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막올라 35개국 170편 상영. 지명도 높은 화제작들 매진 임박
제4회 전주국제영화제( www.jiff.or.kr)가 오는 25일 개막한다. 올해 행사는 민병록 집행위원장, 김은희·정수완 프로그래머 등 집행부가 새로 들어선 탓에 성격이 바뀔지 모른다는 예측도 있었으나, 여전히 실험적이며 논쟁적인 영화들로 ‘대안영화제’라는 모토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지명도 높은 감독의 화제작도 많다. 개막작인 박광수·박진표·박찬욱·여균동·임순례·정재은 감독의 옴니버스 인권영화 <여섯 개의 시선>, 폐막작인 토드 헤인즈 감독의 <파 프롬 헤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텐>, 카를로스 사우라의 <살로메>, 아요야마 신지·바흐만 고바디·박기용의 <디지털 삼인삼색> 등은 이미 매진이 임박한 상태다. 35개국 170여 편의 상영작 가운데 부문별 특성과 감독의 지명도 등을 감안해 7편을 추렸다.
실험·논쟁적 색채짙은 '대안영화' 풍성
유년시절 충격으로 마음 닫아
◆스파이더(시네마 스케이프 부문)<크래쉬>(1996), <엑시스텐즈>(1999) 등 혐오스럽고 기괴한 영상을 즐겨온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지난해 칸에 들고 갔던 <스파이더>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사내 이야기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데니스는 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숙소에 머문다.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옛 술집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만나던 술집 여자와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린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은 소년으로 하여금 자신이 스스로 자아낸 실의 미로에 걸린 거미라고 상상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사실과 상상의 경계가 분명하지는 않다. 프로이트의 <늑대인간>이 유아기 노이로제에 대한 임상의학자의 분석 일지라면, 크로넨버그의 ‘거미인간’은 그 노이로제가 만들어낸 폐쇄적인 심리공간에 대한 음울한 영상 보고서다.
황폐한 가정의 10대 차갑게 그려
◆켄 파크=(디지털 스펙트럼 부문)미국의 래리 클라크 감독은 42살에 내놓은 데뷔작 <키즈>(95)부터 줄곧 10대의 삶을 섹스와 폭력 위주로 관찰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4번째 장편 <켄 파크>(2002)는 10대 소년 켄 파크의 자살로 시작해 그의 친구 네 명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숀은 여자친구의 어머니와 섹스를 나누고, 클라우드는 마초적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살던 와중에 아버지로부터 동성애적 성희롱을 당한다. 테이트는 할머니의 사생활 간섭과 할아버지의 지겨운 전쟁 이야기에 시달리다가 둘을 살해한다. 여자인 피치스는 의붓 아버지와 강제결혼을 당한다. 테이트는 경찰에 잡혀가고, 나머지 셋은 서로를 보듬고 한탄하며 그룹 섹스를 한다. 미국 중하층의 황폐한 가정사를 연이어 펼친 뒤 그 마을 10대들의 히피공동체 같은 광경을 들이미는 이 영화는, 클라크의 전작보다 온기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논쟁적이다.
느닷없이 당한 폭력 필연일까?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전주 불면의 밤) 최근 <피아니스트>로 급부상한 오스트리아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세 편이 26일 밤 관객과 만난다. 그중 가장 근작인 <우연…>(94)은 93년의 겨울을 배경으로, 특별한 인과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일상을 짧게 토막내 교차시키면서 이어가는 독특한 형식의 영화다. 사이사이에 사라예보, 레바논, 터키 등 전쟁과 집단학살의 현장을 중계하는 텔레비전 뉴스와, 그 텔레비전 앞에 무기력하게 노출돼 있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끼어든다. 영화는 크리스마스 전날 한 청년이 은행에 들어가 사람들을 쏘아죽이는 살인극으로 마무리된다. 하네케는 묻는 듯하다. 이 느닷없는 폭력의 인과관계를 엮어낼 수 있을까.
일본의 전설 기타노 다케시 자전
◆아사쿠사 키드=(디지털 스펙트럼) 일본의 살아있는 전설 기타노 다케시의 자전적 소설이 원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시노자키 마코토 감독의 이 영화에서 다케시역을 비롯해 주연들은 실제 다케시의 제자이고, 등장하는 극장·아파트 등도 실제 공간에서 촬영됐다. 아사쿠사의 한 스트립쇼장에 취직해, 평생의 스승 센자부로 후카미를 만나 코미디 수업을 받던 다케시의 젊은시절이 그려진다. 성공한 이의 익숙한 회고담이라기보다는 궁상맞은 일상 속에서도 꿈을 찾아 헤매던 거리의 한 젊은 초상이다.
삶보다 진실이 중요하다고?
◆보키에 관하여=(디지털 스펙트럼) 13살 흑인소년이 어느 집의 정문으로 뛰어든 뒤 울리는 총성과 카메라를 잠시 보고 달아나는 그의 얼굴로 시작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감독 랍 데 마지에르와 아담 리스트는 남아공에서 갱들에 이용되어 마약을 운반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아이들 ‘보키’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빛바랜 컬러로 보여주는 보키의 모습 사이로, 스너프 필름과 다를 게 뭐냐는 제작진의 격렬한 반발과 토론이 흑백으로 끼어든다. 다큐멘터리적이지만 현실과 픽션의 경계는 모호하다. 한 스태프가 “진실이 인간의 삶보다 중요한가”라 던진 말처럼, 긴 논쟁거리를 남긴다.
알지도 못했던 아들 나타나
◆오른쪽 어깨 위의 천사=(아시아 독립영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에서 한국의 민병훈 감독과 함께 <벌이 날다>(1998)를 만들었던 타지키스탄의 잠셋 우즈마노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어머니가 며칠 못 살 거라는 소식을 듣고 10년 만에 고향에 들어온 캄로. 빚도 탕감하고 마지막 길을 번듯하게 보내드려야 한다는 마을사람의 부추김에 대대적인 집수리를 마치고 집을 팔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어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알지도 못했던 10살짜리 아들이 캄로의 자식이라고 나타난다. 따뜻한 색감이 돋보이는 영화는 어머니와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우화 같은 이야기체로 나직히 들려준다.
파격속 진지함 스리랑카 영화
◆한쪽 날개로 날다=(시네마 스케이프) 스리랑카에도 이런 파격적인 이야기가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일 것 같다. <이것은 나의 달>로 호평받았던 아소카 한다가마 감독은 심리스릴러 분위기까지 풍기는 흥미로운 여성 동성연애자의 드라마를 들고 왔다. 남자로 위장해 다른 여인과 결혼까지 하고 사는 한 젊은 여인이 있다. 자동차 수리공장의 동료와 장난치던 중 사고로 병원에 갔던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의사는 그를 추근대고, 남자 동성연애자인 동료 또한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집요하게 그를 좇던 의사가 그의 ‘비밀’을 드러내자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재미 속에서도 여성동성연애자의 정체성 혼란이라는 진지함을 놓치지 않는다. 임범, 이상수, 김영희 기자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