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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마가 시대, 워너브러더스 영화는 지금
김소미 2025-11-07

봉준호에서 폴 토머스 앤더슨까지, 5편의 영화로 읽는 2025년 미국의 초상

2025년, 워너브러더스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대담한 스튜디오가 되었다. 창립 100주년을 넘긴 이 거대 스튜디오는 트럼프 재집권이라는 격동의 시대에 놀라운 선택을 했다. 다른 스튜디오들이 DEI(다양성·평등·포용성) 정책을 후퇴시키고 ‘모든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안전한 콘텐츠에 집중하는 동안, 워너브러더스는 정치적 메시지가 직간접적으로 빛나는 영화들을 연이어 개봉했다. <미키 17><씨너스: 죄인들><슈퍼맨><웨폰><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이 5편의 영화는 저마다 다른 장르와 톤을 가졌지만, 모두 지금 미국이라는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100주년 이후, 새로운 전략의 시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2023년 칸영화제에서 열린 워너브러더스 100주년 기념 파티는 할리우드 권력의 재각인을 위한 자리였다. 세계적 스타들과 영화산업 최고경영자들이 모인 화려한 행사 뒤에는 CEO 데이비드 재슬러브의 새로운 비전이 있었다. 클래식 할리우드 시절 워너브러더스를 특징지었던 사회비판적 사실주의 영화의 전통을 되살리겠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레거시 브랜딩이 아니라, 마가 시대를 정면 돌파하는 전략이었다. 일례로 올해 워너브러더스가 내놓은 영화 중 독보적인 비평적 찬사를 얻어낸 폴 토머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1억3천만달러 이상의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했고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에 의하면 어마어마한 마케팅 비용까지 합해 “약 1억달러의 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워너브러더스는 이를 실패로 보지 않는다. OTT 플랫폼으로 돌아선 관객들이 극장가에 더 이상 ‘진짜 영화’가 나오지 않는다고 비판할 때 워너 경영진이 가리킨 몇몇 걸출한 영화들은 결과적으로 재능 있고 시대와 불화하고자 하는 창작자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이 될 것이다. <블랙팬서>와 <크리드>로 상업성과 예술성을 모두 증명한 라이언 쿠글러가 <씨너스: 죄인들>을 워너에서 만들기로 한 선택도 같은 맥락에서 회자된다. 워너의 이런 판단은 스튜디오의 정치적 결단 이전에 지극히 경영적인 전략으로, 크리스토퍼 놀런이 <테넷>배급 논란 이후 워너를 떠나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오펜하이머>로 성공한 교훈을 되새긴 결과다(2020년 12월, 워너브러더스는 놀런을 포함한 감독들과 사전 협의 없이 2021년 개봉예정인 모든 영화를 극장과 에 동시 개봉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자구책이었지만 전통적인 홀드백- 극장 독점 개봉 기간- 을 무시한 선언에 놀런은 “최고의 스튜디오가 하룻밤 사이 최악의 스트리밍서비스임을 깨달았다”라고 비난한 후 18년간 이어온 워너와의 관계를 끝냈다).

트럼프 재집권기 1기 영화들과 무엇이 달라졌나

<미키17>

2017년 트럼프 1기 행정부 초기는 할리우드가 격렬한 ‘저항의 시대’로 돌입한 전환점이었다. 2017년 1월 골든글로브에서 메릴 스트리프는 세실 B. 데밀 평생공로상 수상 연설을 통해 트럼프가 장애인 기자를 조롱한 행동을 비판하며 “권력자가 타인을 괴롭히면 우리 모두가 패배한다”고 선언하고 할리우드는 이미 “외부인과 외국인으로 가득하다”며 반이민 정책을 비판했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 워너브러더스는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지금과 같은 상업적·비평적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워너는 2017년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스튜디오 역사상 두 번째로 50억달러를 돌파했는데, 패티 젱킨스 감독의 <원더우먼>(8억2170만달러)이 여성감독 실사영화 중 최고 흥행작이 되었고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5억2500만달러)와 (6억9420만달러)가 뒤를 이었다. 특히 <원더우먼>은 트럼프에 대한 응답으로 재활성화된 페미니즘 물결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리버럴 할리우드의 지지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지명에는 실패했지만 워너는 이례적으로 여성 슈퍼히어로영화를 오스카 작품상 후보로 밀어붙이는 공격적인 캠페인도 펼쳤다. 2017년 워너의 성공은 저항의 시대에 할리우드가 다양성과 여성 서사를 옹호하는 전략으로 흥행 공식을 재정립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였다.

