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고 8분10초 동안 보이는 롱테이크 첫컷과 마주한 순간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과 매혹적인 빛에 사로잡혔다. 유영하듯 움직이는 카메라는 관찰자 위치에서 인물들을 바라보는 줄 알았다. 나의 착시였다. 나는 ‘아름답다’는 감각에 붙들린 채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횡적 이동에 머물지 않고 인물들을 향해 점진적으로 다가선다.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행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시선을 안내한다. 굳어가는 공간 안에서 자유롭고 아름답게 움직이지만, 마지막 경고다. 공간을 벗어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함을 인물들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카메라의 몸짓으로 외친다. 당시 상하이 조계지 거리에는 이미 전기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유곽 안의 청나라 관료들은 여전히 낡은 촛불과 램프 아래 고립되어 앉아 있다.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는 카메라
8분10초의 첫컷 안에서도 카메라의 움직임은 단순하지 않다. 처음에는 공간 전체를 보여주듯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곧 카메라는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 사이로 파고든다.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다시 탁자 위 술병과 촛불로. 움직임은 대화의 내용을 따라가지 않는다. 프레임 밖에서 누군가 말을 시작한다. 프레임 안 인물들은 바라보지만 카메라는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말하지 않는 사람, 침묵하는 사람, 빛이 적게 닿는 테이블 너머 서 있는 유녀들에게 머문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관리들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고 말로만 떠들지만 유녀들은 계속 움직인다. 카메라는 방을 드나드는 유녀들의 움직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공간을 비춘다. 카메라는 서사가 아니라 공간의 질감을 더듬는다. 공간이 어떻게 닫혀 있는지, 어떻게 굳어가는지 감지한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지진계처럼 멀리서 일어나는 떨림을 감지하고 전달하지만 유곽 안의 인물들은 듣지 못한다. 카메라는 유곽 안의 사람들처럼 공간 안에만 상주한다. 한번도 건물 밖을 나가지 않는다. 흔한 외경 인서트 하나 없다. 카메라는 안에 있는 인물들과 함께 있다가 어느 한 순간을 잘라내어 보여주거나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다 맞이한다. 방 안에만 있던 카메라가 영화 안에서 단 두번 방문을 넘어가 방 안을 들여다본다. 첫 번째 방문을 넘어선 카메라는 자신에게 소홀한 왕 대인(양조위)에게 소홍(하다 미치코)이 서운함을 토로하는 장면이다. 두 번째 방문을 넘어서 있는 카메라는 취봉(이가흔)의 계약이 무효가 되는 날이다. 그녀의 계약서가 파기되는 날 카메라는 방문 밖에서 상황을 지켜본다. 긴 롱테이크, 컷이 바뀔 때마다 카메라는 아주 조금씩 인물들 가까이로 다가선다. 서사는 인물에게 들어가지 않지만 카메라는 친절하고 미묘하게 인물들에게 다가가 감정을 유도한다. 감정을 유도하는 카메라는 횡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루오 대인의 도움으로 자유의 몸이 된 취봉을 카메라가 비출 때는 이전보다 카메라가 좀더 높은 레벨로 올라가 신 사이 종적 움직임을 보여준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카메라는 더 과감히 횡적 움직임을 멈추고 화면 안 인물들에게 들어간다. 왕 대인이 소홍의 빚을 갚아주고 두 사람이 마주한 순간 카메라는 이전보다 더 인물들 가까이 다가서 있다. 사실 카메라는 이전부터 영화의 두 번째 컷부터 인물에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소홍이 첫 등장하는 컷 중간 카메라는 서사에 들키지 않으려는 듯 아주 조심스럽게 화면 안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후반 왕 대인이 홍 대인과 유곽 이모로부터 소홍의 소식을 듣는 순간 횡적으로 움직이던 카메라가 멈추고 왕 대인에게 트랙인 단독을 잡는다. 다른 컷에서는 카메라가 트랙아웃으로 빠지기도 한다. 취봉이 빚을 갚고 후앙 이모를 떠난다고 말하는 순간 카메라도 함께 공간을 벗어나려는 듯 뒤로 빠진다. 그러다 루오 대인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면 카메라는 다시 두 사람에게 들어간다.
