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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더스 HQ 대표 정훈탁 [2]
정진환 문석 2002-07-05

미다스의 손, 흥행을 빚다

정우성과의 만남, 그리고 긴 기다림

이렇게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정훈탁은 오래 전 실패했던 배우 매니지먼트를 재개한다. 소속 배우라곤 EBM 출범 직전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났던 정우성뿐이었다. “처음 만나 눈을 바라보는데 바람이 솨-하고 불어오는” 느낌을 받았던 그는 정우성에게 의형제를 제안했고, 정우성도 마음이 통했는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방송사나 영화계에 인맥이 없었던 그로서는 그저 “기다리라”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1년 가까이 백수처럼 지냈음에도 정우성은 조급한 내색을 하지 않았고, 다른 매니지먼트로부터의 스카우트 제의도 모두 뿌리쳤다.

업계에서 자리를 잡은 뒤, 정훈탁이 가장 먼저 신경쓴 일이 정우성을 키우는 것이었음은 당연했다. 그는 신철 사장을 다시 찾아가 <구미호>에 캐스팅해줄 것을 간곡히 사정했다. 당연하게도 초반 반응은 안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철 사장이 정훈탁을 불러 양주를 따라주며 위로의 말 비스무레한 것을 건넸다. 술에 취한 그는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너무한 것 아니냐. 처음부터 배우인 사람이 어딨냐. 우성이는 백지다. 당신들이 쓰기 나름이다.” 그의 열정에 감복한 탓인지, 신철 사장은 결국 오케이를 했다. 개런티도 받지 않았다. 신철 사장이 개런티를 묻자, 그는 “그 돈으로 필름을 더 사서 우성이를 더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김지호와의 만남은 그의 입지를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94년 아르바이트 삼아 일을 해보겠다고 찾아온 김지호를 만났을 때, 정훈탁은 딱히 예쁘지는 않지만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두 시간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느낌이 팍 오더라. 아, 탤런트들이 얘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거구나, 하고.” 다른 연기자들이 건강미, 발랄함을 ‘연기’하고 있지만, 김지호는 이미 자신 안에 체득하고 있어 그것을 밖으로 보여주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하지만 사진을 찍어 방송사 PD들에게 돌렸을 때만 해도,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시큰둥한 표정의 PD들을 뒤로 하고 여의도를 나온 그는 뭔가를 찍어서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자는 생각을 하게 됐고, 신승훈의 <그후로 오랫동안>의 뮤직비디오에 출연시키게 된다. 그 비디오 테이프를 들고 다시 방송사를 찾았고, 좋은 반응이 나왔다. 결국 윤석호 PD가 <사랑의 인사>에 중성적인 여성 역할로 김지호를 캐스팅했고, 방송을 시작한 지 한달이 채 지나기 전에 기자와 CF 관계자들로부터 전화가 폭주했다. “자고 일어나면 CF 제안이 몇개씩 들어와 있었다. 나중엔 귀찮아지더라.” 하지만 정훈탁은 김지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처음 겪는 일이다보니 뒷날의 이미지 관리 같은 데 신경쓰지 못하고 무리한 스케줄을 그대로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곧 정우성도 <아스팔트 사나이>를 통해 성공의 가도에 올라섰고, 한재석도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정훈탁은 승승장구의 나날을 보낸다. 학교 동기인 박신양도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 와중에 장혁과 전지현을 만났고, god도 만들었다. “준비가 되지 않으면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운 그는 이들을 혹독할 정도로 단련시켰다. 책을 읽어라, 독후감을 써라, 영화를 봐라, 음악을 들어라, 인간이 돼라 등등 시어머니처럼 많이도 말을 했던 그의 노력과 그들의 재기가 차츰 어우러져 나갔다. 공장에서 만든 비료가 아니라 천연 퇴비로 거름을 주듯, 느리지만 단단하게 키우려는 그의 전략이 성공을 거둔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시련의 순간은 있었다. 특히 IMF 경제위기가 다가온 시절, CF 요청이 뚝 끊겼고, 장혁, 전지현, god는 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직원 임금에다 신인에 들어가는 돈 하며, 비용은 지속적으로 많이 들어갔지만 도무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드 네개를 돌리다가 일제히 ‘빵꾸’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속 배우, 매니저들과 쌓아놓은 신뢰를 바탕으로 상황을 돌파했고, 2000년에는 차승재와 함께 힘을 모아 싸이더스를 출범해 매니지먼트의 기업화를 앞장서 현실화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인간관계”

