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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스크린의 뒷면 - 영화 속 스크린의 잠재적 가능세계들

<하나 그리고 둘>

2000년대를 여는 에드워드 양의 첫 영화이자 그의 유작으로 남은 <하나 그리고 둘>에서 프레임에 붙잡힌 인물들은 비슷한 증상을 공유한다. 그것은 기억상실이다. NJ는 무엇을 찾기 위해 집에 들어왔는지 잊어버린다. 그의 딸 팅팅은 버려야 할 쓰레기를 발코니에 두고 그만 잊어버린다. 피로연에 참석한 친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NJ와 셰리의 재회를 목격하고는 내려온 목적을 잊어버린다. 어지럽게 뒤얽힌 삶의 회로 속에서 그들은 자꾸만 기억을 잃는다. <하나 그리고 둘>에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삶의 조건이 부서지는 위태로운 신호이기 때문이다.

NJ와 셰리가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며 도쿄를 여행하고 있을 때, 타이베이에 있는 팅팅은 친구의 남자 친구인 패티와 첫 데이트를 한다. 에드워드 양은 서로 다른 도시에서 벌어지는 두 장면을 평행편집으로 교차한다. 기억상실로 채워진 <하나 그리고 둘>에서 이 순간은 이례적인 기억의 재구성과 반복을 형성한다. 이때 팅팅과 영화를 보고 나온 패티는 한 가지 특별한 이야기를 건넨다. “영화가 생겨난 이후로 인간의 수명이 세배로 늘었대. 영화를 통해 삶을 두배 더 경험한다는 거지.” NJ의 재회와 팅팅의 만남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들은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도쿄에서 돌아온 NJ는 셰리를 기억하는 대신 컵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린다. 과거는 지워지고 기억상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다만 <하나 그리고 둘>은 패티가 건네준 말처럼 두 사람의 실패한 사랑을 교차하며 평행편집의 계열 위에 또 다른 가능한 삶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화면에는 재회에 실패하는 NJ의 시간과 첫사랑에 실패하는 팅팅의 시간이라는 두 가지 실패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오가는 세 번째 영화의 시간이 있다. 영화는 그 실패를 반복하지만 또한 실패를 통과한 세 번째 삶의 시간을 조직한다. 이 시간 속에서 각각의 세계는 겹치게 되고 한 가지 시제가 갖는 위상은 분명치 않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불명확한 위상을 비추는 또 다른 영화의 시간이 있다. <하나 그리고 둘>과 1년의 시차를 두고 완성된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는 독특한 회고의 목소리로 영화를 시작한다. “여자는 하오하오와 헤어졌다. 그러나 그는 늘 그녀를 쫓아다녔다. 여자에게 전화하고 돌아오도록 애원했다. 여자는 도망갈 수 없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항상 돌아왔다. 이 일은 10년 전인 2001년의 일이다. 세계는 21세기를 맞이했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하고 있었다.” 도입부의 화면 속에서 비키는 다리 위의 긴 터널을 통과하며 이따금 뒤를 돌아본다. 비키는 미래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기 자신을 ‘그녀’로 부른다. 이제 막 스크린에 펼쳐지기 시작한 현재는 이미 그토록 낯선 것이 되어 있다. 뒤엉키고 분해된 기억과 시간을 조직하며 에드워드 양과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21세기 영화에 관한 한 가지 실마리를 전해준다. 영화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장력 아래 놓여 있으면서 미래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뒤를 돌아보면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향하는 비키의 매혹적인 몸짓은 21세기 영화의 위치를 규정하는 알레고리적 신체가 된다. 영화의 비키의 발걸음을 따라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에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아리타는 자신의 몸을 철사로 감아 검지를 바깥으로 뻗는 손짓을 남긴다. 언젠가 아리타는 동료인 니무라에게 그 손짓이 앞으로 ‘가라’는 신호라고 말해준 바 있다. 철사로 묶어 자살한 아리타의 신체는 역설적이게도 앞으로 나아가라는 신호에 주박되어 있다. 정해진 시간에 열차가 도착하는 것처럼 영화는 한번 시작하고 나면 뒤로 돌아갈 수 없이 끝에 다다라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우회하고 탈선하며 다른 방향을 돌아보는 가능성을 또한 간직하고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가 화면 외부에 펼쳐진 폭력적인 세계와 접합해 있고 원리적으로 거기서 도망칠 수 없는 매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한 기반 뒤에 따라오는 21세기 영화란 그 원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매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의 영화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으로 펼쳐진 세계의 매혹이 파열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21세기의 영화는 선명한 소명에 몰두하는 고전주의적 영웅과 반영웅의 영화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아니다. 도착지과 목적의식을 잃어버린 자들이 무기력한 자세로 뒤를 돌아보는 영화도 아니다. <밀레니엄 맘보>의 도입부를 묘사하며 말했듯이 21세기 영화는 주어진 자세를 비틀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따금 뒤를 돌아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영화는 서로 다른 체계로부터 오는 정반대의 명령에 붙잡혀 있다.