이 영화는 전체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거나 극적 사건으로 관객을 서사 안으로 강제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대신 영화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카메라가 인물들에게 다가서며, 관객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인다. <비정성시>에 멀리 떨어져 다가서지 않고 지켜보던 카메라가 앞선 역사의 과거로 가서는 움직이고 인물들에게 다가선다. <해상화> 안에 놓인 카메라는 시간의 문제가 아닌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거리감과 움직임을 달리한다. 역사의 비극을 목격하는 것과 역사의 비극 안에 함께 갇히는 것. 전자가 <비정성시>라면, 후자가 <해상화>다.
영화 <해상화>는 전체 38컷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메라의 위치로 판단하는 숏은 37컷이다. 매컷 카메라가 움직이지만, 움직임의 방향과 방식은 다 다르다. 좌우 트래킹, 패닝, 패닝 트래킹 등 같아 보이지만, 각기 다른 속도와 운동감으로 표현된다. 영화의 카메라를 단순히 유려하고 유영하는 카메라라고만 본다면, 영화의 서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카메라의 다양한 움직임은 밖의 세계와 실내 공간 안의 세계를 분리하고, 동시에 폐쇄된 실내 안의 세계가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제각각 다른 운동성을 통해 균열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시대를 품으며 시대 안의 불안을 담아낸다. 보통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을 포착하거나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해상화>의 카메라는 목적 없이 움직인다. 카메라가 움직여야 하는 동기가 없다. 아니, 동기를 찾으려 일부러 애쓰지 않는다.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술을 마시는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카메라는 대화의 내용보다는 머무는 폐쇄적인 공간의 질감과 명암을 훑는다. 이는 곧 무너져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 근원을 더듬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시종일관 실내에서만 머무는 카메라는 밖의 세계를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는 존재다.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몰락의 전조를 감지한다. 카메라의 움직임 자체가 하나의 ‘시간의 흐름’이 되어, 인물들이 시대라는 감옥 안에 갇혀 서서히 풍화되어가는 과정 자체를 담아낸다. 동시에 카메라의 움직임은 파편적 서사를 접착제처럼 묶어주며, 이야기 안으로 안내해주는 가이드로서 작동한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사건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불안과 몰락의 발생 과정 자체를 담는 그릇으로 작동한다. 카메라의 이동은 한정적이고 느리지만, 장면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파동은 매우 크다. 이는 바로 ‘발생 과정’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힘이다.
무감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카메라는 유려하게 움직이며 유곽의 탐미적인 빛을 훑지만, 빛은 곧 꺼져가는 국운의 마지막 잔광이다. 영화의 빛은 아름다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아니라 무능과 무력의 추함이다. 빛은 시대를 감각하지 못하는 무감함을 드러낸다. 유곽을 밝히는 촛불과 램프의 흔들리는 불빛은 무감함을 균열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역설적인 빛이다. 패닝과 측면 트래킹 시 공간을 밝히는 램프의 불빛이 가로질러 등장한다. 카메라의 움직임에 따라 화면 모서리에 램프가 놓이고 불빛이 프레임 안을 가로지르며 들어온다. 램프의 플레어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프레임 밖 경계 너머에 놓였다가 다시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 가늘고 길게 들어왔다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플레어는 닫힌 실내 공간을 흐트러뜨린다. 균열의 빛은 늙은 관료 홍 대인이 자신보다 젊은 왕 대인과 또래 관료들, 유녀들 사이를 중재할 때 더 자주 등장한다. 영화는 카메라보다 색온도가 훨씬 낮은 촛불과 램프를 주광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촛불은 프레임 안에 중심으로 놓아도 보조 광원으로서 색을 담당할 뿐, 주광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촛불은 색온도가 훨씬 낮기 때문에 영화가 3200K 필름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극영화보다 더 붉게 보인다. 게다가 촛불이나 램프 안의 빛들은 인물의 움직임이나 광원과의 거리에 따라 빛의 색이 더 많이 달라진다. 일반적이지 않은 낮은 색온도, 흔들리는 불빛, 거리에 따른 색의 변화는 영화의 카메라 움직임처럼 시대를 읽어내고 감지하는 빛으로 공간을 채운다.
영화가 시작된 후 1시간 동안 모든 신이 다 밤이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레드 옐로 빛을 피하려는 듯 창밖에서 들어오는 화이트 블루의 빛들은 멀리 벽에 머물거나 아주 가끔 인물의 한쪽 부분에만 살짝 닿는다. 처음으로 낮인 장면은 취봉이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몸값을 흥정할 때다. 창의 빛이 처음으로 낮 빛으로 바뀌었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다. 유곽을 찾는 사람들은 낮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중국 전통 옷을 입고 있지만 달러로 거래를 하고, 영국 조계지 안에 있으면서 금지된 유곽을 이용하는 청나라 말기 관료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영화 안에 두번 언급된다. 첫 번째는 타이틀시퀀스가 끝나자 첫 자막으로 19세기 후반이라는 자막으로, 두 번째는 취봉의 계약서가 파기되는 날, 계약서를 읽어갈 때 등장한다. 계약서가 낭독되는 순간, 구체적인 시간 하나를 세상 밖으로 밀어올린다.
