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바람을 머금고
라벨: <거울> 제3곡 <바다 위의 작은 배>
호기심이 드는 상대가 지금 당장 동행을 요청한다면? 엘리오(티모테 샬라메)는 시내에 함께 가자는 올리버(아미 해머)의 말에 서둘러 짐을 챙긴다. 은근슬쩍 마음을 내비쳤는데도 틈을 주지 않는 상대와의 자전거 여정에서 라벨의 <바다 위의 작은 배>가 흐른다. 일렁이는 파도 위를 작은 배가 이리저리 떠다니는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곡은 사랑 초입의 설렘과 혼란을 그대로 비추는 듯하다. 곡에서 물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라벨은 이 곡이 포함된 피아노 독주곡 모음집 <거울>을 쓰던 무렵 7주간 운하 여행을 떠났다. 여기서 받은 음악적 영감을 작품에 담겠다는 기록도 남겼다.
쇼팽: 전주곡 Op. 28 제23번 F장조 & 쇼팽: 전주곡 Op. 28 제24번 D단조
음악이 답변이 되기도 한다. 비가 쏟아지는 베트남. 작곡가 쿠엔(호아 호이 브엉)은 서운함을 토로하는 약혼자의 말에 부드럽게 연주하던 피아노곡을 격렬한 곡으로 바꾼다. 단호한 거절처럼 들리는 선율에 약혼자는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럼에도 연주를 이어가는 쿠엔과 집안일을 하러 들어온 하녀 무이(트란 누 옌케). 창밖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약혼자는 둘 사이의 묘한 교감을 감지한다. 먼저 연주되는 23번이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다면 이어지는 24번은 거센 물살을 닮았다. 영화는 쇼팽 피아노 독주곡집 <전주곡 Op. 28>의 마지막 두곡을 이어 붙여 고요함과 격정을 오간다. 세 인물의 관계는 복잡하나 이파리에 빗물이 튀어오를 만큼 쏟아지는 폭우와 어우러진 곡만큼은 시원하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가장조 K. 622 제2악장 아다지오
카렌(메릴 스트리프)과 데니스(로버트 레드퍼드)를 태운 경비행기가 아프리카 케냐의 하늘을 누비는 장면을 극장에서 본 관객은 얼마나 황홀했을까. 장대한 구름이 펼쳐진 하늘, 우거진 숲, 그 사이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길이 이어지는 동안 제2악장이 흐른다. 오케스트라도 자연도 압도하려 하지 않는 클라리넷의 청아한 울림이 안식을 준다. 그러나 이 곡을 쓸 당시 모차르트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병세도 재정난도 깊어진, 세상을 떠나기 두달 전이었다. 죽음을 예감하며 되레 겸허해진 걸까. 모든 고통에서 풀려난 듯한 자유로움이 선율에 스며 있다. 한편 제2악장을 영화에 쓰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한 사람은 연출자인 시드니 폴락이다. 평소 이 곡을 아끼던 그는 영화의 정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낭만과 슬픔을 품고
<비포 선라이즈>
퍼셀: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 서곡
여름 휴가철, 어디선가 <비포 선라이즈>의 주인공을 꿈꾸며 기차에 오른 사람이 있을 때다. 영화는 셀린(줄리 델피)과 제시(이선 호크)가 처음 만나는 부다페스트발 파리행 기차의 출발로 문을 연다. 이때 흐르는 곡이 영국 작곡가 헨리 퍼셀의 대표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의 서곡이다. 역동적인 현악기가 떠나는 기차와 함께 낭만적인 하루를 힘차게 연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첫곡에 두 남녀의 결말을 미리 숨겨두었다. <디도와 에네아스>는 비극이다. 멸망한 트로이의 왕자 에네아스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사랑에 빠지지만 신이 내린 운명을 따르기 위해 그녀를 떠난다. 버림받았다고 여긴 디도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영화는 오페라만큼의 비극은 아니나 셀린과 제시가 맺어지는 이야기도 아니다.
<전망 좋은 방>
푸치니: 오페라 <잔니 스키키> 중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상상해보자. 여름날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침, 창문 틈으로 스며든 따스한 햇살에 잠에서 깬다. 창을 열면 저 멀리 파란 하늘과 두오모성당의 돔, 피렌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조금 낮추면 잔잔한 아르노강과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베키오 다리가 보인다. 극 중 여행 온 영국 귀족 아가씨 루시(헬레나 보넘 카터)가 마주한 풍경이다. 이 눈부신 아침을 푸치니의 오페라가 함께한다. 소프라노의 화려한 음색이 천국에 온 듯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제목과 곡 분위기에서 가족의 따뜻함을 노래한 곡으로 짐작하기 쉬우나 실은 꽤 살벌하다. 여성주인공 라우레타는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강에 몸을 던지겠다며 아버지를 몰아붙인다.
