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결말 내용까지 포함한 스포일러 인터뷰입니다.
띄어쓰기 없는 제목부터가 함정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니! 25년 직장 생활 끝에 해고된 만수(이병헌)에게는 분명 다른 길들이 있었다. 집을 팔 수도, 아내의 경력을 되살리는 데 힘써볼 수도, 조금 비굴해지긴 해도 장인, 장모의 도움을 받아볼 수도 있었겠으나 남자는 모든 가능성을 외면한 채 오직 하나의 길만을 선택했다. 경쟁자들을 죽여서라도 예전의 자기를 되찾는 것이다. 해고와 함께 해체된 정체성은 달리 말해 가장, 남편, 아버지라는 진부한 이름이다.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The Ax)를 원안 삼은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이 약 20년 전에 낙점해, <스토커>(2013) 이전부터 <도끼>라는 제목의 영어영화로 시나리오를 기획한 바 있다. 먼저 영화화를 시도한 덕분에 판권을 보유하고 있던 코스타 가브라스 부부가 이 과정에 기꺼이 협업했고 박찬욱 감독은 크레딧의 말미에서 그 수고로움을 향한 헌사를 남겼다. 여기에 김우형 촬영감독, 배우 이병헌, 이경미 감독과 <HBO> 시리즈 <동조자>를 함께한 작가 돈 매켈러 등이 합류했으니 박찬욱 감독 필생의 작업이라 할 만하다.
시간의 포화를 견디는 동안 <어쩔수가없다>가 원작 소설의 우울하고 건조한 묘사에 블랙코미디를 채색한 것만큼 새로운 자태가 더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적 몰락의 희로애락을 연주하는 박찬욱의 사계다. 그의 한국은 언제나 일견 가상의 영화적 장소에 가까웠고 <어쩔수가없다>의 교외엔 환상처럼 흘러가는 계절이 배경막으로 더해졌다. 나루세 미키오를 부르는 가을의 부운 위로 묵직한 채도를 더한 이번 신작은 북한식 권총, 엉뚱한 2인조 형사,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최고급 종이와 LP와 위스키 애호가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기어코 방백하는 골계미 넘치는 인물들을 흐트러진 낙엽들처럼 수놓는다. 그 가운데 익히 사랑받는 대담한 매치컷과 사물의 시점은 더욱 과감해졌고, 감정적 이입과 관찰자적 중립을 하나의 보폭 안에서 성큼 내딛는 역동적 카메라워크가 어지러운 황홀경도 안긴다. 감독의 작업을 종합하건대 <어쩔수가없다>는 한층 직접적으로 세태를 불러내고 정념을 걷어낸 영화처럼 보이는 한편, 숏의 언어는 더욱 완숙해져 비범한 형상의 악보를 이룬다. 30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개막작으로 참석한 박찬욱 감독과 해운대 인근에서 영화제 공식 일간지 제작을 겸해 두 차례의 인터뷰를 가졌다. 가을의 당도를 체감하며 나눈 두 번의 대화를 종합하여 전한다.
- 행복한 중산층 가족의 모습에서 영화가 시작합니다. 사이 좋은 부부와 적당한 터울을 이루는 두 자녀, 리트리버 두 마리까지 이른바 이상적인 정상성을 구현한 오프닝 시퀀스가 박찬욱 영화의 도입부라는 점을 낯설게 느끼는 관객들도 있겠습니다.아주 바람직한 가족의 초상을 담은 단편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어요. 따로 떼놓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완결된 시퀀스를 만들자는 거였는데, 여기서 필요한 단편의 삽화다움이란 작지만 불길한 암시를 심는 것이죠. 정상 가족의 풍경화 속에 만수(이병헌)의 알코올 문제가 불쑥 힌트로 주어지는 겁니다. 영화의 끝에서 두 번째 신에서 다시 집 마당에 나온 가족의 모습이 오프닝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분위기 속에서 대구를 이루게 하고 싶었어요. 결국 첫 마당 신에서 마지막 마당 신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영화인 거죠.