1884년 10월6일. 이 시간은 청나라 역사에서 중요하다. 1884년은 청불전쟁의 영향으로 대만이 프랑스에 침공당한 해이다. 청나라는 이미 영국에 홍콩과 상하이 등 6개 항을 강제 개방당했고, 러시아에는 연해주를 빼앗겼다. 1884년은 다시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받은 해이다. 게다가 같은 해 10월 프랑스 군대가 대만 북부를 공격했다. 청나라 관료들이 유곽 안에서 주색에 빠져 있는 동안 대만 민중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 군대와 싸워 어렵게 물리쳤다. 몇 안되는 청나라가 전쟁에서 승리를 이룬 순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백성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청나라의 관료들은 유곽의 유녀를 구출하기 위해 더 분주하다. 관료들은 본래 유곽 출입이 금지되었다. 조계지 안의 유곽 출입은 그들에게 금기에서 벗어난 ‘낭만적 해방구’ 역할이었다. 이 당시 청나라 관료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밤 유곽에 모여 한갓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고 유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과 선물 공세를 편다. 우유부단해 보이는 왕 대인은 두 유녀 사이에서 갈등하고, 루오 대인은 유녀를 사기 위해 애쓴다. 젊은 관리 주 대인도 쌍옥에게 빠져 큰돈을 치르며 그녀를 사는 데 더 집중한다. 홍 대인은 술자리를 주도하며 유녀들 사이를, 다른 대인과 유녀들 사이의 사소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해결해준다. 나라는 외세의 침략으로 위태롭고, 제대로 힘 한번 쓰지 못하면서 전쟁에서도 번번이 패하고 있지만, 청나라를 관리하는 관료들은 나라가 아닌 유곽의 정치 안에서 그들 사이를 오가며 정치를 버리고 있다. 이 유녀들 사이에서 자신의 모든 감정과 관리로서의 능력을 쏟아붓고 있다.
전쟁 시기에 오랜 관리의 경험을 국가간의 일이 아닌, 젊은 남녀와 유녀간의 감정 싸움에 활용하고 있는 청나라 말기 풍경을, 영화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빛으로 드러내고 있다. 영화의 실내 공간에서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고 낮의 빛이 가장 밝게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거의 마지막, 가장 젊은 주 대인과 쌍옥과의 관계를 홍 대인이 조정하는 장면이다. 이 나라의 미래일 수 있는 가장 젊은 관료가 유곽 안에 앉아 있다. 이때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고 외부의 화이트 빛이 들어온다. 하지만 젊은 관료는 자신의 사랑마저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삼촌과 홍 대인의 조율에 맡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다시 소홍이 등장한다. 유곽의 방의 창은 닫혀 있고, 시간도 밤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관료가 소홍과 마주하고 있고, 영화 전체 유곽 안을 채우던 레드 옐로의 촛불과 램프의 빛은 이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그 자리에서 더 짙게 흔들리며 빛을 발하고 있다.
<해상화>의 카메라와 빛은 사건이나 감정의 표면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한 시대를 통째로 끌어안고, 그 안에서 불안과 몰락이 발생해가는 과정 그 자체를 담아낸다. 이때 카메라는 이미 완성된 표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이 생성되기 이전의 조건과 강도를 따라 움직이며 이미지의 발생을 시간 속에서 드러낸다. 그래서 카메라는 서사적 필연 없이 움직인다. 인물들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이 공간 밖에서 일어나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기 때문에 움직인다. 카메라는 유곽 안에 있지만, 밖에서 일어나는 청나라의 몰락, 시대의 격변을 감지한다. 실내에서만 머무는 카메라는 역설적으로 밖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고 시대의 현실을 공간 안으로 불러들인다. <해상화>에서 우리가 감각해야 할 것은 유영하듯 움직이는 카메라의 횡적 움직임이나 유곽 안을 밝히는 아름다운 빛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감각하지 못하는- 아니, 외면하는- 무능과 무감함이다. 카메라는 그 무감함을 드러내기 위해 움직이고 빛을 끌어들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