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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안 썸머
2001-05-02

인디안 썸머

Story

인정 많고 유능하고 다혈질인 변호사 서준하(박신양)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이신영(이미연)의 항소심을 위한 국선 변호가 할당된다. 변론이나 재판을 모두 거부하며 죽고 싶다고만 말하는 신영이 정말 남편을 살해했는지 의심스러워진 준하는 치밀한 자료검토 끝에 무죄 추정을 끌어내고 그녀를 석방시킨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 싹튼 두 사람이 짧은 여행을 떠난 동안 새로운 증거를 수집한 검사가 신영을 다시 기소한다.

Review

<인디안 썸머>는 두 가지 면에서 새롭다. 하나는 법정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디안 썸머’라는 색다른 컨셉을 사랑이야기에 연루시켰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정영화가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사법제도 자체가 도전을 허락하지 않는 신성한 영역으로 간주되는 사회 분위기에다, 재판정에서 검사와 변호사의 치열한 공방전을 유도할 수 있는 배심원 제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디안 썸머>가 주인공을 매우 인간적이고 정의감에 불타는 변호사로 그린 것은 전자의 장벽을 피해가는 데 도움이 되고, 후자의 문제는 배심원 대신 판사와 방청객을 상대로 검사와 변호사가 논전을 벌인다는 설정으로 해결을 봤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재판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덕분에 흥미롭고 긴장감 있는 공판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1심-항소심-상고심이라는 재판의 절차를 내러티브의 반전과 연결시킨 구성도 전체 드라마 안에서 잘 작동된다. “밝혀낼 수 없는 진실은 법 앞에서는 모두 변명”이라는 극중 대사나, 돈 많고 파렴치한 기업인에 대한 변론에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 해외연수로 표현되는 성공의 기회와 힘없는 죄수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등 법률이 가지는 존재의 부조리도 적절히 끌어들였다. 법적 다툼을 따라잡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 김유진)의 시나리오를 쓴 노효정 감독의 경험이 진일보한 성과로 연결된 듯하다.

‘인디안 썸머’(indian summer)란 사전적으로는 늦가을에 잠시 나타나는 화창한 날씨 혹은 평온한 만년(晩年)을 뜻하는데, 영화 <인디안 썸머>에서는 인생의 막바지에 뜨겁게 타올라 기억 속에 화인(火印)을 남기고 스러지는 짧은 사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영화의 내용 전체를 적절히 요약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젊은 남녀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영화를 시작하여 두 남녀의 결합이 마무리되는 데까지의 사사로운 감정 변화를 다루는 로맨틱 코미디와 달리 멜로드라마는 남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사회경제적 요인을 주인공의 심리와 관계로 끌어들여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인디안 썸머>에서는 개인적인 심증이나 연민과 상관없이 법리적 판단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남자주인공의 상황과 함께, 극도의 남성폭력으로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망가진 여성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살인을 실제로 했는지 여부를 떠나 법의 정의인가라는 의문, 즉 주인공의 사랑이 법률의 덫에 빠져 방해받는 상황을 핵심 플롯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법의 정의를 묻는 영화들은 과거에도 <검사와 여선생>(1948, 윤대룡),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신상옥) 등 한국 대중의 관심을 끈 경우가 없지 않다. 두 작품 모두 <인디안 썸머>와 마찬가지로 법정에서의 논고와 변론이라는 공방전을 클라이맥스로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또한 사는 동안의 모든 경험이 고통스러워서 죽기를 선택한 여성이 세상으로부터 따사로운 햇살 한 줄기를 받아들여 잠시 교도소 밖으로 나왔다가 새로운 감정을 품고 다시 예정했던 길을 간다는 설정은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라는 시구가 주는 울림을 상기시킨다.

부산시장 집무실이나 교통이 통제된 채 찍은 도로 위 추격장면 등 최근 ‘시네마 천국’으로 떠오른 부산시의 전폭적인 협조가 화면 곳곳에 배어 있다. 이미연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오병철)에서부터 시작된 깊이있는 연기의 가능성을 최근 활짝 피워올리면서 “여배우 트로이카를 바꿔 불러야 한다”는 말에 무리가 없을 만한 중량감을 보여준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걸작이 되기에는 조금 먼 당신" I 멜로드라마의 관점에서 본 <인디안 썸머>

<인디안 썸머>는 한국영화계가 다양한 멜로드라마를 만들어낼 능력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새롭고 흥미로운 성과를 많이 거두었지만, ‘걸작이 되기에는 조금 먼 당신’처럼 느껴진다.

‘인디안 썸머’라는 컨셉은 여자주인공 이신영의 상태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시선과 내러티브 면에서 남자영화로 구축되었다. 전반적으로 탄탄한 극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엉성해 보인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고, 두번에 걸친 이신영의 심리적 반전, 특히 두 번째 반전에 대해 묘사할 기회를 잃어버림으로써 결정적으로 밋밋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또한 연기력이 훌륭하다고 해서 캐릭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알게 해준다. 박신양과 이미연의 연기를 보면서 울지 않을 도리는 없지만, 단순하고 작위적인 상황들 때문에 신인감독이 경험 많은 두 배우를 적절하게 통제·활용했는가라는 의문마저 갖게 된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붙은 풍경 이미지는 늦가을에 타오른 격정이라는 컨셉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은유가 직설적이면 관광엽서의 그림을 면치 못하게 된다.

또한 이 영화가 자랑하는 현란한 대사들은 십대 소녀들을 위한 아포리즘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영화 전체를 지독한 감상주의로 끌어내리고 특히 이미연의 캐릭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다. 사무장(장용)의 캐릭터 역시 기본적으로는 잘 잡혀 있고 안정된 연기력으로 뒷받침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캐릭터와 상황에 비추어 어색해 보이는 대사가 종종 튀어나온다.

그외에도 음악을 둘러싼 익숙한 상업적 전략, 여전히 관습적인 카메라 등 영화 <인디안 썸머>에는 완전히 새로운 그 무엇이 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습관들이 들러붙어 있다. 특히 한국 멜로드라마의 신파성은 새로움으로의 완벽한 도약을 방해하는 주술적인 힘을 가진 ‘인디안 사인’(indian sign)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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