- 물질적 가치가 삶을 영위하는 근간이 되면서 경제적 부침을 마주한 개인이 전보다 훨씬 민감하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세태가 <어쩔수가없다>의 배경입니다. 절대적 가난을 제재 삼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제가 보기엔 인물들이 너무 좋은 집에 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요!
집의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해선 고심이 많았던 게 사실이예요. 만수의 집은 지방 타운하우스 동네에서도 외곽에 자리한 오래된 주택으로 설정했어요. 중심에서 적당히 밀려나길 선택하면서 얻어낸 집이고 유년의 집을 되찾았다는 개인적인 의미도 있을테니 이것마저 잃을 수는 없다는 고집을 부릴 법하겠다고 봤어요. 온 재산을 쏟아부어 집 사고 리모델링까지 했을 테니 은행 빚도 많은 것일테고. 범모(이성민)는 장인 집이라는 설정이기도 하죠. 한국인들은 이런 부동산적 가치의 뉘앙스를 나름대로 셈할 텐데 외국인들이 보기엔 또 어떨지 모르겠네요.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엄청난 부자들 아니냐고 더 오해하면 안될 텐데.
- 문 제지의 선출(박희순) 역시 섬 속 산장에서 중년의 ‘로망’같은 것을 실현하는 바람에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한명도 없는 영화라는 점도 특징입니다.
사실은 초기 각본 단계에서 한명이 더 있었어요. 원래는 죽는 사람이 4명이었고 한 사람이 아파트에 산다는 설정이었죠. 새벽마다 조깅을 하는 남자예요. 만수가 그걸 지켜보다가 총을 들고 으슥한 데까지 따라가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 남자가 만수를 먼저 알아봐요. 포토그래픽 메모리의 소유자라 옛날에 만수가 ‘올해의 펄프맨 ’상 받을 때의 얼굴을 기억하는 거죠. 얼떨결에 대화를 나누고보니 글쎄 남자가 최근에 취직을 했다는 거예요. 안 죽여도 되겠다 싶으니 안도한 만수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까지 꿇고 축하한다고 펑펑 울어요. 그런데 남자가 이어서 말하기를, 지금 회사는 너무 작고 후져서 오래 있을 데가 못 되고 이직 자리를 알아본다고 덧붙이는 그런…. 실제로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하나 보여주고 싶어서 넣은 캐릭터인데 영화의 전체 구조상 만수가 계획하고, 죽이고, 처리하는 과정을 4명까지 이어가면 리듬이 쳐질 것 같아 지금 버전으로 다듬었을 뿐이에요.
- <3인조>와 <복수는 나의 것>의 노동자, 자본가 인물들을 생각하면 <어쩔수가없다>까지 묶어 자본주의 부조리극 연작으로 지도화해 볼 수도 않을까요? 다만 만수가 (자신이 블루칼라라 주장하는) 중간관리자라, 중산층 개인의 절망을 바라보는 영화의 조도가 한층 희극적으로 뒤틀려보입니다.
웨스트레이크의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당장 밥 못 먹을 처지의 사람이 아니죠. 제가 전세계 보편의 중산층적 모순을 말할 처지는 아닌데,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비교되는 시대에 갈수록 중산층의 욕망이란 것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아주 작은 전락도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까. 내 자녀의 교육이라든가, 내 보금자리가 목숨처럼 소중한 이유야 각자에게 있겠지만, 그걸 빌미로 연쇄 살인까지 정당화하는 캐릭터를 통해서 달리 보이는 것도 있기를 바랐습니다.
- 제조업이 몰락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미국 소설과 비교해 <어쩔수가없다>에 한국 사회의 풍속도로서 새롭게 반영된 것이 있을까요.
