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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작이 될 수도 없지만 걸작이 될 수도 없는 <살인의 추억>
심영섭(평론가) 2003-05-08

봉준호가 그려낸 80년대는 죽은 여자들의 질 속처럼 컴컴했다. 범인이 사라지고 난 자리, 텅 빈 터널의 동공의 이미지는 죽은 여자들을 가둔 농수로의 텅 빈 공허와 곧바로 연결되어진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가? 일종의 구멍으로서 현실을 제약하는 터널로서, 살인의 추억의 80년대 공기는 농수로의 질척질척하고 끈끈한 기운을 타고 죽은 여자의 질 속을 헤맨다. 강간, 연쇄살인, 메뚜기가 노니는 농촌 풍경. 여자들은 죽고 남자들은 죄의식에 빠진다. 이 이형접합의 이미지들 속에서 봉준호의 80년대는 또 다른 주석을 한국 영화사에 보탤 것이다.

그렇다면 <박하사탕>의 손, 고문을 가한 피해자의 똥을 묻히며 잔인한 웃음을 흘리던 영호의 손과 자신이 구타한 그리하여 기차에 치여 죽은 한 백치 청년의 피가 묻은 박두만의 손, <박하사탕>의 80년대와 <살인의 추억>의 80년대는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리고 유치하지만 따뜻하게 포장된 <품행제로>의 80년대와 살벌한 사회적 폭압이 두 연인의 욕망의 날개마저 갈가리 찢어놓는 삼청교육대 위에 놓인 <나비>의 80년대는 또 얼마나 다른 장소인가? 그리하여 이 글은 <살인의 추억>이 아직은 아무것도 결코 추억이 될 수 없음을 밝히려 한다. 우리가 그 캄캄한 터널 속 같은 80년대로 다시 들어가봐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려 한다. 서서히 한국영화에서 하나의 화두로 형성되어가는 80년대와 봉준호의 80년대가 같지는 않지만 결정적으로 다른지 않은 그 지점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물기어린 눈으로 카메라를 직시하는 송강호의 정면처럼, 나 역시 <살인의 추억>이란 텍스트를 직시하고 싶었다. <살인의 추억>이 걸작이 될 수도 없지만 범작이 될 수도 없는 어떤 이유에 대하여.

<살인의 추억>은 너무 매끄럽다

<살인의 추억>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서정적인 요소는 농촌이라는 이미지, 모든 전근대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박두만으로 대표되는 그곳에서 출발한다. 아이는 메뚜기를 잡고, 형사는 경운기를 타고 현장에 나간다. 하늘이 한뼘 더 넓어 보이는 화면의 가장 낮은 곳에는 죽은 여자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 그곳에서 서울 형사 서태윤이 필시 죽었으리라고 짐작한 독고현순에 대해 이야기하자, 박두만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현순이의 미모에 대해 수다를 떨며 서태윤의 가설을 뭉개려 든다. 형사가 피해자를 알고 있는 사회.

<텔미썸딩> <프롬 헬> <양들의 침묵> <헨리 연쇄살인자의 초상> <쎄븐> 등 수많은 연쇄살인범 스릴러물들이 도시 뒷골목의 살인범을 포획하려 들 때,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익명성을 당연시 여기는 스릴러의 공식을 벗어나 봉준호는 하필이면 화성이라는 특별한 지형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박두만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은 근대사회의 특징인 익명성이 부재한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고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연쇄살인의 쾌감과 호기심과 미스터리는 철저히 익명에서 시작해서 익명으로 끝나는 범죄이다. 산업화의 태동기, 런던 뒷골목의 창녀들의 내장을 빼내어 포를 떠놓았던 잭 더 리퍼처럼 복수도 돈도 미움도 아닌 오직 순간의 쾌감을 위해 모르는 사람을 살인할 수 있는 익명의 범죄가 가지고 있는 잔인함이 거기에는 있다. 이윽고 연쇄살인이 이 작은 마을을 덮쳤을 때, 바람보다 조금 앞서서 전근대적인 마을에 당도한 근대적 범죄에 대해 봉준호는 농촌스릴러라고 말하지만, 거대한 동심원처럼 확대되는 살인 속에서 박두만과 서태윤이라는 두 형사의 대결로 80년대는 양식화되어간다.