한국의 매니지먼트계 풍토 속에서 싸이더스 HQ는 별난 곳임에 틀림없다. 돈과 환경을 좇아 배우와 매니저들의 이동이 빈번하기 그지없는 이 동네에서 이곳만큼은 거의 인력변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 EBM 시절의 매니저는 한명도 퇴사하지 않았고, 싸이더스로 통합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배우 역시 김지호 외엔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정훈탁 본인에 따르면, 이곳을 탄탄하게 묶어주는 요소는 돈이나 권력, 아부가 아니라 ‘파이프’다. “일도 좋고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다. 상대방과 내가 믿고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나의 괴로움이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상대방의 그것도 내게 전할 수 있는 관이 설치돼야 한다. 일은 그 다음에 배우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배우건 매니저건 그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 마음의 관을 설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떠들썩하게 ‘배관공사’를 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방에서 속옷 하나만 입고 스스럼없이 얘기하면서 울고 웃는다”(장혁), “오너보다는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하루에 4시간씩 자던 정 대표의 리듬에 맞춰 일하다가 쓰러질 뻔했다”(김상영 팀장)는 주변의 증언을 들으면 그 ‘파이프’의 정체가 어렴풋이 잡힌다.

싸이더스 출범 전, EBM 시절엔 배우들과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는 얘기도 그의 스타일을 짐작게 한다. 장혁의 이야기. “계약서를 안 쓰기에, 배우가 나갈 수도 있는데 불안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훈탁이 형은 마음에 들면 있고,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 나가라고 얘기하더라. 그러면서 만약에 나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형, 동생 사이인 것은 바뀌지 않는다고 하더라.” 정훈탁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다.더 열심히 일해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 배우가 나갈 리가 있나. 배우도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려면 열정을 갖고 일할 것이고. 그리고 이런 사람냄새 나는 맛을 들이면 계속 함께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싸이더스 이전부터 함께해온 배우들의 경우, 싸이더스 출범 때 쓴 계약서에 위약금 조항을 아예 넣지 않았다. 상호간에 ‘파이프’가 단단히 연결돼 있다는 얘기, 즉 그만큼 신뢰가 두텁게 쌓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배관작업’은 그의 사무실 바깥을 넘어서진 못한 듯 보이기도 한다. 충무로에선 여러 제작자들이 그에 대해 ‘칼을 간다’는 소문도 들리고, ‘영화계의 물을 흐리는 공적 1호’로 찍혔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그에 대한 비난은 배우들과 제작자, 감독 사이에서 ‘장난질’을 친다는 것에서부터 “남들이 공들여놓은 프로젝트를 훼방놓으려 하거나 넙죽 받아먹으려 한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결국 배우들의 힘으로 영향력을 쌓은 뒤, 이를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만 한다는 것이다. 사업파트너이자 업계 선배인 차승재 대표와의 ‘파이프’에 금이 간 듯 보이는 점도 그에겐 부담이다.

물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나비픽처스의 조민환 대표는 “내가 아는 한, 시나리오를 가장 잘 보는 사람 중 하나”라고 평가하며 김성수 감독은 “배우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현재를 던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훈탁 자신도 “나와 함께 일해본 사람이 비난한다면 받아들이겠지만, 대부분의 소문은 그렇지 않은 이들이 퍼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동안 그 또는 그의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제작자와 감독은 극히 소수였지만 말이다.