집에 대한 집착은 원작에는 없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남편은, 아빠는 이래야한다’는 상자 안에 갇힌 만수에게 짙게 깔린 가부장적 정서야말로 한국적인 지점인데 결혼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이병헌 배우가 미묘한 지점까지 잘 표현해줬어요.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웃게 되는 요소가 스스로를 ‘가장’이라고 일컫는 남성성에서 나와요. 우리말로는 가장이란 단어가 명확하게 있지만 해외 상영 시 영자막에선 ‘헤드 오브 패밀리’라고 풀어써야만 하는 하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절절하니 불쌍한 면도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비장하게 굴 때는 우스워지는 그런 거지요.
- 그런가하면 <어쩔수가없다>의 제지업 종사자들은 직업적 자아에 자신의 온 정체성을 일치시켜온 초상이기도 해요. 아날로그형 인간들을 대변하는 데가 있어 한편으론 연민이 갑니다. 직업적 자긍심과 어리석음이 묘하게 겹친 인물로 좀더 점잖고 우아한 버전으로는 <헤어질 결심>의 장해준 형사(박해일)도 있지 않을까요.
어느 시대든, 어느 직업이든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죠. 저도 남 얘기 같지 않고...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안 해요. 자기 직업이 곧 삶 그 자체인 사람은 가여운 데가 있죠. 실직하고 나면 껍데기가 되는 남자들에게 현명한 아내들이 삶의 여러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권하고 격려도 하는데 잘 들리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현실성도 부족하고 자꾸만 과거에 집착하는 남편들이 제 발로 비극을 끌어들이는 이야기인 거예요.
- 만수가 잠재적 살해 대상에게 모종의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은 왜 필요했나요.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거나 목격하는 남편들, 자녀에게 쩔쩔매는 아버지들, 그리고 할 줄 아는 것은 제지업 밖에 없는 ‘전문가’라는 코드로요.
다 비슷한 남자들이죠. 직업인으로서 선출은 조금 다른 가치관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만수처럼 살인의 비전문가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우선 관찰을 하고 꼼꼼히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살인이 어려워진다는 역설을 주고 싶었죠. <어쩔수가없다>에서 매끄러운 살인을 보여줄 필요는 없죠. 오히려 돌발 상황들, 그로부터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고요. 준비를 하면 할수록 일이 쉬워져야 하는데 이 경우엔 반대라는 점이 관객의 마음에 남기는 작용도 중요했어요. 주인공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본능적으로 ‘아, 저기서 좀 잘해야 할텐데’ 하면서 살인을 응원하는 셈이 될 때의 딜레마에 총력을 기울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아가씨> <헤어질 결심> <어쩔수가없다>에서 공통되게 비추는 여성 인물들의 미덕으로는 비극 앞에 다소 의연히 대처하는 적응력과 분별력이 있습니다. 남편을 향해 총을 겨눈 일촉즉발의 순간에 “실직이 문제가 아니라 실직에 대처하는 네 태도가 문제라고!” 하고 외치는 아라(염혜란)의 대사가 절창이었어요.
아, 저도 그런 게 좋아요. (웃음) 현실이라면 짧고 단순한 말을 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인데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서 여유 있게 대화할 때나 할 법한 말들을 한다는 게. 만수가 범모에게 총을 겨누고서 “너는 와이프의 현명한 제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잖아. 음악카페가 뭐 어때서!” 라고 어이없이 다그치는 순간도 비슷하죠. 사랑하는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겠다, 더 거칠게 말하면 대가를 치루어서라도 사내구실을 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남성성이 곧 사랑하는 가정을 붕괴시키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원작에는 없지만 주인공의 살인을 아내, 그리고 가족이 알게 된다는 설정을 넣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죠. 어쩌면 이 대목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결정적 요인일 겁니다.
- 고추잠자리 신에서 범모에게 하는 말로 볼 때 만수는 남의 허물은 잘 보면서 자기 것은 잘 못 보는 인간인가요, 아니면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 모순을 다 아는 인간인가요.
