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의 끝물을 맞은 ‘나다양’양은 며칠 전부터 친구들을 꼬셔 <워터보이즈>를 보기로 했다. 하얀 물살에 미끈한 또래 남자애들의 수중발레라니 생각만 해도 시원하지 않니 서울에서 시사회를 보고온 친구가 팜플렛을 들고 자랑까지 하는 걸 보니 너무 보고 싶더라. 학원이 끝나자마자 무거운 가방을 들고 시내로 직행한 나양. 그러나 극장에 도착해보니, 아뿔싸, 영화상영은 커녕 포스터 한장 안 보였다. 주변 극장을 찾아 방황하기 4시간. 도대체 이 영화는 어디서 한다는 거야 지방에선 비디오로 밖에 볼 수 없다는 거야
작은 영화들 숨막힌다
미로비젼이 수입한 <워터보이즈>의 홈페이지에 실린 사연이다. 지방도시의 이야기지만, 서울이라 해서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20일 현재 서울에 이 영화가 걸린 곳은 6개관, 지방은 23개관이다. 미로비젼쪽이 준비했던 프린트는 40벌. 한벌당 250만원씩만 잡아도 프린트 소실만 몇천만원이 나간 셈이다. 그나마 상영이 온전하게 이뤄지지도 않는다. 서울지역 4개관은 교체상영을 한다. 이른바 ‘퐁당퐁당’ 방식이다. 1, 3회는 이 영화, 2, 4회는 저 영화식이다. “하루에 한회만 틀어주세요, 심야상영 패키지에 넣어주세요, 주중에 넣어주세요… 나중엔 온갖 시나리오를 다 짜서 이야기했어요.” 채희승 미로비젼 대표는 씁쓸하게 웃는다.
지난 9일 개봉한 <헤드윅>의 경우는 더 심하다. 원래 수입사인 씨네월드 쪽에서는 스타배우도 감독도 없는 영화지만, 지난해 <메멘토> 같은 영화의 성공경험이 있기 때문에 전국 20여개관의 개봉은 너끈하다고 생각했다. 극장 수급담당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결과는 서울에서 단 2개관 개봉이었다. 이준익 대표는 “개봉시기를 잘못 잡았나 생각도 해요. 하지만 여름성수기엔 꼭 블록버스터만 봐야 하나요”라고 말했다. 그래도 “비디오 출시될 때까진 1개관이라도 릴레이로 개봉하겠다”는 씨네월드쪽의 의지와 입소문이 퍼지면서 <헤드윅>은 한 관에서 떨어지면 다른 관에 걸리는 형태로 확대개봉되고 있다.
당장은 해당영화사의 애가 탄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관객들이 다양한 영화를 볼 기회 자체를 원천봉쇄당한다는 것이다.
극장가는 요지경
요즘 영화계에선 개봉뒤 3주만 넘어가면 ‘롱런’이다. 토요일 하루, 심지어 반나절만 걸리다 떨어지는 영화도 있다. 극장쪽에선 “지금이 성수기의 막바지이고 월드컵으로 6월에 개봉 못한 영화들이 몰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이런 현상이 3~4년 전부터 이른바 ‘와이드 배급’방식과 멀티플렉스 극장이 정착하고 프린트 벌수 경쟁이 치열해지며 고질화됐다고 말한다.현재 전국 스크린수는 818개. 메이저배급사의 대작들은 전국 100개 이상 개봉이 적지 않다. 배급 1위업체인 시네마서비스(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가 지난해 23편이나 배급했다. “절대 압력은 없었다”는데 대부분의 멀티 극장들엔 이상하게도 시네마서비스, CJ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직배사의 배급작품들은 으레 1개관씩 차지했다.
작은 극장이라고 자유롭진 않다. 서울시내의 모 극장은 얼마전 한 배급사의 다음 기대작을 받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영화를 주말에 걸었다. 업계에서 쓰는 일본식 표현으로 이른바 ‘다께’(끼워팔기를 뜻함)다. 아예 관객이 1명도 들지 않아 영사기를 돌려보지도 못한 게 3회다. 영화사들은 개봉주에 전국 관객숫자보다 큰 멀티플렉스관에서 주말에 ‘몇등을 했느냐’에 더 신경을 쓴다. 1등을 하면 다행이지만 2등만 해도 불안하다. 3등 작품이 메이저 배급사의 영화면 계속 걸린다는 보장이 없다.
이러다보니 큰 배급사 라인을 타지 못한 작은 영화들이 개봉관을 잡는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다. “관객들이 영화사가 성의없는 줄 알고 항의하는 글을 읽으면 눈물이 난다”는 소리가 나올만도 하다.
나에겐 영화선택의 권리가 있다
영화계에선, 직배사가 시장의 50%를 점하고 단관 형태의 극장들이 주요 상영관이던 몇해 전과 비교하면 “그래도 나아진 편”이라 말한다. 영화인회의의 유창서 사무국장은 다만 “미국식의 와이드 배급방식으로 천편일률로 가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박하사탕>의 예처럼 몇개 메인관에서 상영을 하고 차례차례 개봉관을 늘려나가는 ‘플랫폼’ 방식이 있었지만 한정된 스크린에 다수의 영화가 몰려드는 상황에선 시도조차 힘들다. 씨네월드의 이준익 대표는 “메이저 배급사의 작품 가운데도 ‘아니올시다’ 작품은 있는데 지금처럼 무조건 대형 배급사 위주의 개봉은 그토록 얘기하는 ‘수익률의 극대화’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출발선 자체가 불공정한 상황에선 ‘다양한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나다양’양 같은 관객이 계속 생길 수밖에 없으리라는 게 안타깝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