트럼프 취임과 함께 등장해 마가 시대를 향한 할리우드의 응답을 상징한 또 다른 두 작품은 <문라이트>와 <쓰리 빌보드>였다. 배리 젱킨스 감독의 <문라이트>는 흑인이자 성소수자인 주인공의 삶을 통해 트럼프 시대 미국의 보수주의가 강화하는 이중적 소외를 우회적으로 지시한 영화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는 딸을 잃은 어머니가 경찰의 무능을 규탄하며 빌보드를 세우는 이야기로, 트럼프 취임과 하비 와인스타인 스캔들을 거치며 ‘분노’가 문화적 화두로 떠오른 2017년 미국을 알레고리로 포착했다. 두 영화 모두 트럼프 시대의 균열을 직접 호명하기보다는 거리 두기를 통해 접근했다는 점에서, 이후 2기 시대 할리우드영화들이 지닌 직접적이고 전투적인 정치성과 차이를 보인다.

2025년의 영화들은 다르다. 더 직접적이고, 더 급진적이며, 덜 회피적이다. <미키 17>공개 후 미국 언론의 가장 뜨거운 반응은 트럼프에 관한 직접적 패러디의 여부였고, <씨너스: 죄인들>은 백인우월주의를 장르 표피 아래서 사실상 정면으로 공격하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기성세대의 실패한 혁명을 자조하며 권위주의를 폭로한다. 올해 워너브러더스가 앞장서 내놓은 영화들은 할리우드가 더 이상 중립을 가장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이는 안전한 선택이 도덕적 파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이상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도 내포하고 있다. <씨너스: 죄인들>은 그에 반응하듯 프랜차이즈급 흥행을 기록했고, <슈퍼맨>은 슈퍼맨 단독 영화로 미국 내 최고 기록을 남겼다.

키워드로 보는 마가 시대 워너 영화 5편

<미키 17> 일회용 인간의 우화

마크 러펄로가 연기한 악당 케네스 마샬은 일론 머스크와 도널드 트럼프의 명백한 혼합이며, 빨간 모자를 쓴 그의 추종자들은 마가 운동의 노골적 패러디다. 영화의 핵심인 ‘휴먼 프린팅’ 기술은 노동자를 끝없이 일회용으로 취급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잔인한 비유로 내다꽂힌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첫 할리우드영화 <미키 17>은 트럼프 시대를 향한 풍자와 계급 비판을 넘어선다. 영화는 식민지화의 폭력과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체계적 학대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 정치적 메시지를 빼면 영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이 <미키 17>이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기대만큼의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봉준호의 필모그래피에서 <설국열차>와 <기생충>을 잇는 계급 3부작의 완성이자, 가장 직설적인 정치 선언이다.

<씨너스: 죄인들> 흑인 문화의 저항, 축제, 그리고 승리

2025년 미국 박스오피스 시장의 첫 번째 진정한 영화적 거물을 꼽는다면 <씨너스: 죄인들>에 금관을 씌워야 할 것 같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1930년대 남부를 배경으로 뱀파이어 장르와 인종적 폭력의 역사를 교차시켰다. 영화는 동화(assimilation)를 해방으로 포장하는 백인우월주의의 거짓말을 폭로한다. 로드하우스 블루스와 KKK, 이민자와 흡혈귀라는 다층적 상징을 통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슬로건이 실은 누군가의 정체성을 지우는 폭력임을 은유한다. 70mm 아이맥스로 확장된 이 영화는 쿠글러가 앞서 <블랙팬서>에서 제기했던 질문- 흑인의 자유와 정체성- 을 시대의 조류 앞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밀어붙인 작품 이다.

<슈퍼맨> 이민자 영웅의 귀환

제임스 건의 <슈퍼맨>에 이르러 부각되기를, 슈퍼맨은 캔자스에 떨어진 외계인, 즉 이민자다. 영화는 미국의 다양성과 기본적 친절함을 상징하는 인물로 슈퍼맨의 정체성을 선명히 조각함으로써 당대 미국의 배타적 애국주의에 맞선다. 당면한 가자 전쟁을 연상케 하는 상황도 선명하다. 올해 <슈퍼맨>의 흥행과 동시에 마가 지지층과 보수 매체인 <폭스뉴스>가 ‘슈퍼각성’ (Superwoke)이라는 희화화된 프레임을 씌우며 영화를 공격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을 슈퍼맨으로 그린 밈을 백악관 공식 SNS에 공유하며 대립을 부추겼다. 워너브러더스가 구축한 새 DC 유니버스가 사회적 다양성과 연대 메시지를 내세워 전면전을 표방했다. 아웃사이더를 향한 제임스 건의 일관된 애정이 시대의 긴급한 요구와 만났다는 점에서 호감을 표하는 평자들의 한편에서 전능한 개인의 해결사를 불러내는 초능력물의 태생적 보수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공존한다.

