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8일에는 <하나 코리아>, 7월22일에는 <지느러미>가 개봉했다. 탈북민의 서울 정착기를 다룬 전자와 통일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후자 사이에는 은근한 연결 고리가 엿보이나 보다 또렷한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두편의 제작사가 시소픽쳐스로 같다는 것. 2주 간격으로 스크린에 걸린 작품들을 바라보며 오희정 시소픽쳐스 대표는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시소의 한 챕터가 넘어가는구나!” 5월 막을 내린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신작 <비커밍 킴>을 공개했고, 하반기 다른 영화제에서는 <베이비 잭프룻 베이비 구아바>를 최초로 선보일 예정이다. “일이 왜 이렇게 몰리는지! (웃음) 각기 다른 시점에 시작한 프로젝트들이 이상하게 올해 다 관객을 만나고 있다.”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영문학에 재미를 붙이진 못한” 오희정 대표는 원래 대학 졸업 후 여의도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살았다. “셰익스피어와 <섹스 앤 더 시티>는 달라서” 드라마로 영어를 익힌 덕분에 해외 클라이언트들과도 무리 없이 소통해왔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때의 경험이 지금 유럽 창작자들과 협업을 많이 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후에 교육 정책을 배우기 위해 대학원에 다니고, 하교 후 다시 유럽 시각에 맞춰 업무를 했을 만큼 활력 넘쳤던 그의 일상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연인과 이별하면서 앞으로 어떤 기준과 지향을 갖고 인생을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경영컨설팅은 내가 잘하는 일이었다. 교육학은 내가 의미 있다고 여긴 일이었다. 이제는 좀 재밌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맘때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피곤한데도 늦게까지 영화를 두편씩 보고 자곤 했다.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크고 유명한 영화사에 경력직으로 지원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그런 곳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내가 재밌어하는 영화를 만들고, 배급하고, 해외에 알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바람은 쉬이 이뤄지지 않았다. 관심 가는 영화사들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1년 반을 백수로 지냈다. 그 끝에 한국 및 아시아 다큐멘터리를 해외에 배급하는 업체에 간신히 발을 들였다.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처럼 굵직한 작품의 행로를 넓히며 뿌듯해하던 것도 잠시, 회사가 파산하고 말았다. 오희정 대표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거기서 만난 영화들은 이미 내 아가들이 되었는데, 얘네들이 전부 갈 곳을 잃었다는 소리였다. 나라도 이 아이들을 돌보고 싶어 얼떨결에 사업자등록을 해버렸다.” 30대의 키워드를 ‘균형’으로 잡았으니, 제작사 이름은 ‘시소픽쳐스’라 지었다. 시소는 놀이터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해 맘에 들었다. 외국인이 발음하기 쉽다는 것도 장점이다.
“회사를 차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는 알고 있었다. 당시 <피의 연대기>를 프로듀싱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첫째, 영화 일은 진짜 어렵다. 둘째, 그래서 절대 혼자서는 못한다. 그 점이 좌절스럽기도, 안도가 되기도 했다. 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달리 말하면 그만큼 이 업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10년은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처음 들어간 영화사도 다큐멘터리 전문, 처음 프로듀서로 참여한 영화도 다큐멘터리였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오희정 대표에게는 다큐멘터리에 집중할 계획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큐멘터리를 향해 세운 장벽도 없었다. 같은 ‘시네마’로 받아들였을 뿐 픽션과 논픽션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에게 기회가 된 건 다큐멘터리 영화 현장에 프로듀서의 개념이 희박했던 현실이었다. 그가 김보람 감독과 <피의 연대기>를 작업하는 동안에도 그랬다. “관련 행사에 초청받아도 감독을 위한 자리만 있지 프로듀서가 같이 나타나면 놀라는 분위기였다. 다큐멘터리 분야에 프로듀서가 귀했기에 내 역할에 대한 수요는 있었다.” 덕분에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의 선정 작가 4인 중 한명인 김아영 작가와도 이어졌다. 그와는 수편의 단편 작업을 지나 AI와 게임 엔진을 활용한 첫 장편을 준비하고 있다.
다양한 제안을 받다 보니 배움에 대한 갈증이 끓었다. 영화학교에 가서 체계적인 제작 수업을 들어야 하나 싶기도 했다. 더군다나 본격적으로 프레데릭 쇨베르 감독과 <하나 코리아>를 극영화로 구체화하니 주변에서 겁을 줬다. “다큐멘터리 제작과 극영화 제작은 완전히 다르다고들 하는 거다. 그럼 어떡해? 또 배워야지!” 오희정 대표가 유럽을 대표하는 프로듀서 교육·네트워크 기관인 EAVE(European Audiovisual Entrepreneurs) 워크숍으로 향한 건 그래서다. 전 세계 프로듀서들이 1년에 세번, 일주일씩 모여 합숙하며 제작 운영 전반을 학습하는 이 프로그램은 그에게 새로운 문제의식도 안겼다. 문화권에 따른 산업간 불평등을 어떻게 조율하고 조화를 이룰 것인가. 그렇게 EAVE 내 형평성(Equity) 자문위원회에 합류한 지도 올해로 3년째다.
