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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수상식 불참,또는 수상 거부의 이유는?

나는 오스카를 거부한다

높이 약 34cm, 필름 릴에 검을 들고 서 있는 황금 트로피, 바로 그 오스카상을 타보는 것이 평생의 숙원인 사람들이 있다. 관계자의 영예를 안고 그 자리에 참석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명예를 내치는 혹은 그 영광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스카 시상식에 참석해 상타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유가 있듯이, 거부와 불참을 강행하는 사람들에게도 두 세 가지 이유는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로렌스 역을 맡아 이름을 남긴 명배우 피터 오툴은 75회 오스카 평생공로상 수여라는 영광스런 통보를 받았다. 그는 거절했다. 자신의 나이 70이고, 10년은 연기활동을 할 수 있으니 10년 뒤 80살이 되면 받겠다는 것이었다. 또 얼마가 지났다. 10년 뒤의 일은 알 수 없다고 판단했던 걸까? 오툴은 그 상을 받겠다고 번복했다. 어느 노배우의 마지막 욕망이 빚어낸 해프닝, 오스카를 거머쥐기를 죽도록 염원한 사람의 거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의미없다. 오스카에 거부와 불참을 선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거부(불참)권을 통해 도덕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무언가를 지키거나 발언하거나 표현하려 한다. 그 점이 그들이 영예를 버리고 얻어내는 가치이다. 1935년, 그러니까 오스카 시상식이 정식으로 시작된 지 7년째 되던 해에 최초의 오스카 수상 거부자가 나왔다. 존 포드의 영화 <밀고자>의 각본가 더들리 니콜스는 그해의 각본상 수상을 거부했다. “노조문제를 지배하는 몇몇 산업조합과 아카데미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며, 그것이 정치적 의사표현임을 그는 분명히 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행동은 그해 오스카 ‘파티’를 보이콧하는 수많은 목소리들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1973년. 시상식장 안에 말론 브랜도의 이름이 울려퍼졌다. 남우주연상. 그러나 단상에 올라온 사람은 사친 리틀페더라는 이름을 지닌 인디언 여성이었다. 말론 브랜도의 수상 소감은 “할리우드의 인디언 부당 대우에 항의하는 의미로 수상을 거부한다”는 그의 전언을 낭독하는 그녀의 음성으로 대신됐다. 어쨌든 말론 브랜도는 <워터 프론트>로 이미 오스카를 쥐어본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조지 C. 스콧과 우디 앨런의 행동은 더더욱 강경한 것이었다. 이 둘의 행동은 마치 “오스카상을 받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나를 더 역겹게 만드는 것은 없다”고 한 루이스 브뉘엘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는 듯하다.

<패튼 대전차 군단>의 패튼 장군 조지 C. 스콧은 상을 빌미로 경쟁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또 어느 누구도 ‘승자 또는 수상자(winner)’가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1971년의 남우주연상은 그렇게 주인을 잃었다. 조지 C. 스콧만큼이나 강경하게 영화가 경쟁의 매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온 우디 앨런, 세번의 수상에도 불구하고 일생 동안 단 한번도 오스카 시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우디 앨런이 지난해 74회 시상식장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뉴욕에 관한 영화들의 클립 상영과 관련하여 그의 뉴욕 사랑을 피력했다. 채 가시지 않은 2001년 9월11일의 슬픔, 그 애도의 태도가 그를 오스카의 무대로 불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뉴욕을 사랑하는 우디 앨런이라도 전쟁을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2003년, 제75회 오스카 시상식과 관련한 잇단 불참은 전쟁이 빚어낸 예고이다. <과거없는 남자>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와 관련, 불참을 선언했다. “파렴치한 경제적 이권추구를 위해 휴머니티에 위배되는 범죄행위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참석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또 다른 영화, <아마로 신부의 범죄>의 맥시코 배우 가엘 가르시아도 불참을 선언했다. 과연 이들 뿐일는지…. 이번 오스카는 또 다른 야사를 남길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