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보여줄까. 카메라를 잡은 촬영감독은 늘 이 질문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최근 3년 이내 서정적인 스토리와 감정적 파고로 많은 관심을 받았던 <아침바다 갈매기는> <장손> <이어지는 땅>은 왜곡 없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프레임의 미덕을 정직하게 실현했다. 그리고 이 공통분모에 이진근 촬영감독이 있다. 그는 영화와 인연이 길다. 8살 즈음이었나. 어린 시절 그는 성룡을 만났다. <프로젝트 A>에서, <용형호제2>에서. 언젠가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던 어린이는 어느새 카메라를 잡고 어딘가를 응시한다.
2024년 11월 개봉한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바다 위에서 거짓 죽음을 위장한 어부 용수(박종환)와 그를 돕거나 그에게 속으며 파장을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그린다. 이 과정에서 이진근 촬영감독은 스타일리시한 장면을 목도하는 것보다 윤주상, 양희경, 박종환 등 내공 높은 배우들의 연기를 빠짐없이 담아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박이웅 감독님과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예쁘게 찍기 위한 인위적 요소는 자제하고, 그보다는 배우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나 표정연기를 세밀하게 잡는 게 좋겠다고. 실제로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 밀도 높은 연기를 보면서 이 에너지를 그대로 전달하는 게 촬영감독의 덕목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최근 영화들은 인물을 제외한 배경을 포커스 아웃으로 날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장면이 예쁘게 나오고 배우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어촌이라는 현실적 공간성이 무척 중요해서 뒷배경까지 심도 있게 담아냈다.”
리얼리즘의 결을 따라 배우의 에너지와 자연을 담는 마음
이야기 전개상 밤 촬영과 새벽 촬영이 많았던 만큼 어둠을 잡아내야 하는 촬영감독에게는 미리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진근 촬영감독은 “독립영화는 예산 문제상 조명 장비를 넉넉히 쓰지 못하기 때문에 밤 촬영이 어려운 편이다. 특히 바다는 장비를 설치하기 더욱 어렵다”고 물가에서 보낸 시간을 회상했다. 이런 경우 비교적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촬영을 진행하고 후반작업을 통해 명암을 조절한다. 오늘날의 영화란, 특히 촬영 파트는 더더욱 후반작업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됐기에 후반작업의 가능성과 보완 지점에 맞춰 촬영 시간을 조율하는 요령을 찾아냈다. 하지만 이진근 촬영감독 안에서도 수많은 생각들이 태어나고 뒤섞이길 반복한다. “촬영 현장에서의 물리적 한계와 일정 조율을 생각하면 어떤 방식이 효율적인지 쉽게 판단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든다. 밤이란 원래 어두운 것 아닌가. 어두운 것을 어둡게 찍는 것이 맞지 않나. 달이 뜨는 날에는 월광에 맞춰 윤곽을 드러내고, 그런 게 없는 날이라면 프랙티컬 라이트나 가로등 정도로 밝기를 조정하는 게 진짜 우리가 눈으로 본 밤 풍경과 같지 않을까. 혼자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리얼리즘의 결을 본능적으로 따르게 되어서일까. 그는 습관처럼 하루에도 여러 번 하늘을 올려다본다. 빛을 감지하기 위해서다. 이 계절, 이 시간 즈음에는 빛이 이 정도구나, 몸소 체감한 빅데이터를 매일 저장한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하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체크했다. 매직아워나 마젠타 컬러의 하늘을 볼 때면 바로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다. 혹시라도 나중에 촬영을 하게 되면 채광과 날씨, 빛의 질감과 하늘 상태 등을 가늠하기 위해서다.”
흘러가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기
2024년 9월 개봉한 <장손>을 촬영하며 이진근 감독은 실존하는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작품 흐름과 같은 계절, 같은 시간대에 촬영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이제 그는 안다. “할리우드에는 작품과 똑같은 시간에 촬영하는 것을 고집하는 촬영감독들도 있다. 오직 자연광으로만 찍는 촬영감독도 많고. 나는 이들의 욕망이 왜 중요한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직접 찍는 게 왜 중요한지 <장손>을 통해 깨달았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했던 모든 팀원이 그랬다. 시나리오 속 장면이 새벽이면 진짜 새벽에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모여 촬영하고, 택시 안으로 들어오는 빛을 담기 위해서는 그 빛이 만들어지는 시간대와 장소를 찾았다. 이 모든 과정과 경험이 내게 많은 것을 남겼다. 극 중에서 성진(강승호)이 할아버지(우상전)와 산소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사라진 줄 알았던 가족들이 안도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뒤에 성진과 아버지(오만석)가 대화하는 장면 사이에 땅거미가 지는 하늘이 인서트로 들어간다. 그 하늘을 찍을 때 바로 그 느낌을 받았다. 오직 그 순간에만 찍을 수 있는 것을 잡아내는 것.”