박두만은 합리성과 개인주의에 반하는 직관 혹은 주먹구구식의 전근대적 사고, 아니 중세적 사고를 지닌 형사이다. 그는 ‘범인의 얼굴을 보다보면 감이 딱 온다’며 툭하면 용의자들에게 눈을 마주칠 것을 강요하고, 심지어 거리낌없이 사건을 조작하기까지 한다. 없던 발자국도 만들어놓는 용한 형사. 형사이면서도 수사반장이라는 허구적 실체에 사족을 못 쓰는 형사. 신발을 뺏고 신발을 주는 형사. 박두만은 모든 공적인 관계를 사적화하려 들며 병 주고 약 주는 전근대적 인물을 표상화한다. 당연히 그는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합리성을 믿는, 4년제 대학을 나와 지적 자본이 존재하는 도시노동자, 이 작은 마을에 근대성의 이름으로 당도한 서태윤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술 취한 주임이 고꾸라진 사이, 이들 두 형사가 벌이는 옥신각신은 결국 80년대 한국사회에 잔존해 있는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마찰과 갈등을 그대로 드러내는 환부의 역할을 자임한다. 그런데 이들의 갈등은 단지 전근대와 근대의 혼재와 공멸을 넘어 어떻게 보면 지극히 ‘80년대적’이며 ‘한국적인’ 근대성과 전근대적인 마찰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변주되어진다. <살인의 추억>은 이제 더이상 일본의 식민지주의와 근대적 자본주의에 의한 사회적 문제 즉 고부간의 갈등, 바람난 아내, 새로운 생산양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퇴되어가는 남성 등등의 아직도 우리의 TV가 부여잡고 있는 60년대식 근대성의 문제를 다루지 아니한다.

사실 80년대에 불어닥친 국민적 성찰 중 하나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간의 냉전적 대결의 산물이며, 그것은 국민의 자유와 복리라는 적극적 이념에 기초한 국가라기보다는 적대라는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이념에 기초한 국가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깨닫게 된 시기라는 점이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은 그러한 한국적 근대성이 어떻게 80년대에 이르러 개인에게 폭압적이며 잔인한 방식으로 구현되는지 그 뿌리와 줄기, 가지와 잎새를 아우른다. 그것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며,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 양태의 문제이기도 하다. 경찰이라는 공공기구가 오히려 폭력기구로서 국가의 이름으로 다른 세력을 억압하는 한국적 근대성이 가지고 있는 모순. 동시성과 균질성이 부재한 이러한 한국적 근대성의 특징은 잡아온 용의자에게 수시로 발길질을 가하는, 그리하여 마치 신체형을 통해서 보복을 가하는 전근대의 형벌제도와 경찰의 취조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모순된 지점을 향해 영화를 밀고 나아간다. 민방위 사이렌은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의 수업을 묶어놓고, TV에서는 부천서 성고문 뉴스가 울려퍼진다.

이 가운데 <살인의 추억>은 세심한 방식으로 증언한다. 88년이 지향했던 모든 근대적 성과물들은 박두만이 백치 용의자 백광호에게 선사한 나이스 신발처럼 가짜이자 의사적 근대성이었을 뿐임을. 병 주고 약 주고였을 뿐임을. 나쁜 놈을 잡아내려던 형사는 어느 순간 <빗속의 여인>이란 노래에 맞추어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끌고 가고, 이 전도된 폭력성의 실체는 국가가 개인에게 향하는 폭력과 유령의 범인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육체적 위해의 핵심 모두에 ‘결박’이란 이미지를 중첩시켜놓는다. <살인의 추억>은 이 지점에서 80년대를 단지 배경으로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의 정치적, 역사적 층위를 새롭게 드러내면서 이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낸다.