그사이 오희정 대표는 금융업계에서 살아남은 고위직 여성들에 주목한 <드래곤 우먼>의 아시아 부분을 담당하고, 미국 제작자들과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완성하는 등 “국경을 넘는 이야기”에 몰두해왔다. “10편 중 6, 7편은 국제 공동제작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제작만을 지향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누가 누구를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드느냐”다. <하나 코리아> 현장이야말로 그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겨야 했던 곳이다. “백인 남성”이자 덴마크 사람인 프레데릭 쇨베르 감독이 탈북민에 관한 영화를 찍겠다고 했을 때, 오희정 대표조차도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하지만 감독의 진심을 들을수록 제작자로서, 한국인 여성으로서 감응했다.
“프레데릭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외부인의 시선에서 본 분단 상황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질문이었다. 현대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남북한뿐 아니라 덴마크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 않나. 영화의 모티프가 된 실존 인물 효린과 프레데릭의 관계를 지켜보면서도 감지했다. 효린은 같은 여성이고 언어가 통하는 나보다 한국 사회에서는 마찬가지로 이방인인 프레데릭과 있을 때 더 편안해 보였다. <하나 코리아>는 그런 이들의 시선이 필요한 영화였다.”
오희정 대표는 덴마크 제작사인 손탁픽처스와 기획 개발 단계에서부터 이 여정에 동행했다. 보통은 투자 금액에 따라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우위가 정해지지만, 손탁픽처스와 시소픽쳐스는 “프로젝트에 투입한 재원뿐 아니라 시간, 정체성, 감정 노동까지 고려해” 서로를 동등한 위치에 두기로 했다. 현장의 구조와 작품의 정신 사이의 괴리를 줄이는 것. 그게 시소픽쳐스가 추구하는 균형 감각이기도 하다. 김아영 작가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 촬영감독으로 인연을 맺은 박세영 감독과 <지느러미>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도 그 점을 잊지 않으려 했다. <지느러미>는 오희정 대표와 박세영 감독, 그리고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더 스퀘어> <슬픔의 삼각형> 등을 제작한 필립 보베르가 공동으로 투자 및 제작한 작품이다. 오희정 대표는 필립 보베르를 “엄청난 핸즈 온(hands-on) 프로듀서”라 소개했다. 독일에 있는 팀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씩은 화상회의를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으며, 편집과 추가 촬영분에 있어서도 치열하게 의견을 보탰다는 것이다. 그의 역량과 박세영 감독의 색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둘 사이를 슬기롭게 오가는 것도 오희정 대표의 몫이었다.
“지원사업이 뜨기를 기다리고, 그 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려가며 작업하고 싶지는 않았다. ‘넥스트 시네아스트’라고 불리는 감독의 비전을 실험하기 위해 우리만의 대안적인 제작 방식을 찾고 싶었다. 그 방식에 돈과 재능을 보탠 동료들 사이를 조율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지 않을까. 나는 이 과정을 협상이라고 부르기도, 설득이라 부르기도, 디자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년이면 시소픽쳐스는 설립 10주년을 맞는다. <퀴어 마이 프렌즈> 서아현 감독의 차기작 <25cm>, 미국·프랑스와의 합작인 <솔직히, 프랭크> 등 다채로운 라인업이 그들의 곳간에 저장돼 있다.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도전을 지속하되 그때그때 삶에 들이닥치는 의문에 답할 수 있는 영화와 조우하는 것이 오희정 대표의 목표다. “불편하면 긴장하기보다, 이 불편함에 무언가가 내재돼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렇다. 이 자세는 오희정 대표가 바라본 시소픽쳐스라는 조직의 성격이기도 하다. “두려워하기보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팀원들이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의 가장 큰 소망이다. 아주 어려운 일일 테니까.”
ITEM
애플리케이션 ‘미란다’
“코펜하겐, 뭄바이, 하노이, 뉴욕…. 각지에 있는 파트너들의 시차를 고려해 연락하기 위해 수년 전부터 세계 시간 애플리케이션 ‘미란다’를 애용 중이다. 더 예쁜 디자인의 시계 애플리케이션이 많지만, 이 깔끔함에 익숙해져 지우지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 보안이 필요한 대화를 하려면 스마트폰에 사생활 보호 필름을 붙이는 것도 필수다.”
FILMOGRAPHY
2026 <비커밍 킴> <베이비 잭프룻 베이비 구아바> 제작
2024 <데비> 제작
2023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공동제작
2017 <피의 연대기> 프로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