빌라로부스: <브라질풍의 바흐> 제5번 제1곡 아리아(Cantilena)
울고 싶은 여름밤에 틀 곡이 필요하다면 이 곡이 어떨까. 브라질 작곡가 에이토르 빌라로부스의 아리아가 부름을 받아 간 곳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진사 정원(한석규)의 방이다. 이부자리에서 꺼이꺼이 우는 정원과 아들 방 앞에서 어쩌지 못한 채 서성이는 아버지(신구)의 그림자. 애잔한 첼로 선율이 잠 못 이루는 부자의 밤을 더욱 먹먹하게 한다. 생소할 수 있는 빌라로부스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곡가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모음곡 <브라질풍의 바흐>다. 그가 심취한 바흐의 형식에 브라질 민속음악을 녹여낸 연작으로, 총 9곡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아리아가 가장 널리 사랑받는 곡이다. 지금도 브라질 어디선가 이 곡을 들으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열기를 깨우다
베르디: <레퀴엠> 중 ‘진노의 날’
오늘도 30도라는 일기예보.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 곡에 쏟아보는 건 어떨까. ‘진노의 날’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예고편부터 등장해 아드레날린을 끌어올렸다. 사막에서 불탄 자동차들이 뒤집히고 인간들이 서로에게 달려드는 동안 거대한 오케스트라 음향이 모래폭풍처럼 몰아친다. 극 중에서는 불릿 파머(리처드 카터)가 자신의 시력을 앗아간 퓨리오사(샬리즈 세런)를 향해 쌍권총을 쏘는 장면에 쓰여 복수심을 극대화했다. 지금은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곡이나 탄생 당시에는 비판도 받았다. 망자를 기리는 미사곡(레퀴엠)으로는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비통한 슬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숨김없이 담아냈다는 점에서 많은 공감을 얻으며 위대한 레퀴엠으로 역사에 남았다.
<더 폴>
베토벤: 교향곡 제7번 가장조 Op. 92 제2악장 알레그레토
흑백 화면 속 물에 잠겨 있던 한 남자가 천천히 얼굴을 드러낸다. 한참 숨을 참았던 그의 입이 벌어지는 순간, 목관악기의 불안한 화음이 울린다. 영화 촬영 중 말에서 추락한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가 구조되는 동안 제2악장이 흐른다. 사고 현장을 수습하려는 사람들의 다급한 움직임과 강에 빠진 로이와 말까지 밧줄로 끌어 올리려는 손길 위로 저음의 현악기가 쉼 없이 전진한다. 끝으로 갈수록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쌓아 올리며 고조된다. 강렬한 에너지가 있어 이열치열로 여름을 나고 싶은 사람에게 제격이다. 제2악장은 베토벤의 교향곡 가운데서도 특히 사랑받는 악장이다. 초연 당시부터 관객의 열렬한 환호를 받아 한 차례 더 연주됐고, 이후 수많은 버전으로 편곡됐다.
<써니>
드보르자크: 교향곡 제9번 마단조 Op. 95 <신세계로부터> 제4악장 알레그로 콘 푸오코
<써니> 하면 보니 엠의 를 비롯한 팝송이 먼저 떠오르지만 고전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진덕여고 칠공주 ‘써니’가 무대에 서기로 한 축제날, 학교 고적대는 <신세계로부터> 제4악장을 연주하며 장내를 뜨겁게 달군다. 여름 축제에 가기 망설여질 때 분위기만 내기에 제격인 곡이다. 제4악장은 ‘빠르고 정열적으로’(Allegro con fuoco)라는 제목처럼 호른과 트럼펫이 힘차게 시작해 클라리넷과 현악기가 서정을 더한 뒤 다시 처음의 열기를 찾는다. 듣고 있으면 축제 한가운데 서 있는 듯 들뜬 기분이 된다. 제목의 ‘신세계’는 미국을 가리키지만 곡을 지배하는 정서는 새로운 땅에 대한 호기심보다 고향을 향한 그리움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