관객을 쥐락 펴락하는 봉준호의 연출력

재미있는 것은 봉준호란 사람이 이미 데뷔작부터 <살인의 추억>처럼 무언가 연쇄실종되어가는 사건, 사고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라는 것이다. ‘연쇄살견사건’이라 불릴 만한 <플란다스의 개>는 기실 ‘애완용 개’에 부여하고 있는 근대적, 서구적 이미지- 기꺼이 개를 위해 돈을 쓰고 한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그냥 ‘개’에 부여하고 있는 전근대적 한국적 이미지- 개는 가축이자 몸보신용이며 언제 잡아먹어도 좋은 짐승의 한 부분일 뿐인 사람들이 충돌하는 과정을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잡아내었다. <살인의 추억>보다 훨씬 아기자기하고 판타지의 요소가 귀엽게 삽입된 <플란다스의 개>는 그러나 <살인의 추억>처럼 끝내 강아지 살해범은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엄한 노숙자가 범인으로 오해되어 잡혀들어간다.

그것은 거대한 무능력의 세상이다. 변변한 분석장비 하나 없어 미국에 결정적 증거를 보내야 하는 시스템의 무능력함이나 끝끝내 범행을 막지 못한 채 데모진압에나 동원되어야 하는 개인의 무능력함. 심지어 아파트에서 발생한 개 도둑 하나 잡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무능력의 축도이다. 봉준호의 영화들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패배주의, 본인이 <살인의 추억>에서 운명적 패배주의라고 이야기했던 이러한 유의 패배는 결국 <플란다스의 개>라는 동화적 우화에서조차 암암리에 봉준호가 사회적 억압과 개인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게 만든다(과연 <플란다스 개>에서 주인공이 애타게 찾아 헤매는 순자라는 개 이름이나 박두만이 퍼질러 누워 있는 책상 위에 있던 이순자의 사진은 아무런 뜻없이 삽입된 것일까? ) .

여기서 더 미세하게 감지될 수 있는 것은, 봉준호가 그려내는 근대성과 전근대성의 충돌이 지극히 미국적인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근대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평화로운 농촌을 조금씩 파먹어들어가는 위압적이고 괴물스런 공장의 이미지처럼, 극한의 물신주의와 개인주의로 요약되는 80년대 이후의 근대성은 점차 개인들의 영혼을 파먹기 시작한다. 그 뿌리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개인에 폭압적이며 잔인한 방식으로 구현되는 제도적 행패로 나타난다면, 잎사귀에 이르러서는 개인의 ‘도덕적 위기’가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이러한 도덕적 위기에 직면하여 더욱더 극적인 방식으로 두 형사의 영혼을 착종시킨다. 서류는 거짓말을 안 한다던 서태윤은 엄청난 종잇더미 위에서 망연자실해하고, 끝내 여학교 변소를 탐색하는 비합리성에서 허우적거리다 ‘목격자고 뭐고 다 필요없어. 자백만 받으면 돼’라는 광기의 진공상태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호기심보다 더 매력적인 두만과 태윤의 자리바꿈은 송강호, 김상경의 탁월한 연기로 말미암아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엄청난 심리적 긴장과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 데모를 했던 누구도, 그들을 잡으려 했던 누구도, 살아남아 국회의원이 되었고 사장이 되었다. 죽어갔던 것은 힘없는 여자들, 논둑 위를 걷던 아녀자들. 우리 모두의 손에는 그들의 피가 묻어 있다.

