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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대리만족, 의미심장, <어쩔수가 없다> 배우 손예진
정재현 2025-10-03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손예진이 인터뷰 도중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현실’이었다. 그사이 결혼과 출산을 경험한 영화 바깥의 현실이 영화 속 현실을 채비하며 살림을 꾸리던 미리에게 현실적으로 녹아들었다는 요지였다. 놀랄 일은 아니다. 현실은 시대와 불가분의 관계고, 손예진은 늘 시대에 발맞춰온 배우니까. 손예진이 “사랑하다 아파서 죽고, 예쁘게 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데뷔 초창기. 그는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등의 작품을 통해 ‘멜로 퀸’으로 자리했다. 한국 멜로영화의 황금기였던 동시에 한정적 수식어 이상의 역량을 지닌 젊은 여성배우에게 청순함과 가련함을 강요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손예진은 그 안에서도 돌파구를 찾아냈다. “주어진 시나리오 중에 고를 수 있는 최선”을 택하며 “다양한 연기”를 꿈꿨다. 이해가 간다. <외출>과 <연애시대>에선 금지된 사랑과 이혼이라는, 그때도 지금도 20대 초반의 배우가 쉽게 다다를 수 없는 선택지를 집어들었다. <클래식>에서마저 손예진은 1인2역을 소화했다. <무방비도시> <아내가 결혼했다>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시절의 손예진은 또 어떠한가. 손예진은 사회 통념이 개인의 주관을 포섭하지 못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끝내 스스로의 자유를 관철해내는 여성들을 소환했다. 이 승리는 모든 평자들이 입을 모아 극찬한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의 2016년에 절정을 이룬다. 근래 손예진이 드라마에서 연기한 여성들 또한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다. 손예진은 열심히 노동하고 열심히 사랑했다.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는 커피 전문 회사의 ‘가맹운영팀 대리’다. 그의 직종과 직급은 배역의 성격은 물론 연애의 형태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서른, 아홉>의 미조 또한 피부과 의사라는 직업과 계급이 그의 여러 선택을 납득하게 만들었다. 시대가 호출하는 여성의 얼굴을 24년간 새긴 손예진은 다음과 같이 지난 시간을 요약한다. “사람은 능동적이어도 배우는 수동적이다. 시대에 맞춰 작품이 나오면 그 기회를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까. 여성배우라면 누구든 기회의 한계를 느낀다. 그 한계 안에서 매번 다른 얼굴을 꺼내고 싶었다. ‘여성 주도 서사’, ‘주체적 여성’과 같은 키워드가 대수로웠던 시기도 지났다. 여성 배역이 남성의 상대역에 갇히지 않고 온전한 삶의 주인공으로서 자기 의지를 가지는 게 당연해졌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옛 작품들은 지금 다른 울림을 주길 기대한다.”

- 7년 만의 스크린 복귀다. 모처럼 영화 현장에 출근하는 만큼 첫 촬영의 기억도 생생할 것 같다.

첫 촬영날 영화의 오프닝 신을 찍었다. 다른 인터뷰에서 여러 번 말한 “비싼 장어를 다 보내고”를 찍은 날이다. 감독님은 장어를 강조하지 말라고 디렉션을 주셨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나한텐 장어가 중요했다! 안 그래도 박찬욱 감독님과의 첫 촬영이라 긴장은 되고, 입에 붙는 억양과 대사 패턴은 나름 정해져 있다 보니 모든 순간이 예사롭지 않았다. (웃음) 여러 테이크를 거치며 톤을 세심하게 조정해가는데 새삼 ‘그래, 이게 영화 현장이지. 이게 배우가 현장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지’ 싶더라. 미리가 나름 분위기 메이커 아닌가. 그날 찍은 다른 장면들은 최대한 화면에 여백이 없도록 분주히 움직였다. 음식도 챙겨주고 테이블도 정리하는 만능 주부처럼 보이고 싶었다. 미리가 만수(이병헌)에게 댄스화를 건네 받는 장면에서 대뜸 “여보오~” 하면서 애교를 부리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순간이 미리를 잘 설명하는 순간이었다.

- 이전에도 임권택, 허진호, 안판석 등 한국의 거장 감독들과 협업한 바 있다. 박찬욱 감독의 현장에서만 느낀 손길이 있다면.

