어요. 그 와중에 아마추어 극단 것 한편, 프로극단 것 한편, 이렇게 연극 연출도 했어요. 그러다가 84년 12월에 영화업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꾸는 영화법 개정이 발표됐고, 춘연이와 함께 회사를 만들기로 했죠.”

1986년 <영웅연가> 발표.

“비디오테이프도 구하기 힘들 거야. 그런 명작도 드물 텐데 말이지…. (웃음) 원래 훌륭한 영화란 게 묻히곤 하니까. 아무튼 그 영화 만든다고 검열쪽이랑 많이 싸웠어요. ‘영웅’란 것도 ‘전통’을 연상케 한다고 쓰지 말라고 난리치고, ‘재벌’이란 단어가 불순하다며 ‘그룹’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 스탭들은 준비된 빨간색 플래카드도 일부러 파란색으로 바꿨을 정도였다니까. 어떻게 연출부 경험 하나없이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냐고?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죠.”

1988년 <시로의 섬> 발표.

“이것도 훌륭한…. 우리끼리는 프랑스영화가 이것 보고 베껴야 한다고 큰소리쳤죠. (웃음) 아무튼 그렇게 두편 연달아 까먹고 나니까, 아이고, 집장사나 할걸, 카페나 할걸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1990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발표.

“이 영화를 기획한 신씨네의 신철이라는 친구는 명보극장 기획실에 있을 때 만났는데, 어느 날 그 사건의 자료를 엄청나게 주더라고. 그걸로 상도 많이 받고 했죠. 그때 서울에서 10만 들면 성공하는 거였는데, 5만6천인가 들었어. 아무래도 오락성이란 기준에서는 한계가 있더라고.”

1993년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 발표.

“<단지…> 끝난 다음에 태흥영화 이태원 사장님이 부르더라구. 언제 한번 영화 같이 하자고 하시대. 그때가 <나 홀로 집에>가 괜찮은 성적 올릴 땐데, 가족영화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초등학생 4, 5, 6학년들 만나서 너희들 왜 싸우니, 월경은 언제 하니, 시시콜콜 인터뷰하면서 기획을 했어요. 여름방학 때 개봉했는데, 가족끼리 손 붙잡고 올 줄 알았건만 썰렁하더라고. 그땐 아직 한국영화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가족끼리 삼겹살 먹기 바빴던 시대였나봐. 그래도 <서편제>로 돈 많이 벌 때여서 이태원 사장님은 아무 말도 안하대.”

1995년 <금홍아 금홍아> 발표.

“이상(李箱)과 구본웅 얘기를 금홍이 중심으로, 여성의 시각으로 엮어보려 했는데,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출발해 가장 힘들었던 작품이에요. 아, 그때 김홍준이랑 육상효가 시나리오에 참여했었죠.”

1998년 <약속> 발표.

“헤어짐이 안타까워 눈물이 나는 영화를 만들려 했는데, 누가 이만희의 <돌아서서 떠나라> 희곡을 추천하더라고요. 몇번 읽어보니까 좋더라고. 그래서 이만희에게 그랬지. 이거 영화하자, 당신이 각본 써라. 근데 정경순이 나오는 연극은 나중에야 봤는데 연극이 더 좋대. 영화는 그런 얘기예요. 깡패짓을 해도 정도를 가자, 잡놈은 되지 말아라.”

2003년 <와일드카드> 발표

“일단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선 형사들 만나서 봉급에 만족하냐, 마누라랑 뭐 하냐, 범인 잡을 땐 무섭지 않냐 등등 물어봤죠. 24시간 추적? 그런 거는 게을러서 못하고…. 이 영화 찍으면서 카메라 감독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 영화는 사람 이야기니까 괜한 욕심부리지 말자고, 나대지 말자고. 그냥 배우를 죽 따라가기로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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