그러나 나의 근심은 엉뚱하게도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대체 단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 봉준호가 이렇게 세련된 상업영화를 뽑아낸다면, 다음번에는 과연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영화는 세심하게 관객의 긴장감을 배려하여 배치되어 있을 정도로 장르적 규칙 또한 튼실하다. 범인의 시점숏은 영화 중반부 이후에나 들어가고, 지글지글 익는 고기를 클로즈업하는 시선에는 범인이 피해자에게 가했을 육체적 가학에 대한 충분한 상상력의 동원을 가능하고도 남게 만든다. 특히 관객을 쥐락 펴락하는 봉준호의 연출력과 리듬감각은 엉뚱한 용의자인 조병순을 마을을 거쳐 공장으로 추적하는 씬에서 절정에 달한다. 북소리를 개시로 마스터베이션하던 조병순을 쫓는 세 형사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와 한 화면으로 합쳐진다. 달리기라는 동력 외에 별다른 탄력이나 움직임을 카메라가 받지 않는데도, 이 추격신은 격렬하게 느껴진다. 숨이 가쁘다. 편집과 속도의 변주 그리고 휴지기와 다시 추격을 반복하는 영화적 리듬감각 덕분에, 마침내 공장에 숨어 들어갔던 조병순의 바지 사이로 살짝 보이는 빨간 팬티를 찍어내는 줌인은 역동적이고 효율적인 연출의 힘이 무엇인지 증거하고야 만다. 확실히 봉준호는 노련해졌다. 등장인물의 앉고 서는 동작만으로도 한 화면 내의 삼각구도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고, 죽은 여인의 사체를 부감으로 잡아내고는 하늘을 맴도는 까마귀떼와 중첩시키는 장면에서는 연출상의 여유가 풀풀 묻어난다.

결핍이 없는 잘 만든 모범영화

그러나 왜 나는 자꾸 <플란다스 개>를 처음 보고 나서 느꼈던 생뚱맞은 혼란감이 이리도 그리운 것일까?(지난 5년간의 평론가 경험으로 통상 이 생뚱맞은 혼란감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방금 본 영화가 한국영화를 다시 쓸지도 모른다는 설레는 길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복수는 나의 것> <질투는 나의 힘>을 맨 처음 보았을 때 생뚱맞음은 처음 맞이하는 서설처럼 반가웠다.) 왠지 결핍이 없는 잘 만든 모범영화에서 머무르는 것 같은 <살인의 추억>에 비해 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거칠지만 무척이나 신선한 측면이 있었다. 이성재와 배두나, 두 남녀가 어떤 이성애적 연애담이나 성적 욕망 위에도 존재하지 않고 주인공의 연을 맺을 수 있다는 생뚱맞음. 고작해야 강아지 살해사건을 다루고도 동화의 제목을 빗댄 유머의 생뚱맞음. 현실 속에 판타지를 집어넣고 그곳에서 사회적 은유를 환기시키는 생뚱맞음. 이성재라는 남자주인공이 재현하는 신경질적이고 꾀죄죄한 지적 속물의 이미지와 배두나와 뚱녀 이 파격 커플이 행사하는 탈근대화된 이미지, 담배피우고 술 마시고 하루하루를 그냥 보내도 충분히 자유로운 그녀들과 그 가운데 성찰할 수 있는 주체의 문제. 돈으로 산 교수직에 얽매여 있는 먹물이 자신의 삶의 주인공일 수 있는가? 하는.