세계에 철저히 몰입하는 동시에 세계의 의미와 좌표를 되짚기 위해 영화가 고안한 것은 스크린 위에 펼쳐진 영화적 세계 내부에 이미지를 촬영하고 재생하는 또 다른 형태의 스크린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하나 그리고 둘>과 <밀레니엄 맘보>는 영화관의 스크린, 텔레비전과 CCTV 화면, 카메라와 촬영된 사진 이미지, 컴퓨터 모니터로 화면 내부를 빼곡히 채운 영화들이기도 하다. 21세기 영화 속 인물들은 서사의 장소를 배회하면서 그 장소들의 속성과 의미를 구성하고 되짚고 갱신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스크린의 장소에 거주한다. 영화는 마치 이면화를 그리는 것처럼 현실의 장소와 이미지의 장소를 평등한 세계의 단면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하나의 세계가 파열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복수적 세계의 범람을 불러들인다. 그 복수형의 단면은 어느덧 너무 많은 사회적 조건이 동질화된 나머지 서사 내부에선 거의 불가능해진 세계 안의 차이와 부조화를 만들어내는 기제다. 이는 내부와 외부의 공간을, 과거와 미래의 시제를, 현존하는 질서와 잠재적인 질서의 경계를 확증할 수 없는 편재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상호 교란적인 세계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돈가방을 든 도망자와 공기총을 든 추격자를 따라가는 보안관 벨은 언제나 뒤늦게 빈손으로 도착한다. 그는 이미 추격자가 다녀간 현장에 앉아 그가 지켜보던 텔레비전 모니터의 검은 화면을 바라본다. 텔레비전에 흐릿하게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보안관은 그들이 자신이 보는 것과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중얼거린다. 웨스턴의 풍경을 전유하고 있지만 이곳은 도망자와 추격자와 보안관이 같은 자리에 앉아 텔레비전에 비친 흐릿한 형체와 시각을 공유하는 불안정한 형상들의 세계다. 이 세계의 풍경에는 기준을 설정할 만한 원점과 기원이 없다. 단지 풍경이 주어져 있고, 그에 대항하며 형성되는 다면화된 얼굴과 형상이 채워진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에서 세계는 온라인 공간에 접속한 뒤 유령이 되는 인간의 얼룩으로 채워진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코스모폴리스>에서 세계는 리무진 파노라마처럼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단면과 디스플레이 모니터 위의 평면으로 분할되어 있다. 샹탈 아케르만의 <노 홈 무비>에서 카메라를 든 아케르만은 스카이프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어머니의 얼굴을 비춘다. 카메라는 실시간으로 간극과 격차가 실종된 세계의 원리를 비추지만 그 장면에서 상대방의 형상은 추상적인 픽셀의 형태로 조각나 있다. 세계는 유령의 시각으로, 이동수단의 시각으로, 프로그램과 데이터의 시각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장뤼크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에서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도, 누가 무엇을 위해 촬영했는지 파악할 수도 없이 펼쳐지는 저화질의 스마트폰, 캠코더, CCTV 영상은 허구적 세계의 위상이 파괴된 현실을 증언하면서 현실과 허구의 접점을 다시 회복하려는 절실한 자기파괴다.