내가 대구 출신이다. 고3 때까지 대구에서 자랐는데 내 안에 미세하게 남아 있는 경북 방언이 있다는 걸 박 감독님과 후시녹음을 하며 처음 알았다. 감독님이 귀신같이 지적하는 특정 발음이 나에겐 너무 어색하더라. 언어의 전달 방법을 계속 파고들었다. 사실 연기를 할 때 문장에서 특정 단어의 발음이나 강세를 염두에 두며 대사를 뱉지는 않는다. 대사를 캐릭터답게, 혹은 손예진답게 전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하기를 선호했다. 그런데 <어쩔수가없다>를 통해 정통파가 좋고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정말 원초적인 경험이었다.

- 이경미 감독이 각본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봐도 어딘가 이경미 월드스러운 데가 있다. 듣자 하니 <어쩔수가없다> 시나리오가 <비밀은 없다>보다 먼저 나왔다던데.

나도 그 생각을 했다. 비슷한 지점을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무언가 이경미 감독님의 사르카즘이 글에서부터 느껴졌다. 가령 부부 싸움 도중 “너도 잘생겼잖아!” 같은 대사는 누가 들어도 이경미 감독님이 쓴 말이다. 돌아보면 <비밀은 없다>도 박찬욱 감독님이 제작한 영화라 이번 작품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 캐릭터에게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며 음악으로 배역에 대한 이미지를 연상하길 즐긴다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 과정을 거쳤나.

감정신을 위해 유장하고 비극적인 첼로 조곡 같은 클래식음악을 몇곡 찾아 듣긴 했는데, 전만큼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지는 않았다. 설거지하거나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장면을 찍을 땐 굳이 음악이 필요하지도 않고. (조금 생각하다가) 연기 패턴이 바뀐 걸 수도 있다. <어쩔수가없다>에서 가져가고 싶었던 요소는 현실감이었다. 그사이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 않았나. 삶의 경험이 어떻게든 연기에 묻어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전날까지 육아하다 현장에 가면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지. 시원, 리원을 연기한 (김)우승이나 (최)소율이는 실제 내 아이보단 나이가 많지만, 어느 순간 이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내 아이가 크면 어떤 모습일지를 그려보게 된다. 청소년 배우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과 달라졌다. 이렇게까지 카메라 밖의 인생과 배역이 오버랩되는 경험도 처음이다. 덕분에 한결 편하게 촬영에 임했다.

- 미리는 자극에 끊임없이 반응하며 장면의 리듬을 주도한다. 누가 말을 걸면 말장난이든 진지한 대화든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사람이라 대화 핑퐁 장면도 많다.

미리가 에너지가 넘친다. 낙천적인 데다가 취미 부자고 사람 만나는 것도 참 좋아한다. MBTI로 말하면 파워 ‘E’(외향형)다. 사람이 참 그렇다. 여유롭고 좋기만 할 땐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없다. 위기가 닥쳐서야 그 대응 방식을 통해 비로소 성격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드러난다. 미리는 만수가 실직한 이후 일하기로 결심한다. 부동산 계획을 다시 세우고 일자리도 구한다. 다시 MBTI로 돌아가면 현실의 나는 파워 ’J’(계획형)다. 고민도 많이 안고 사는 편이고 통제 바깥의 상황이 닥치면 굉장히 힘들어한다. 그런데 미리는 명쾌하게 살림을 재정비한다. 그리고 만수의 비밀을 알고 나서도 본인이 힘들지언정 생색내지 않는다. 이렇게 강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미리가 비현실적인 캐릭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현실로 눈을 돌리면 내 주변에도 미리 같은 이들이 있다. 어떻게 저렇게 적응을 빨리 할까 싶은 사람. 모든 걸 괜찮다며 넘길 수 있는 사람. 내가 갖지 못한 속성을 지닌 이들이 종종 부러웠는데 미리를 연기하며 대리만족했다.

- 그렇게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는 장면의 절정이 댄스 파티 이후의 부부 싸움 시퀀스가 아닐까. 귀여운 분장을 한 채 다투는 상황 자체가 웃긴데 정작 둘은 필사적으로 서로의 부부관계를 돌아보니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대사가 진짜 많았고 액션 연기도 필요했다. 오해에서 비롯된 감정 다툼이 오가고, 불신과 확신이 동시에 일어나는 등 감정의 레이어가 무척 많았다. 촬영 전엔 내가 생각해간 감정을 감독님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내심 궁금했는데 다행히 모두가 재밌게 마무리한 장면이다. 예상보다 즉흥연기도 많이 들어갔다. 가령 만수가 내는 개 짖는 소리도 현장에서 탄생했다. 이렇게 합을 맞추는 경험은 또 낯설었다. 즉석에서 만들어간 말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던 와중에 감독님의 디렉션이 빛을 발했다.

