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 연무장길.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팝업스토어가 들어 섰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성수동에서 시간이 멈춘 장소로 기억될 극장이 있다. 좁은 골목 안쪽에 겸손하지만 단단하게 자리 잡은 단관 극장 무비랜드다. 3층짜리 아담한 건물, 30석 규모의 상영관을 갖춘 이곳이 2025년의 끝자락, 영화관이자 카페가 되어 관객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지난 12월13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된 ‘필름 블렌딩 카페’는 동서식품의 커피 브랜드 ‘카누’와 협업해 완성된 공간이다. 카누는 커피 한잔이 단순한 음료를 넘어 삶의 여백을 만들고 내면을 응시하는 시간과 맞닿아 있음을 이야기해온 브랜드다. 짐 자무시의 영화 <커피와 담배>(2003) 속 풍경이 그러하듯, 커피가 채워진 잔과 테이블, 그리고 마주 앉은 사람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그리고 지금, 이 특별한 카페의 테이블 맞은편에는 대화 상대 대신 한편의 영화가 놓여 있다.
카누와 무비랜드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라는 테마 아래 세편의 영화를 블렌딩했다. 돌아보니 1년 열두달을 내가 누구인 채로 살아왔 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25년의 나를 이렇게 보낼 순 없다. 타인을 위해 소진되던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을 선사받아야 할 이들을 위해 <빅 피쉬>(2003), <애프터 양> (2021), 그리고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가 스크린에 걸렸다. 각기 다른 시공간, 다른 나이대와 성별, 저마다 갈등을 겪는 주인공들은 관객에게 다채로운 거울이 되어준다. 스크린 속 타인의 삶에서 나와 다른 점을 발견하는 것은 나의 고유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며, 동시에 우리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경험을 통해 인간이라는 공통의 조건을 깨닫는 여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커피 향이라는 열차를 타고 영화의 세계로, 나를 비추는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화의 길과 커피의 시간, 무비랜드에서 만난 그 교차점에서 깊은 사유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1층: 영화 한줄로 돌아보는 한해
2011년, 배우 공유가 작은 스틱 커피 상자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라 소개하던 그 광고 속 풍경이 2025년의 성수동에 재현된 듯하 다. 검은색 커피 상자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무비랜드 마당에 놓여 ‘세 상에서 가장 작은 극장’으로 변모했다. 예매 시작과 동시에 전석 매진을 기록한 까닭에 상영관에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이 남을 법도 하지만 1층을 채우는 영화 <더 테이블>(2016)의 잔잔한 오디오와 부드러운 화면 덕분에 발길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 어느 카페에 놓인 하나의 테이블을 거쳐간 사람들의 인연을 다룬 영화가 오늘의 공간과 퍽 잘어울린다.
1층을 기웃거리다 보면 티켓 부스에서 발권을 하고 있던 권지우 무비랜드 기획자가 환한 미소로 관객을 맞이한다. 벽면에는 올해의 나를 대변해주는 영화 속 대사를 골라 카누의 다양한 스틱 커피와 함께 음미하게 된다. 세편의 상영작 외에도 <라 비 앙 로즈>(2007), <고양이를 부탁해>(2001), <인사이드 르윈>(2013) 등 6편의 후보작들에서 길어올린 대사들을 홀더 형태로 간직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낙관과 희망의 해였을 수도, 누군가에게는 타인의 위로가 절실한 해였을 수도 있다. 2025년을 지나온 당신에게, 영화 속 인물들은 지금 어떤 말을 건네고 있을까.
2층: 나를 닮은 영화와 커피
외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서니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감싸안는 따스한 우드톤의 공간이 펼쳐진다. 평소 무비랜드 큐레이터들의 취향을 담은 전시 공간이자 관객들의 대기실로 쓰이는 이곳은 일주일간 ‘필름 블렌딩 카페’가 되어 그윽한 커피 향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주문 방식은 독특하다. 메뉴판을 보고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주문 표’를 작성해야 비로소 내게 맞는 커피가 도착한다. 커피의 풍미를 결정하는 것은 나의 영화 취향이다. 리얼리티와 판타지 중 무엇을 선호하는지, 영웅과 악당 중 누구에게 이입하는지, 닫힌 결말과 열린 결말 중 어디서 안도감을 느끼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과정 끝에 서버는 나를 위한 커피 한잔을 내려준다. “리얼리티 속에서 영웅적 인물이 열린 결말로 나아가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답하자, “다음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바다의 풍미”를 담았다는 카누의 ‘프라우드 오션’ 캡슐커피를 추천받았다. 살짝 피곤하지만 저녁 시간임을 고려해 디카 페인 ‘케어링 스타’를 주문했다. 라떼류의 부드러운 풍미는 판타지 러버들에게 제공된다고 하니 참고하도록 하자.
3층: 깊은 한잔의 몰입
상영관에서는 투표를 통해 선정된 영화 1편과 카누가 고른 2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송경원 <씨네21> 편집장의 추천평과 함께 영화를 전한다.
사실과 진실은 다릅니다. 때때로 영화는 각자의 사실을 조합해 진실에 이르는 마법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팀 버튼의 정수가 담긴 <빅 피쉬>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사이에 피어나는 환상의 경로를 따라갑니다. 어린아이에게 들려줄 법한 동화(童 話)를 넘어 마음을 움직이는 동화(動畫)로 거듭나는, 어른 동화입니다.
기록은 어떻게 기억으로 번져나갈까요.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비범한 SF영화 <애프터 양>은 안드로이드가 가족을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있는 통로를 제공합니다. 찍고 기억하여 마침내 사랑에 도달하는 여정 속에서 우리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감독 요아킴 트리에르 | 2021년
사랑은 늘 불완전하고 불안정합니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잘해보려 할수록 상황은 엉망이 될 때가 있지요. 그 순간, 당신의 있는 그대로를, 최악의 상황을 인정하고 껴안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바닥을 친 감정 앞에 울어본 이들에게 보내는 자아 탐색의 시와 같은 영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