<데자뷰>

스크린을 매개로 현실과 허구를 나란히 두고 그 관계를 탐색하는 자기파괴적 걸작이 바로 토니 스콧의 <데자뷰>다. 이유 모를 선박 폭파 사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는 원격 위성 장치를 토대로 지나간 과거를 모든 각도와 시점에서 다시 관측할 수 있는 스크린이 있다. 이 스크린에는 정확히 4일 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으며 지켜보는 이들이 시간을 앞으로 당기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데자뷰>에는 스크린을 매개로 4일 전의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공존하는 세계로 주어진다. 폭파 사건을 조사하는 수사관 더그는 범인에게 살해당해 현재시제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스크린으로 지켜본다.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상대방이 눈앞에 있다는 감각이 더그의 시각을 물들이기 시작하고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매혹으로 번진다. 스크린 속의 대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한다. 하지만 과거에 이미 죽어버린 대상이 눈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한다는 조건 속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낯선 경험으로 뒤바뀐다.

스크린과 현실의 이중적 시각에 충격을 가하는 사건은 영화 중반부에 벌어진다. 더그는 스크린의 범위를 벗어난 범인의 행적을 뒤쫓기 위해 4일 전의 과거가 영상으로 재생되는 고글을 쓰고 자동차에 탄다. 그는 한쪽 눈에 고글을 쓰고, 다른 눈으로 현재 시점의 범인을 추격한다. 한 시각에는 과거의 행적이, 다른 하나의 시각에는 현재 시점의 상태가 교차하며 스크린에 두 가지 시제의 영상이 충돌한다. 더그는 한쪽 눈으로 스크린에 기록된 단서에 집중하면서, 다른 눈으로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한다. 파괴된 세계는 두눈에 비치는 분열적 표상으로 순식간에 다가온다. 과거와 현재가 나뉘는 시각을 매개로 더그는 마침내 4일 전의 범인이 도착한 곳에 이른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 그곳은 파괴된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가 지켜본 ‘현실’은 그가 발 디디고 선 현실과 다르다.

영화는 하나의 거짓된 세계를 꾸며내는 기술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 또 다른 화면과 스크린이 틈입할 때마다 하나의 거짓말은 다른 하나의 거짓말과 만나게 된다. 이 조건 아래서 영화가 꾸며낸 거짓의 세계는 언제든 다른 무언가로 뒤집히거나 일관된 현실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중첩된 거짓말의 세계가 된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이 불명확한 형상의 세계에서 끝없이 미끄러지는 거짓말의 이행 과정을 다룬다. 콜걸로 일하는 아키코는 술집 창문에 비친 형상에서 택시에 비친 형상으로, 노교수의 침실 한쪽에 있는 텔레비전에 비치는 형상으로, 남자 친구인 노리아키가 발견한 성매매 광고 사진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표상이 머무는 장소를 옮긴다. 아키코는 “~인 것처럼”이라는 가정법에 사로잡힐 때마다 영화가 꾸며낸 거짓의 세계에 적합한 형상으로 프레임 내부에 거주한다. 아키코가 임시로 거주하는 이미지의 평면은 영화적 허구와 가정법의 진실이 공존하는 픽션의 절단면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서로 다른 거짓말의 집합으로 채워진 물리적 세계에서 공존 불가능한 거짓이 충돌할 때 세계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임시적인 장소를 끝없이 발명한다. 21세기의 영화는 서로 다른 화면과 서로 다른 거짓말이 품고 있는 불안을 안고, 그러나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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