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이란의 외딴 마을 시어 다레(‘검은 계곡’이라는 뜻)에 자동차를 몰고 온 일군의 촬영팀이 도착한다. 베흐자드(베흐자드 도우라니)가 이끄는 이 촬영팀의 목적은 곧 임종을 앞두고 있는 한 고령의 할머니의 장례식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 가는 것이다. 베흐자드는 자신이 마을을 방문한 목적을 감추고 할머니의 임종을 기다리면서 꼬마 파흐자드(파흐자드 소흐라비)나 몇몇 마을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이 워낙 오지인지라 베흐자드는 휴대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통화를 하기 위해 정신없이 마을 외곽의 높은 언덕 위로 향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반복해야 한다. 곧 죽을 것 같았던 할머니는 오히려 점점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고 베흐자드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 Review
순수함. 한때 키아로스타미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모두들 어김없이 입에 올리곤 하던 이 단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올리브 나무 사이로>로 이어지는 이른바 ‘지그재그 삼부작’은 키아로스타미의 이미지를 그런 식으로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마치 ‘동화작가’처럼 간주되었다. 그러나 정말 흥미로운 것은 <체리향기> 이후의 키아로스타미이다. 죽음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여정을 뒤따라가는 이 영화는 ‘순수한’ 키아로스타미가 이미지의 외설성에 대한 섬세하고 효과적인 저항으로 나아가기 위한 단서를 마련해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저항은 이미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올해 초 개봉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영화 <디 아더스>에서의 사자(死者)의 사진들을 기억하는지 그 사진들이 극명하게 보여주듯, 이미 지나간 ‘죽은’ 시간의 흔적인 사진적 이미지는 현실의 죽음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정면으로 응시할 때 끔찍하게 외설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정말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이러한 외설성에의 저항을 수행하는 동시에, <올리브 나무 사이로>보다 한층 더 부드러운 정교함으로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한다.
어쩌면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가 보여주는, 정말로 ‘숨막히게’ 아름다운 풍경들이 위와 같은 생각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그 풍경 속에 온전히 파묻혀 있음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이자 축복이기도 한) 프레임 안에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는 풍경들의 가장자리 또한 응시해야 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바람에 실려 흔들거리는 잎사귀들을, 골목 구석구석을 배회하는 동물들을, 집의 벽에 그려져 있는 자그마한 문양들을, 즉 화면 곳곳에 충만한 삶의 징후들을 감지해 보라는 것이다. 주인공 베흐자드가 지혜로운 노의사의 오토바이에 함께 올라타고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진료를 위해 마을로 향하기 전, 이미 그 오토바이가 밀밭의 황금물결 사이로 지나쳐간 적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까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에서 삶은 조용히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곁을 스쳐간다. 우리가 비록 베흐자드를 바라보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를 둘러싼 풍경들까지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부주의하게 바라보아서는 곤란하다.
♣ 베흐자드가 찾아간 시어 다레 마을은 여느 시골처럼 한적하고 주민들은 느리며 낙천적이다. 인상적인 건 사람의 삶과 죽음, 사물의 생성과 소멸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느긋한 시선이다. 그들은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시간을 다스리려 하기보다 시간의 흐름을 타면서 살아간다
도시에서 걸려온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그는 미로 같은- 하지만 이 미로는 오직 그에게만 미로이다- 마을길들을 바삐 가로지르고 마을 외곽의 길을 차를 몰고 황급히 지나쳐서는 언덕 꼭대기의 묘지에 올라 간신히 전화를 받곤 한다. 그의 반복적인 행위는 일견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등장한 소년의 그것과도 닮아 있지만 여기선 정반대의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에서 키아로스타미가 보여주는 자기반복 속에서의 차이들에 주목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기어이 죽음을, 좀더 정확하게는 죽음이 불러올 슬픔의 풍경들(장례식)을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베흐자드의 시도는 생각하기에 따라 죽음 그 자체를 포착하려는 것보다 더 외설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은 거기 휩싸여 있지 않은 타인들의 감정을 착취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베흐자드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를 위장한다. 아마 이보다 더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키아로스타미의 자의식을 잘 보여주는 설정도 달리 없을 것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후반부에 베흐자드는 우유를 얻으러 갔다가 잠시 어둠 속에 던져지는데 이는 그의 그릇된 의도에 대한 처벌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마침내 빛이 찾아온다. 흡사 <체리향기> 혹은 에서처럼, 그렇게 빛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 이후 베흐자드의 행위를 지켜보며 또 한번 키아로스타미의 ‘마술’에 감탄하는 것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 한 할머니의 장례식을 취재하러 온 베흐자드는, 조만간 죽을 줄 알았던 그 할머니가 오히려 회복될 기미를 보이자 애가 타기 시작한다. 회사의 독촉이 잦아지지만, 여전히 마을 사람들은 느긋하다. 어느새 미소 띤 표정으로, 안달하는 베흐자드를 바라보는 마을과 자연의 시선이 느껴진다.
베흐자드와 우리는 끝내 할머니의 죽음을 지켜볼 권리만은 갖지 못한다. 또한 슬픔을 탈취할 권리도 가질 수 없다. 다만 시어 다레 마을 사람들을 감싸안은 풍경을 보는 것만은 언제나 허락된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에서의 신비스러운 바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또 한번 그 황홀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여기서의 풍경은 키아로스타미의 이전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풍경들과 닮아 있는 듯하면서도 매우 낯설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꿈꿀 권리’를 거의 무한정 허락하는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키아로스타미에게 일말의 의심, 거부감을 품었던 사람들조차 끝내 굴복하게 만들 것 같은 영화다. 아마 그것은 이 영화가 단지 아름다운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 옳은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