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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답을 가진 화면은 하나밖에없다”
2001-05-01

<파이란> 촬영감독 김영철

1966년생·청주대 영연과 졸업·용인대 대학원 영화학과 졸업·<강원도의 힘>(98) <정사>(98) <질주>(99) <단적비연수>(2000)

<파이란>(2001)·한서대 영상연출학과 전임강사

진짜 촬영감독을 만났다.

일군의 촬영감독을 촬영기사라 부르면 ‘실례’가 될 테지만 김영철 촬영감독을 촬영기사라고 부르면 정확하지 않은 말이 된다. 촬영감독(DOP

or DP: Director of Photography)은 ‘시각적 스타일’에 대한 총책임을 지는 것을 뜻하며, 현실적으로는 촬영과 조명을

하나로 통합하여 운용했음을 가리킨다. <파이란>에서는 한국 최초로 DP제도가 도입되었다. <모텔 선인장>에서 크리스토퍼 도일이, <세친구>에서

피터 그레이 등 외국인이 촬영감독으로 영입되었을 때 시스템도 들어와 운영된 적이 있고, 멤피스트로 호주에 다녀온 <아나키스트>의 김응택

촬영감독 역시 DP 시스템을 채용했다. 김형구 촬영감독이 DP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우연한 여행>부터 밀어붙였지만 시스템을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이강산이라는 걸출한 조명감독이 그에 합세한 이유도 크다. DP시스템에 대해서는 모두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조명감독들의

반대가 가장 큰 어려움일 것이다. 김영철 촬영감독의 시도는 100년 영화사의 전통 때문에 다른 시스템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는 DP시스템의 장점과 함께 단점도 전한다. 모두 DP로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작업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그의 지론에 따르면 DP시스템에 마음이 가지만 촬영기사와 조명기사가 함께 의논을 하므로 여러 가지 의견이 참조될 수 있는 분리시스템의

장점도 있다는 것이다.

김영철 촬영감독은

팀 내에 전문가를 길러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일본식 도제시스템을 전문직 시스템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스탭의 대우문제로

들어간다. “모두 촬영감독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외국에는 50살 먹은 포커스 풀러(포커스를 정확하게 맞추는 사람)가 있다. 전문직이

생기려면 생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2001년 4월5일 ‘개정’한 것으로 되어 있는 ‘촬영감독 김영철의 제안서’에는 “조수들은 배우는 것이므로

인건비를 줄 수 없다는 사고는 전환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도제시스템 아래에서 배우는 이들에게 주는 쥐꼬리만한 돈은 ‘용돈’이지만,

전문직을 인정하면 그건 ‘노동의 대가’다. 적절한 위치에서 적절한 능력을 키울 때 나오는 성과들, 숙련된 포커스 풀러가 NG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재촬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어떻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야 하는지는 명확해 보인다. 그는 <파이란>에서 구두계약 대신 촬영부, 조명부

스탭들이 각자 계약서를 쓰게 했고, 그대로 실행했다. 그 계약서에 표현한대로 “그 팀은 비싸서 못 쓰겠다는 입소문을 무릅쓰고서라도” 이런

요구를 한 것이다. 요구는 더 있다. 중간편집을 3번 해야 된다는 것이다. 촬영스케줄을 각각 30%, 60%, 80∼90% 넘겼을 때 OK분량을

편집해서 상영시간의 30%, 60%, 80∼90% 분량에 맞추자는 것이다. “버릴 영화에 쓸 돈을 쓸 영화에 써라. 버릴 신을 찍기 위해

써야 할 신에 집중하지 못하면 안 된다.” 찍은 장면이 나가지 못하는 것이 서운해서가 아니다. “상영시간을 넘치는 필름을 짜맞추다보면 (시간에

맞춰 잘라내느라) 내용 전달이 안 되는”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영철 촬영감독의

프로필은 지그재그다. 사실적인 화면(<강원도의 힘>)을 구사한 뒤에는 절제된 화면(<정사>)으로 넘어갔고 저예산영화(<질주>) 다음은 블록버스터(<단적비연수>)였다.

