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면 이런저런 단체나 비디오 대여점에서 흔히 ‘가족과 함께 볼만한 비디오’를 추천한다. 그러나 어떤 가장이 명절날 식솔들 불러모아놓고, “이번 명절 땐 우리 가족이 모두 일렬횡대로 앉아 건전한비디오때리기국민연합이 추천한 이 비디오 한편 보자”고 하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명절 때 비디오가 절실한 사람은 추석 때 갈 곳이 아예 없거나, 잠깐 집에 들러 얼굴도장 찍고 도망나올 독신남·독신녀, 또는 많은 연유로 귀향, 성묘, 가족모임 등의 형식으로 명절을 보내지 않을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에게 <한겨레> 영화팀은 상반기 출시 비디오 가운데 화제작을 몇 편 추려 권한다.
비디오로밖에 못 본다
먼저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고 비디오 가게로 직행한 것들로는 1930년대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에서 고아들을 보살피다 이들과 독가스실까지 함께 간 의사 헨릭 골드스미트의 일대기인 안제이 바이다의 <닥터 코르작>, 억만장자의 외동딸과 결혼한 옛 애인을 못 잊어 그 억만장자에게 접근하는 여자의 불안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인 제임스 아이보리의 <러브 템테이션>, 반항기 청소년들의 방황을 다룬 카일 쿠퍼의 <뉴포트 사우스> 등이 눈에 띈다.
꿀꿀함을 달래줘!
극장 개봉작 가운데 쓸쓸한 명절을 웃음으로 달래줄 만한 영화로는 소림 무공을 축구에 접목시킨 저우싱츠(주성치)의 <소림축구>, 영화광 킬러와 탈옥수의 기묘한 인연을 재미있게 그린 크리스 베르 윌의 <다이아몬드를 쏴라>, 한국 최초의 패러디 영화인 장규성의 <재밌는 영화 > 정도를 자신있게 꼽을 수 있다. 80년대의 달동네와 똥지게에 얽힌 따뜻한 코미디인 김동원의 <해적, 디스코왕 되다>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할리우드 오락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작원 사제지간의 우정과 숨막히는 두뇌게임을 그린 토니 스코트의 <스파이 게임>, 로버트 드 니로가 전설적인 금고털이범으로 등장하는 매력적인 ‘한탕’ 영화 프랭크 오즈의 <스코어>가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잘 만들어진 드라마를 즐기는 이라면 천재 가족의 사랑과 갈등에 관한 절제된 관찰인 웨스 앤더슨 감독의 <로얄 테넌바움>이 단연 제격이다.
애들은 가라!
외로운 명절, 차라리 꿀꿀한 영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약물중독에 빠져드는 네 사람에 관한 냉철한 관찰 보고인 <레퀴엠>과 어떤 천재수학자의 삶과 파멸을 그린 <파이>(이상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스타일이 살아있는 극사실적인 전쟁영화 <블랙호크 다운>, 가상의 감옥 안에서 수감자와 죄수역을 맡은 일반인들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관찰한 인간본성에 관한 끔찍한 보고서 <엑스페리멘트>(감독 올리버 히르시비겔) 등이 있다. 무인도에서 동료를 다 죽인 한 학생만 살려준다는 설정으로 교육현실을 풍자한 후카사쿠 긴지의 잔혹극 <배틀 로얄>도 극단적인 걸 즐기는 이들에겐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나홀로 야시시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두집 살림을 태연하게 벌이는 여성 캐릭터가 깜찍스런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스페인 에로티시즘의 대표주자 비가스 루나 감독의 최신작 <마르티나>가 기다리고 있다. 뉴욕에 사는 네 처녀들의 ‘저녁식사’ 격인 옴니버스 <섹스&시티> 1·2편(감독 대니얼 얼그랜트, 수전 세이들먼, 앨리슨 앤더슨)도 언니들의 솔직하고 유쾌한 대화가 재미있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