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삼 감독이 신작 <윈드토커>를 홍보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고 했을 때, 그를 만나야 하는 사람으로
류승완 감독이 아닌 누군가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는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이미 <영웅본색>을 보는 장면을 집어넣음으로써 오우삼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입증한 바 있다. 액션영화만을 고집하는 자신의 영화적인 스승이 성룡과 이소룡, 오우삼이라는 사실도 수없이 강조했었다.
기대했던 액션이 없는 영화 <윈드토커>에서마저 오우삼의 영화 한장면 한장면을 발견했던 류승완 감독. <씨네21>은 오우삼 감독 역시 자신의
열혈 팬이자 재능 있는 감독이기도 한 이 청년을 두팔 벌려 맞아줄 것이라 확신하며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다.
편집자----
류승완 감독은 A4용지 세장 분량의 질문지를 준비해왔다. 10년도 더 전에 재개봉관에서 상영한 <영웅본색>을 보고 취해버린 그는
존경해 마지않는 액션영화의 대가를 만난다는 사실에 며칠 전부터 두근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겠는가. 류승완 감독은 아저씨 몰래,
벽에 물을 발라가며 뜯었던 <영웅본색> 포스터를 아직도 아끼면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돌아가신 그의 할머니는 TV에서 방영한 <종횡사해>를
보곤 그런 영화를 만들라고 당부했다고도 했다. 빨리 올라갔으면 하는데, ‘오우삼 감독님’이 메이크업중이라 멈칫한 류승완 감독. 그는 그날 아침
기자와의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인터뷰 시간보다는 1시간 먼저 오우삼 감독이 머무는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류승완
먼저 DVD를 한장 드려도 될까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고, 6500만원으로 만든 제 데뷔작이거든요. 이걸 만들면서
오우삼 감독님한테 영향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부끄럽긴 하지만… 재킷에 ‘한국의 오우삼’이라고 써 있는데….
오우삼
(활짝 웃으며) 고맙습니다. 하지만 감독들은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준다기보다 서로 주고받는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 같군요.
나부터도 그러니까.
형님 영화에서 영웅이 사라지다뇨?
류승완
예전부터 오우삼 감독님의 팬이었기 때문에 오우삼이 만드는 전쟁영화는 어떤 것일까 정말 궁금했어요. 그런데 팬으로선 약간 당혹스럽더라구요.
전쟁장면이 아름답고 멋있고 비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칠고 사실적이어서요. 혹시 9·11 테러의 영향인 걸까요?
오우삼
<윈드토커>는 9·11 테러가 일어나기 여섯달 전에 완성했습니다. 테러와는 그리 상관이 없는 거죠. 그보다는 소재와
관계가 깊습니다. <윈드토커>는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한 영화이기 때문에 액션 시퀀스는 모두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들도록
찍었어요.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으니까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관객이 전쟁터에 던져진 당사자가 된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전쟁터에선 자신이 언제 죽을지, 총알이 어디서 날아올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병사들의
나약함과 공포, 그들이 행할 수밖에 없는 폭력을 담으려 했고, 그런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선 액션이 사실적이어야 했습니다.나는 또
액션에 감정을 부여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전쟁터는 비참한 곳입니다. 서로를 죽이고 팔다리가 잘려나가죠. 하지만 <윈드토커>는
최후에는 우정과 형제애가 남으리라고 말하는 영화고, 피와 눈물을 사용해 인간관계에 포커스를 맞추려 했습니다. <윈드토커>에
존 웨인 같은 영웅 대신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까닭은, 전쟁엔 진짜 적군도 승자도 없고 모두가 패자이기 때문입니다. 반영웅적인
거죠. 아마 사람들은 영웅이 등장하는, 로맨틱하고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기대했을 겁니다.
류승완
1973년충남 온양 출생. 수많은 액션영화를 섭렵하며 배우를 꿈꾸었으나, 뒤늦게 영화를 만드는 건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방향을 선회했다. 그와 오우삼의 공통점은 스물일곱살에 데뷔했다는 것,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데뷔작을 잊고 싶다는 것.
단편영화 <변질헤드>로 감독 경력을 시작한 류승완은 네편의 단편을 모은 릴레이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한국의 오우삼’이라는 칭송을 듣기에 이르렀다. 인터넷영화 <다찌마와 리>와 장편 <피도 눈물도 없이>를
내놓은 그는 월드컵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루치 아라치’ 시나리오를 집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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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삼
1946년 중국 광저우 출생. 쇼브러더스에서 <외팔이 검객> 시리즈로 유명한 장철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다 1973년<철한유정>으로 데뷔했지만, 그리 호응을 얻지 못해 B급 코미디 감독으로 10년을 보냈다. 그런 오우삼을 구원한
영화는 친구 서극이 제작한 <영웅본색>. 그뒤 오우삼은 ‘홍콩 누아르’라 불리는 액션영화의 흐름을 주도하며 <영웅본색2>
<첩혈쌍웅> 등의 대표작을 연이어 내놓았다. <하드타겟>을 시작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오우삼은 <페이스
오프> <미션 임파서블2>의 성공으로 입지를 굳혔고, 앞으로는 정말 만들고 싶었던 드라마와 코미디, 뮤지컬
등을 실험할 계획이다.