그런데 이 모든 영화에서 ‘김영철 화면’이라는 것이 보인다. 그 방식은 ‘조감한다’는 것이다. 관객을 연극무대의 한가운데로 모시고는 시네마스코프를

펼친다. 당신들 앞의 삶을 그대로 펼칠 테다, 세세히 설명하지 않을 테니 당신들이 그중 선택하라는 식이다. <강원도의 힘>처럼 고정된 카메라로

그들의 행동거지를 세심하게 보여주는 경우는 말할 나위가 없다. 80%의 핸드헬드를 사용한 <질주>에서는 한순간 밤중 불빛들로 고고한 주변

풍경이 삥 둘러쳐지고 ‘인생사 한 끗발’이 발 아래 잠기는 장면이 있다. 정확한 분할, 거리로 감정을 극도로 정제해내는 <정사>에서도 일상의

파편을 비춰보인다. 이런 화면은 감독의 의도와 달라지기도 한다. 우인(이정재)과 서현(이미숙)이 아파트를 둘러본다. 창문을 열면 아파트

특유의 소란스러움이 몰려들고 문에 붙은 그림을 떼면 움푹 꺼진 ‘하자’가 드러난다. 그들을 생활 속에 위치시키는 장면이다. 시나리오상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아까 그런 집에서 같이 살자면 살겠어요?” 우인이 서현에게 묻는다. 그런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풍경들은 영화에서와 달리 “번잡스럽고 혼란스러움”으로 비쳐야 했다는 것이다. 그의 특징을 발견하기 힘든 <단적비연수>조차도 다른 판타지

화면과 구현방식이 다르다. 카메라 워킹이 복잡하고 CG를 많이 생각하는 화면이었지만 평범하게 찍혔다. 야외장면에 라이트도 거의 쓰지 않았다.

그에겐 실험정신이 없는 건가? “나는 보수적이다. 진취적이지 않다. 필요하지도 않은 걸 쓰다보면 감정을 전달하는 데 방해만 된다.” 그는

작품 내에서 다양한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일관성에 점수를 준다. 일관된 밸런스, 일관된 톤, 그리고 수준. “실험보다는 노력을 해서 어떤

수준 이상으로 잘하려고 한다. 어떤 부분이 잘됐다, 촬영과 조명이 어땠다 하는 느낌없이 컬러나 구도가 도구로만 사용되도록 한다.” ‘돈

떨어지는’ 말은 아니냐는 질문의 대답은 “상관없다”다.

그 ‘조감도’는 <파이란>에

와서 마음껏 펼쳐진다. 강재(최민수)가 방에서 친구(공형진)와 ‘빠데루’를 하고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은 그 너절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장면은 방 전체를 조감하는 컷으로 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 ‘조감한다’ 컷은 대부분 광각을 사용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장면은 표준렌즈를

쓰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영화의 문법에 파격을 구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얽매이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정 장소의 오브제를 비추는

올바른 답을 가진 화면은 하나밖에 없다. 그곳, 그때에는 그 장면밖에 없다.” 그가 받은 <파이란> 시나리오 앞에 편지가 있었다. “원작의

제목이 ‘러브레터’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편지에서 감독은 한 사람에게 진지하게 접근하는 영화를 찍겠다고 말했다. 주인공이 건달인

건 깡패영화라서가 아니다. 보잘 것없고 초라한 상징이라서다.” 초라하고 실패한 이 사람은 영화에 아름답게 비치지 않는다. 아이 라이트로

눈에 반짝반짝 빛을 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액션 역시 피곤한 몸만큼 무겁다. 둘이 엉겨붙어서 때릴 때조차도 힘에 부치고

날렵한 훅은 없다. 조명은 사실적인 조명을 주로 썼다.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조명은 눈이 느끼는 빛에 대한 감도와 필름의 감도 차이로

더 어렵다.

“아주 다른 영화 5편을 하겠다”는 처음의 다짐이 끝나고 이제 다시 첫 번째다. 그의 프로필이 펼쳐질 길에는 적어도 한국영화계의 고질적인

관성에 가할 타격이 숨어 있다. “영화는 영화를 만든 모든 사람의 것이다”라는 믿음이 실현되길 바라는 그는 투사다.

