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장에 나타난 송강호씨의 얼굴이 새까맸다. 영화 찍는 내내 그늘 한점 없는 흙바닥에서 뛰고 구르며 그을린 얼굴이, 곧바로 이어진 <살인의 추억> 촬영 때문에 더 거칠어졌다. 반면 송씨 옆에 선 김혜수씨는 하늘하늘한 실크 원피스 차림에 얼굴마저 화사했다. 훈장 아버지 밑에서 한문 공부만 하던 선비 호창과 외교관 아버지 밑에서 서구의 신문물을 익힌 신여성 정림만큼이나 두 사람은 대조를 이뤘다. 김씨의 표현대로 “한사람은 전형적인 연기자, 한사람은 전형적인 연예인 이미지”인 탓도 있을 것이다.
두사람은 이 영화에서 조선 최초 ‘베쓰볼’팀의 감독과 4번타자로 만났다. 그리고 첫인상이 주는 우려를 배신하며 멋진 팀플레이를 해냈다. 영화에서는 죽을사(死)자라 4번타자가 싫다는, 철없는 선비 호창을 정림이 다독이지만 스크린 밖에서는 “강호 오빠에게 많이 의지했다”고 김혜수씨가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정림이 밝고 씩씩한 인물이어서 망설이기도 했어요. 오랫동안 굳어진 나의 이미지와 겹치니까요.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송강호씨랑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어요. 도대체 이 대단한 배우는 현장에서 뭐가 다를까 궁금했죠.” 시나리오 초고를 보고 일찍부터 출연을 결정했던 송씨는 김씨가 정림역을 맡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단다. “시나리오만 보면 정림은 전형적인 인물에다 비중도 크지 않거든요. 신인연기자가 맡겠구나 예상했어요. 혜수씨가 한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전 그냥 기뻤죠 뭐.”
정림 뿐 아니라 호창도 관객들이 간직하고 있는 배우 송강호의 이미지를 이어간다. “상것들이나 하는” 야구를 하다가 들켜 아버지(신구)로부터 바둑알통으로 얻어터지는 장면에서는 <반칙왕>에서 아버지(당시의 아버지역도 신구였다)에게 파리채로 맞던 임대호가 떠오른다. 두 배우가 전작인 <쓰리>와 <복수는 나의 것>에서 각각 보여주었던 변신을 생각하면 친정에 돌아온 것같다는 느낌도 든다. “이전의 이미지로 되돌아간다는 부담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딱 송강호 스타일이네라고 주변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쉽지도 않았죠. 작품의 뼈와 살이 되는 연기를 해야지 악세서리가 되서는 안 되거든요. 튀지 않는 웃음을 만들어내기란 튀는 것보다 사실 훨씬 더 힘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전제하면서도 김혜수씨는 이 “연기자로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왜곡되고 상투적인 나의 이미지를 연기자 송강호의 힘으로 상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도 있었어요. 그런데 송강호씨를 가까이 지켜보면서 연기자로 내가 선 지점을 돌아보게 됐죠. 좋은 연기자가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도 많이 배웠고….”“어, 왜 이래 이거, 쑥스럽구만.” 영락없는 조필(<넘버3>)의 하이톤으로 낄낄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송씨는 ‘오빠’다운 이야기로 응수한다. “연기도 때가 있는 것같아요. 20대 때는 힘은 있지만 깊이가 부족하고 40대를 훌쩍 넘으면 연륜은 있지만 육체적 에너지가 많이 고갈되죠. 30대 중반부터 10년 정도가 다양한 진폭의 연기를 해낼 수 있는 기간이라고 봐요. 그런 면에서 혜수씨는 이번에도 훌륭했지만 앞으로의 연기가 훨씬 더 많이 기대됩니다.”
송강호씨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영화화한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에서 거칠고 투박한 토박이 형사를 맡아 요즘 한창 촬영중이다. <YMCA 야구단>을 끝내고 짧은 휴식시간을 보낸 김혜수씨는 10월 말부터 <바람난 가족>의 주인공으로 다시 바빠질 예정이다. 시아버지가 병으로 누워있는 동안 시어머니의 ‘작업’을 지원하고 남편의 바람을 슬쩍 눈감으며 자신은 고등학생과 아슬아슬한 연애를 하는 이 기묘한 여주인공은 그에게 새로운 모험이다. “나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선택한 건 아니예요. 변신을 위한 변신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비슷한 상황이나 비슷한 표정이라도 어느 구석 하나 같은 게 없는, 디테일의 변화를 줄 수 있는 연기가 더 소중하고 더 어렵다는 거 강호 오빠 보면서 많이 느꼈거든요.”
인터뷰 도중 송씨의 말이 끝날 때마다 김씨는 궁금해 못견디겠다는 듯한 눈망울로 “왜”, “정말”을 연발했다. 두달 여 촬영기간 동안 쏟아놓은 말로도 부족해 끊임없이 상대방에 접속하고자 하는 두사람이다. 김씨는 촬영 전 “비슷한 코드가 전혀 없는 커플”처럼 보일까 염려했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 반대였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