류승완
그런 점에서 니콜라스 케이지의 유약한 모습이 설득력 있었어요. 하지만 ‘존 우’보다 ‘오우삼’을 먼저 알았던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뭐랄까… 미국인의 영화라는 느낌을 주거든요. 할리우드 진출작인 <하드타겟>만 해도 이방인의 정서가 묻어났는데, <미션
임파서블2>는 참 미국적이었어요. <윈드토커>의 니콜라스 케이지도 비인간적인 상부의 명령에 대항해서, 외국인들이
보기엔 ‘미국적인 정의’를 수호하죠.
오우삼
좀더 상업적이 됐기 때문 아닐까요? (웃음) 정서적으론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여전히 내 고유의 캐릭터와 개성을 유지하려
노력한답니다. 사실, <하드타겟>과 <브로큰 애로우>까지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시절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만도 분투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페이스 오프>부터는 약간 변화가 생겼지요. 그 영화는 나만의 비전과 철학,
액션, 스타일이 녹아 있었고, 제가 좋아하는 주제인 선과 악의 대립도 있었어요. 가족애와 우정 같은 도덕적 가치 역시 내가 홍콩
시절부터 즐겨 다뤘던 주제였고요. <미션 임파서블2>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영화이긴 했지만, 내 스타일이 반영된 액션과 로맨스가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윈드토커>는 지금까지 찍은 어떤 할리우드영화와도 달라요. 소재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선택한
거니까. <윈드토커>라는 영화 전체는 미국을 향한 애국심이 아니라 우정에 관한 이야기고, 그건 내가 좋아하는 주제예요.
아마 이 영화 이후엔 나만의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류승완
지금까지는 감독님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이 어려웠단 말인가요?
오우삼
할리우드에선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몇편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내 스타일을 유지하려면 많은 관객이 필요하다는 얘기지요.
<하드타겟> 이야기를 해볼게요. 이 영화는 내가 홍콩에서 만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그래서
나는 내 스타일을 모두 쏟아부었죠. 그런데 대부분의 관객은 내가 만든 영화를 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그들은 슬로모션이나 스타일리시한
액션이 등장하면 그냥 웃어버렸고, 몇명은 중간에 나가기까지 했어요. 게다가 할리우드영화는 굉장히 전형적이어서 액션이면 액션, 드라마면
드라마, 코미디면 코미디, 장르가 구분돼 있죠. 홍콩영화는 한편에 그런 요소가 다 들어있는데 말이에요. 결국 나는 관객을 한번에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한 걸음씩 밟아가기로 결심했죠. <브로큰 애로우>는 약간 나답게, <페이스
오프>는 조금 더, 이런 식으로. 그러다보니까 관객이 어느새 존 우의 스타일을 알게 됐고, 누군가 나를 모방하면 “어, 저건
존 우의 스타일인데”라고 말하게 됐어요. (웃음) 할리우드는 권력이 있어야 연출과 편집의 자유가 생기는 곳이더군요.
류승완
감독님의 스타일은 고속촬영 같은 기술적인 부분보다 정서적인 부분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첩혈가두>를
보면 양조위가 고통에 시달리는 친구 장학우에게 권총을 들이대는 장면이 있었어요. 죽음으로써 편안하게 해주려고. 양조위가 차마 못
쏘고 있으니까 장학우가 머리에 겨눈 권총을 잡고 가슴으로 쓸어내리거든요. <윈드토커>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잖아요. 미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서로 장총을 겨누는 장면도 많이 나오는 거고. 이런 정서적인 측면은 쉽게 흉내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오우삼
감사, 감사합니다. (웃음) <첩혈가두>와 비슷한 그 장면은 원래 시나리오에 없었어요. 내 아이디어였거든요. 니콜라스
케이지는 명령을 어길 것인지 친구를 죽일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데, 결국 후자를 택하죠. 그건 감정적인 순간이고, 전형적인 내 스타일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존 트래볼타가 인디언 병사 화이트 호스와 함께 하모니카와 민속악기로 합주를 하는 건데, 역시 내가
덧붙인 장면입니다. 혹시 미국인들이 정말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요? 겉으로 보기엔 친절하고 열정적인데, 정말은 외로운 거죠. 그들은
아무리 개방적이어도 진짜 친구가 없어요. 내가 영화주제로 계속 우정을 택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이기도 하죠.
류승완
제가 고등학생일 때 담배를 피우라고 강요한 영화장면이 딱 두 개가 있었거든요? 하나가 <대부3>에서 알 파치노가 죽어가는
순간, 다른 하나가 바로 <첩혈가두>의 그 장면이었어요.
오우삼
저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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