대가족이 모였다 흩어지는 집에서 여름, 가을, 겨울 세 계절을 보여주는 <장손>은 촬영으로 시간의 흐름과 가족간의 변화를 말한다. 사실은 카메라가 관객에게 묵음으로 말을 걸고 있던 것이다. “<장손>은 처음부터 촬영 컨셉이 명확한 작품이었다. 계절별로 카메라의 움직임과 개입 정도가 정해져 있었다. 연출자의 의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가족들이 화목하고 푸릇푸릇한, 생동성 있는 모습을 많이 드러낸다. 그래서 카메라도 돌리나 팬틸트를 활용하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말녀 할머니(손숙)가 돌아가신 가을에는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카메라도 서정적으로 움직였다. 인물이 이동할 때에도 부드럽게 따라가거나 돌리 위주의 숏을 활용했다. 모든 게 얼어붙는 겨울에는 갈등이 극에 달하고 모든 것이 모노톤으로 바뀐다. 공간도 차갑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과감히 카메라의 움직임을 빼버렸다. 겨울 구간을 자세히 보면 카메라가 한번도 움직이지 않다가 맨 마지막 시퀀스에서 조용히 흘러간다. 곧 봄이 올 텐데 겨울에 얼어붙은 것들은 과연 녹을까. 가족들의 갈등도 함께 녹아 사라질까. 그 질문이 떠오를 즈음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인다.”
관객에게 카메라가 느껴지지 않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극장과 비디오테이프를 사랑했던 이진근 촬영감독이 20대 중반 늦깎이 영화과 학도가 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촬영의 기쁨과 슬픔을 알게 됐다. 프레임의 세계를 신나게 유영하면서 그는 조용히 자기만의 지침을 세워나갔다.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이 말했다. ‘영화는 감독의 영화다.’ 작품은 결국 연출자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촬영감독의 몫이란 그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잘 구현해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가끔은 영화의 성격이나 스타일과 다르게 촬영이 튀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촬영만 스타일리시하게 돋보이는. 그것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촬영이 부각되지 않더라도 작품의 본질적인 정서와 성격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싶다. 관객에게 카메라가 느껴지지 않게, 보이지 않게. 이 지점을 늘 잊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촬영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다. 예상과 계획을 비껴가는 게 현장이다. “막상 촬영장에 갔을 때 상상했던 공간과 다를 때가 많다. 스토리보드상 꼼꼼히 점검했지만 실제로 진행이 거의 불가능할 때도 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촬영감독은 빠르게 임기응변과 순발력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의사소통을 통해 다양한 대안과 해결책을 찾아내야 하는 게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촬영감독을 촬영으로 즐겁게 하는 작품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의 첫마디는 “너무 많아서 문제(웃음)”였다. “가장 최근에는 그레이그 프레이저 촬영감독이 작업한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너무 좋았다. 누가 찍은 줄 모르고 봤는데 촬영이 너무나 돋보여서 찾아보니 역시 그였다. 또 김우형 촬영감독의 <리틀 드러머 걸>도 무척 좋아한다. 아름답게 꾸려진 이미지를 볼 때 눈물나게 행복해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기차의 꿈>도 좋았다. 아도우푸 벨로주 촬영감독의 힘이 느껴진다. 영화를 보다 보면 촬영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보려고 해도 자꾸만 그쪽에 몰입하게 된다.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저 장면 어떻게 찍었지?’다. (웃음) 진짜 영화에만 몰입하고 싶은데.”
ITEM
필름 카메라. 노출계로 빛을 확인하고 수치를 통해 화면을 조절하는 게 촬영의 기본이다. 어떻게 찍힐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필름 카메라는 수치로 감각하는 훈련을 하게 한다. 눈의 근육을 키우는 일에 가깝다. 디지털로만 작업하다 보면 이 기술을 잃어버릴까 가끔 걱정된다. 물론 필름 사진의 질감과 정서도 좋다.
FILMOGRAPHY
2024 <아침바다 갈매기는>
2023 <장손>
2022 <이어지는 땅> <말이야 바른 말이지>
2021 <모퉁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