반면 <살인의 추억>의 어떤 것은 충분히 예측가능하고 합의가능한 것들이라 재미가 덜하다. 결박당한 여성의 육체가 증거하는 시대와 사회를 은유하는 전술과 그녀들이 근대성의 제단에 받쳐진 제물이라는 공식 말이다. 물론 문제 해결의 단서를 주는 사람이 늘 여성 경관이라는 점은 <공동경비구역 JSA> 때처럼 의도적으로 보이지만, 그녀는 영화의 전방에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살인의 추억>은 <소름>이나 <에이리언> 등 숱한 영화들이 그러하듯 무너져내리는 아파트를 학대받은 여성의 자궁으로, 타락한 우주를 오염된 자궁으로, 혹은 암흑의 시대를 농수로라는 터널과 질의 이미지로 변주하는, 즉 여성적 기관을 빗대어 사회를 은유하는 고전적인 장르의 규칙들 속에 전진없이 머무르고 만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80년대라는 시대적 공기와 근대적 지층을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추억>이라는 제목 안에 담긴 어떤 함의, 80년대란 시간이 역사를 초혼하면서 드러나는 시간적 층위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혹은 착한 제작자와 관객을 배려해 일부러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흑백의 색감은 시간과 연관을 맺기보다, 여성들의 육체에 가해진 살인의 그로테스크함과 이미지의 변조를 통해 그녀의 육체를 물신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단선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 살인이 추억이 될 수 있는 이유, 감독의 변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어쩌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도 잡아놓으면 별것도 아닌 그런 놈이었을 것 같다. 언젠가 봤던 소아강간범처럼, 집안 구석에서 그 짓만 생각하며 시간을 죽이는 남성적 정체성이 형편없는 놈. 그런데 다 큰 여자와 여자의 정상적인 그 짓은 너무 무서워하는 그런 쪼다 같은 놈이었을 것이다(소아강간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의 선생님은 환자가 누구이든간에 ‘그의 신발을 신고’ 그의 입장에서 세계를 지각하려 들라고 가르쳐주셨다. 의처증 환자나 정신분열증 환자조차 그러한 방식으로라면 이해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난 그놈, 그 소아강간범을 본 순간, 자기 여편네마저 강간하여 21살의 여자에게 아이 셋을 낳게 한 그놈을 본 순간, 신고 있는 신발을 냅다 벗어 그 인간을 실컷 두들겨패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빠졌다). 원래 대타자의 속성이 그러하듯 <살인의 추억>의 범인은 끝내 유령이고, 살인범의 이야기는 여고를 맴도는 괴담이 된다.

무엇보다도 봉준호는 자신이 그려내고자 했던 운명적 패배주의란 말 속에 숨은 장엄한 숙명의 기운을 완전히 받아내지 못한 채 성급히 2003년으로 점프컷해버린다. 봉준호가 두 작품 모두에서 천착했던 근대성의 문제는 세상을 해석하고 비판하고, 한탄하는 데 머무르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근대성과 전근대성의 충돌이란 세상을 바꿔보려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와 벌이는 한판의 대결이다. 그러기에 <살인의 추억>은 너무 매끄럽다. 그저 내부의 공동체에서 맴돈다. 가장 중요한 착각은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거대한 무능력은 운명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적어도 무엇이든 운명적인 것이 되려면 그것이 패배할 줄을 알면서도 끝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영화는 스스로 장엄한 숙명의 기운에 도취되고 싶어하면서도 숙명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것들을 누락시킨다. 이건 고의거나 아니면 비겁하거나 장르를 위한 최선의 의도일 것이다. 결국 정치적인 것들이고, 결국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것들, 욕망들, 꿈들인데 감독은 오히려 거기서 발을 빼려 든다.

그래서 <살인의 추억>은 추억보다는 내내 현재진행형의 영화였다. 영화의 마지막, 물기어린 눈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박두만의 얼굴은 오히려 화성연쇄살인이 결코 과거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웅변적으로 증거해준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현재를 점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카메라와 관객과 범인과 박두만의 시선 모두가 한 지점의 방향으로만 수렴하게 돼 있었고, 시간의 여백이 부재하고 있었다. 어쩌면 80년대는 아직은 잊혀지지 않는 그렇게 총천연색의 부정교합으로 거기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80년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누가 80년대라는 유령의 실체를 벗겨 그의 가슴에 칼을 꽂을 것인가. 농수로에 앉아 있던 박두만처럼, 나는 그곳에 앉아 다짐해본다. 그날이 올 때까지는, 그때까지는 잊지 않겠다. 잊지 않겠다. 아무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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