글 구둘래/ 객원기자 사진 이혜정 기자

김영철 촬영감독이 꼽은 장면 그때,

그곳, 그 장면

1.

<강원도의 힘>. 상권과 그의 후배가 검봉산 케이블카를 타고 간 뒤 나오는 인서트. 그야말로 강원도의 힘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저 산

안에 사람들 세우면 얼마나 들어가겠냐.” “꽤 많이 들어갈걸.” “백만?” “그렇게 많이 들어가?” “사람들 촘촘히 세워가지고 빠닥빠닥

붙여놓으면… 저런 산 50개만 있으면 우리나라 인구가 다 들어가는 거네.”

2. <강원도의 힘>. 인사동 카페에서 만나는 지숙과 상권. <강원도의 힘> 중 가장 어두운 장면이다. 로 키 톤으로만 갔다. 만나자마자

느닷없이 안는 둘, 남자는 숨소리가 거칠다. 어둠 속이기 때문이다. 둘로 갈라진 앞뒤가 봉합되는 순간이다. 포스터의 컷으로 사용된 장면이다.

3.

<정사>. 호숫가의 두 사람. “<작은 신의 아이들>에서 물의 효과적인 활용을 볼 수 있다. 선생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사라는 수영장에서

그의 진실함을 안다. 그때 수영장의 물결이 천장에 무늬를 그리며 흔들린다.” 호숫가에 섰을 때 두 사람은 그들이 가졌던 공식적인 ‘관계’를

흔들기 시작한다. “노을이 지기 시작해서 완전히 어둠이 내리는 30분 정도의 시간을 매직아워라고 한다. 노을의 붉은색부터 밤의 검정색까지

색깔과 노출의 변화가 크다. 30분 정도라고 설정된 이 시간에 소화해야 하는 컷 수는 20컷이었다. 이틀에 나눠찍으면 색깔의 톤을 맞추기가

힘들다. 오후 2시부터 촬영을 시작해 그날 다 끝냈다.” 톤을 맞추기 위해 ‘언더’로 시작해서 노을과 밤이 되는 장면을 그려낼 수 있었다.

4. <정사>. 절벽에 선 두 사람. 여자는 수면제를 먹고 온종일 잠을 자고 새벽 문을 두드려 남자에게로 달려온다. 그들이

달려간 곳은 건설현장, 다 파헤쳐진 바위산, 혹은 철근으로 만든 암벽. 여자는 열이 난다. 돌산이 그들 주위를 삥 둘러 막힌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절벽 밖으로 나가서 카메라가 180도 이동한다. 그뒤 흐름은 가빠진다. 여자는 헛소리로도 남자를 부르고, 남자의 외출은 당돌한 인서트로

끼어든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는지 동그라미를 수도 없이 그린 낙서, 여자는 화가 난다.

5. <단적비연수>. 신산을 넘어가는 와중에 닥치는 식인종과의 결투신. 눈이 내리는가 했는데 갑자기 숲 속에서 발가벗은

식인종이 나타난다? 논리성이나 현실성을 액션의 정교함으로 무마시킨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카민스키 촬영감독이 원하는 간격과 강도로

진동이 발생하는 장치를 카메라에 부착해 폭파장면을 만들어냈다면, 김영철 촬영감독은 ‘인간 발진기’로 역동성을 공격했다. 이런 수동적(手動的)

발진은 지진장면에서도 이용되었다.

6. <파이란>. 부둣가에서 편지를 읽는 강재. “모든 사람이 다 친절하지만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눈물을 보이는 대목.

김영철 촬영감독 역시 이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울었다. 감정이 격하게 풀어지는 순간, 하늘은 왜 그렇게 맑은지. “감정적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이 장면은 연기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오후부터 해가 떨어져 밤이 되는 것 역시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조명도 없이 촬영했다. 연기자를

줌인해서 찍는 것이 아니라 약간 시야를 넓혀 바닷가를 잡았다. 그리고 그가 흐느낄 때 카메라는 더 넓은 화면을 잡아내는데 시간적으로 짧다.

그에게 동화돼서 흐느끼느냐 마느냐는 관객의 몫이지, 강요할 일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