- 만수는 절대 미리를 못 이길 것 같다.

만수가 존경할 만한 모습을 미리에게 그간 보여주지 않았을까. 친자식이 아닌 아이도 똑같이 사랑하고, 가장으로서도 허튼 행동 없이 가족을 부양했으며 무엇보다 자기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겠지. 미리가 그릇이 큰 여자라는 걸 촬영 당시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알았다. 작은 일엔 전전긍긍하지만 큰일엔 대범하다. 감독님도 영화에서 미리가 가장 성숙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려주셨다.

- 하기야 미리가 만수를 떠날 수도 있었다.

그건 알 수 없다.

- 영화의 결말이 있는데도?

역시 모르는 거다. 미리의 마지막 표정이 의미심장하지 않나. (웃음)

- 그렇다면 그 표정을 묻겠다. 형사들이 두 차례 집으로 찾아올 때마다 미리의 리액션숏이 장면을 매듭짓는다. 첫 방문과 두 번째 방문 사이 미리가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정도가 다르다 보니 미리의 표정이 윤리 심판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의도한 부분이 있었나.

시나리오엔 미리의 감정에 대한 별도의 지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형사의 두 번째 방문에 미리가 짓는 표정에 관해서는 감독님과 해석의 차이가 있었다. 감독님의 디렉션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포커페이스로 여지를 두는 편이 맞다고 보았다. 미리가 표면적으로 동요하지 않아야 집에서 벌어질 수 있는 더 큰 혼란을 일단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감독님이 내 의사를 반영해주셨다.

- 리원의 첼로 연주를 문 밖에 쪼그려 앉아 듣는 미리의 마지막 숏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서글픈 장면 중 하나였다. 대사 없이도 정조를 표현해야 하니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편집됐지만 사실 그 뒤에 보다 결말을 열어두는 장면을 찍기도 했다. 미리와 만수는 모든 걸 포기해도 리원의 첼로 교습만은 시키려고 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이 미리의 책임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만수의 일을 알아챈 후 내리는 결단에는 ‘어쩔 수가 없는’, 엄마로서의 자괴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첼로 연주를 들으며 훅 밀려왔을 것 같다. 그리고 허무하지 않았을까. 이 연주 하나를 듣기 위해 모든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당시 무슨 생각으로 카메라 앞에 섰는지도 아득할 정도로 마음이 복잡했다.

- <취화선> 촬영 당시 최민식 배우로부터 받은 가르침,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잘해야 돼”를 종종 배우 생활의 지침으로 이야기하더라.

정말 신기한 게 뭔지 아나. 선배의 그 조언이 정확히 내 차기작에 등장한다. 심지어 내 대사다. 연기지만 내 입으로 이 말을 누군가에게 전할 줄이야. 이 대사를 해보니 상대를 향한 애정이 없으면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더라. 여전히 그 말이 뼈저린 직언으로 다가온다. 열심히만 하자, 과정이 중요하다와 같은 말은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당시에는 막연했던 그 말의 무게가 점점 크게 다가온다.

- 말이 나온 김에 예정된 두편의 차기작을 귀띔해준다면.

<스캔들>(가제)은 한국 멜로의 중요한 이름인 정지우 감독님과 함께했다. 오랜만의 사극이라 쉽지 않았는데 조씨 부인은 이런 캐릭터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다. 단언컨대 <버라이어티>는 역대급 변신이다. 캐릭터의 외양을 포함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격 그 자체를 선보일 예정이라 마음이 두려움 반 설렘 반이다.

미리 안의 블루

<어쩔수가없다>가 <비밀은 없다>를 불가피하게 연상시키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면 그건 미리의 옷 때문이다. 채도가 높은 블루, 바이올렛 톤의 옷을 입던 <비밀은 없다>의 연홍처럼 <어쩔수가없다>의 미리 또한 영화 내내 거의 파란 멍이 든 것 같은 옷만 입고 등장한다. 심지어 미리는 브라운 톤의 옷을 입다가도 경찰서에 갈 일이 생기자 다시 푸른 코트를 걸치고, 새파란 휴대폰 케이스를 착용하며 파란 주전자에 차를 내온다. “감독님은 무채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 그런데 나는 평소에 보라색, 청록색 옷을 절대 안 입는다. 사실 ‘이런 옷을 집에서 입는다고?’ 싶은 옷도 몇벌 있었다. (웃음)” 그런데 손예진과 블루는 역사가 깊다. 잊지 말자. 태초의 손예진에겐 ‘포카리스웨트’ 블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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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엠에스팀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