이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도 정훈탁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숨가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루 평균 8∼10건의 비즈니스 미팅을 가지며, 하루 180통 가까운 전화를 휴대폰으로 받아야할 정도다. 그의 입에서 “이젠 숨을 좀 고르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신인도 발굴하고 생각도 많이 했으면 한다는 그의 소박한 소망이 당장 이뤄지긴 어려울 듯 보인다.올해 초 싸이더스 HQ로 독립하면서 그가 품었던 계획을 실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제작의 정착, 연기 아카데미의 설립, 아시아를 위시한 세계시장 진출 등은 그의 계획 중 일부에 불과하다. 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했던 전용주 변호사를 재무담당 이사로 끌어들였고, 금융이나 법조계 등 비엔터테인먼트계 인사들을 모아나가려는 것도 더 큰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보인다.

그가 자신의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을지, 그를 견제하는 힘들을 이겨낼 수 있을지, 그가 만들어놓은 ‘파이프’가 언제까지 탄탄하게 버틸지 등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해 보이는 것도 있다. 그는 계속 소수일지라도 사람을 설득하고 믿게 하는 일을 할 것이고,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장렬하게 전사할 수 있다’는 각오로 전진할 것이라는 점 말이다.

정훈탁이 회고하는 운명적 만남의 순간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그에게서 여백을 느낄 때인 것 같다. 완벽하다는 느낌이 오면 그렇구나, 하는데 여백이 느껴지면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을 보태면 저 여백을 채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얘기다. 그런 느낌은 정우성, 전지현, 장혁뿐 아니라 김지호, 신민아, 조인성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우성

93년경이던가, 아는 선배가 괜찮은 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는데, 그 며칠 전 방송사에서 모르는 청년이 와서 인사를 하더라. 당시 <백한번째 프로포즈> O.S.T를 홍보하기 위해 주제곡 제목 ‘세이 예스’를 스티커로 만들어 자동차에 붙이고 다녔는데, 그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 청년이 그때 날 보고 “정훈탁 형님 아니세요”했는데, 눈에서 바람이 솨- 불어오더라. 마음이 확 끌리더라. 너무 좋았다. 정식으로 만나서 구두로 계약을 했고, “우리 평생 가자”며 의형제를 맺었다. 그렇게 만났지만, 사실 내겐 어떤 커넥션도 없었기에 “일단 기다려달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정말 아무 불만도 없이 8개월 동안 기다리더라. 그는 내가 어려울 때 가장 큰힘을 준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와서 그러더라. “어떤 PD가 날보고 다른 매니지먼트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해서, 난 훈탁이 형에게 계약금 100억원을 받았어요. 평생계약이에요”라고 말했다고. 그 말을 듣고 난 정말 감동을 먹었다.

전지현

잡지모델로 등장한 그녀를 보고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때가 전지현이 고1 올라갈 때였을 텐데, <레옹>의 마틸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려보이면서도 성인 같은 느낌이 있고, 남자아이 인상도 있는. 뭘 물어봐도 잘 대답도 안 했고, “네”라고 대답을 하면서 눈을 치켜뜨더라. 그래서 얘는 다른 매니저에게 발탁되면 안 되겠다는 이상한 책임감이 들었다. 길을 오랫동안 잘 닦아줘서 키우자는 생각 말이다. 프린터 광고로 스타로 떠올랐을 때도 배우로서의 카리스마를 살려주기 위해 쇼 프로그램에 출연시키지 않은 것도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장혁

혁이가 스무살 때 처음 만났다. 정우성을 닮기도 했는데, 좀 편안한 느낌도 있었다. 얘기를 해보니까 이 친구는 지나치게 순수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게 엄청난 무기가 될 것이라는 게 보였다. 넉살도 좋아서 그날로 바로 우리 집에서 며칠 동안 같이 지냈다. 무조건 책을 많이 읽고, 영화를 많이 보라고 했다. 혹독하게 다루기도 했다. god와 함께 합숙시키면서 야단도 많이 쳤고, 매일매일 독후감을 쓰도록 하기도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오디션을 보기만 하면 떨어졌다. 오죽하면 ‘오디션맨’이라고 불렀을까. 드라마 <모델>로 데뷔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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