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개봉일 확정 유행 갈수록 심해져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개봉박두’(Coming Soon)는 진짜 박두한 개봉을 뜻하지 않는다. 영화를 다 찍고 다듬어 필름 캔에 넣은 뒤에야 슬슬 개봉날짜를 택일하던 시대는 까마득하게 지나갔다. <버라이어티> 최근호는 이른바 배급 스케줄상 ‘기둥 영화’(tentpole)라 불리는 흥행 대작들의 개봉일 예고를 점점 앞당기고 있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신경증적 유행을 지적하고 그 원인을 분석했다.2, 3년 전만 해도 빨라야 9개월 앞서 개봉일을 결정했던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개봉 첫 주말을 비롯해 초반 10일간 박스오피스 성적이 전체 흥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 비정상적으로 치솟자 개봉날짜 택일을 앞다투기 시작했다. 먼저 개봉일을 확정 발표함으로써 다른 스튜디오가 흥행작을 같은 날 층돌시키는 사태를 피하자는 의도. 큰 영화 두편이 동시에 극장에 나설 경우 파이 전체(총관객 수)가 커지는 효과도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2배가 되진 않기 때문이다. 스튜디오들은 5월의 전몰장병기념일,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6월 셋째 주말, 독립기념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 흥행 명당 주말부터 ‘자리맡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이런 경향에 불을 붙인 건 <스파이더 맨>의 속편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의 개봉일을 2004년 5월로 예고한 소니. 이후 2004년 5월은 이미 반 다스쯤 되는 영화의 예약으로 채워졌다. 지구온난화를 그리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SF <투모로우>가 28일, 유니버설의 뱀파이어영화 <밴 헬싱>이 21일, 파라마운트의 <미션 임파서블3>가 전몰장병기념일 개봉을 발표한 것. 심지어 2005년 달력도 이미 채워졌다. 폭스가 <스타워즈 에피소드3>로 전몰장병기념일 전 주말을 예약했고 <인디아나 존스4> <스리 스투지스> <쥬라기 공원>, 디즈니와 픽사의 <자동차들> 등이 2005년 여름 시즌에 체크인했다.<버라이어티>가 꼽은 개봉일 조기 예고 붐의 첫 번째 원인은 엄청난 제작비가 주는 흥행 부담. 빌 메커닉 전 폭스 사장은 덩치 큰 제작비의 블록버스터를 안고 있는 스튜디오 간부들은 불안한 마음에, 일단 빈집에 쳐들어가 주거 권리를 주장하는 불법 점유자들처럼 좋은 터에 방석을 깔고 봐야 한다는 태도를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찌감치 개봉날짜를 확정하는 전략은 한편, 스타와 감독에게 프로젝트에 대한 스튜디오의 확신을 보여줌으로써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대내적 장점도 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한 마케팅이 가동되고 다수의 프로모션 파트너가 붙는 블록버스터의 경우 개봉일을 미리 못박음으로써 모든 관련 사업 파트너가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실용적 장점도 있다. 예컨대 <인디아나 존스4>는 극장 개봉일에 1, 2, 3편의 DVD를 출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전에는 늘 양면이 있다. 라이벌 스튜디오가 맞불 작전을 감행할 위험도 있고, 예고된 개봉날짜에 코가 꿰는 것을 두려워한 배우, 감독, 후반작업 회사들이 오히려 뒷걸음질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대상은 관객. <고질라>의 예처럼 1년 전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는 대대적 마케팅 공세가 관객을 흥분시키는커녕 진절머리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김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