<웨폰>과 호러의 정치학

<웨폰>은 호러 장르가 정치적 불안을 어떻게 담아내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잭 크레거 감독은 공포와 서스펜스를 통해 마가 시대의 편집증과 폭력성을 시각화한다. 호러는 언제나 시대의 공포를 은유해왔다. 관객은 스릴을 즐기면서 동시에 시대의 불안을 체감한다. 이는 직설적 정치영화가 달성하기 어려운 정서적 파급력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냉전시대의 외계인 침공 영화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했듯, <웨폰>은 내부의 적에 대한 공포, 이웃이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다는 마가 시대의 피해의식을 포착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속 최신의 혁명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세계는 경찰과 군대가 힘을 합친 국가 체제를 암시하며 그 안에서 게릴라 반란군 프렌치 75가 독재에 맞서 싸운다. 비껴간 총알에 살아난 록조는 앞서 <미키 17>의 케네스 마샬이 간신히 총알을 피한 순간에 이어 또 한번 트럼프의 유세장 피습 사건도 연상시킨다. 한국 관객보다 미국 관객에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반란법 발동을 시사하며 군 투입을 대통령 권한으로 정당화한 트럼프 행정부의 움직임에 대한 예언적 염려로 읽힐 것이다. 2025년 현재, 트럼프는 의회 승인 없이 연방군을 배치해 반란, 폭동, 연방법 집행 방해 등을 진압할 광범위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반란법을 공개적으로 검토 중이며 이미 불법적인 군 배치 후 법원에 제지당하는 수순을 이어가고 있다. 이 가운데 <원 배틀 애프 터 어나더>는 “급진좌파들의 치명적인 이민세관단속국(ICE) 공격 이후 개봉한 급좌 영화”(보수 성향의 엔터테인먼트 뉴스 사이트, <할리우 드 인 토토>)로 수식되기에 이르렀다.

마가 시대, 할리우드는 선택해야 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좌파 혁명 영화로 읽는 것은 물론 오독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는 혁명을 미화하지 않는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연기한 밥 퍼거슨은 대마초에 중독된 무력한 ‘전직’ 혁명가이고, 일면 도취적인 프렌치 75의 혁명은- 그로부터 생성되는 영화적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급진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에 관한 감독의 회의를 드러낸다. 배우 테야나 테일러가 수식한 대로 폴 토머스 앤더슨은 어트랙션 영화의 쾌감 속에서 “현대 정치가 커다란 양탄자 아래 하나로 쓸어담는 것들을 지적”한다. 트럼프 재집권 이후 할리우드와 예술가들이 염려하는 힘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하나의 도상이 아니라 마가를 움직이는 집단적 정동과 그것이 구축하고자 하는 새로운 질서 이다.

워너브러더스는 2025년 <마인크래프트 무비><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F1 더 무비>같은 상업영화로도 큰 수익을 올렸다. 이런 흥행작들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같은 야심찬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만든 셈이다. 이는 단순히 상업성을 지닌 사회파 리얼리즘 영화의 전통을 되찾으려는 워너만의 욕망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떠오르는 전범은 테런스 맬릭이 파라마운트를 위해 <천국의 나날들>을 만들 때다. 파라마운트가 맬릭을 설득한 한마디는 이렇게 회자된다. “1달러도 벌지 못해도 상관없다. 우리는 그저 당신이 파라마운트에 자신의 영화를 남기기를 바란다.” 스트리밍서비스와 AI, 오스카를 물들이는 국제 영화들의 강세 앞에서 할리우드 전통 스튜디오는 영광의 복원을 꿈꾼다. <미키 17><씨너스: 죄인들><슈퍼맨><웨폰><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차별화된 정체성을 위한 전략으로 워너브러더스가 택한 길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대담하고 포용적이며 위험을 감수하는 스토리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 무장한 상업영화로 벌어들인 수익을 작가들에게 재투자해 필름메이커들의 목적지로서 스튜디오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 2025년은 각성한 워너브러더스의 비전이 빨간 모자의 구호보다도 더 붉은 장밋빛으로 물든 한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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