후자죠. 다 알고 있어야 하죠. 경쟁자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이것저것 저울질하며 합리화하긴 했지만 할 수만 있으면 언제라도 포기하고 싶다고 믿는 거예요. 그런데 덫에 걸렸죠. 한번 범죄에 뛰어든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됐고, 선출 앞에서 읊조리듯이 이미 두 명이나 죽은 뒤부턴 이제와 포기하면 앞선 이들의 죽음이 헛된 개죽음이 되는 셈이니까. 스스로 자처한 진퇴양난의 상황인 거지요.
- 구제역 때문에 키우던 돼지들을 모조리 산 채로 묻어야 했던 만수 아버지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가 더 있었을까요.
거의 대부분 찍은 대로 쓰긴 했는데, 아버지의 총이 북한제 권총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형사 코미디 분량이 좀 더 있었죠. 두 형사가 점입가경의 오답으로 향하는 시퀀스인데, 조폐 공사의 비리에 북한의 개입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국정원까지 나서는 거예요. 용의자의 동태를 살피는 모습은 퍽 예리한가 싶은데 만수 입장에서 보기엔 형사가 내는 결론이 황당하게 흐르는 거지요. 뜻밖에 완전 범죄가 되니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국정원까지 개입하면 결국 탄로 날까 혼란스럽기도 한 상황을 그렸어요. 다 찍어두었고 배우들이 연기도 잘했지만 부조리한 코미디가 지나치게 극대화되면 그동안 쌓아올린 최소한의 개연성마저 무너질 수 있겠다 싶어서 없앴지요. 그냥 둘 걸, 싶기도 하고. (웃음)
- 동시대적 주제를 다루는가하면 가족드라마 내 남성성의 분투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분히 고전적인 구조인데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원전 외에 주목한 또다른 영화는 없었나요.
부끄럽게도 이 작품을 하겠다고 한참 각색을 하고 있는 도중에야 로버트 헤이머 감독의 영화 <킹 하츠 앤드 코로넷>(1949)을 알게 되긴 했죠, 주인공이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귀족 가문의 후계자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는 설정의 블랙 코미디예요. 제가 한참 각색에 몰두하던 중에 주위의 누군가가 이 작품도 아냐고 추천을 해준 겁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납치범 백 선생(최민식)을 유족들이 한 명씩 응징하는 장면을 쓸 때 제게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물론 그땐 저조차도 <오리엔트 특급살인>과의 유사성을 애초에 의식하며 쓴 거지만.
가족의 집에 내려앉은 잔영이란
- 감독님의 영화에선 매치컷이 갖는 위상이 있습니다. 유려한 전환의 기능 이상으로 강렬한 미쟝센으로 각인된다고 할까요. 이번엔 특히 제지 공장과 연결되는 숏이 독특한데요.
가족의 한때를 보여주는 신에서 해가 서서히 저무는 이미지부터 시작하지요. 근경에서 원경까지 단계별로 인공조명을 여럿 설치한 다음 시간차를 두고 서서히 어두워지게 설계했습니다. 현실이라면 우리 눈엔 해가 단숨에 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요. 비현실적인 꿈결의 느낌을 주고자 한 거죠. 그다음 이미지가 서서히 일그러지면서 제지 공장 수조 위의 스크루 속에 휘말리는 느낌으로 연결됩니다. 공장 답사 중 착안했어요. 거대한 수조에 물이 쏟아지고 스크루가 돌아가면 그 위로 펄프 덩어리들이 떨어지고 분쇄되는 광경이었죠.
- 문 제지의 면접을 권유받은 만수가 마트의 중간 관리자에게 작업복을 빼앗기다시피 하는 장면 말인데요. 신발과 장갑까지 벗고 사라진 남자의 자취가 한 번의 죽음을 알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자 직원들 소리가 들리니 상황 상 만수는 빨리 도망가려고 그랬겠지만 비유적으로는 실로 그렇죠. 이미지로서 인물들에게 들이닥친 가혹한 운명의 힘 같은 것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미리가 은행에서 온 체납 경고장을 읽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위에서 아래로 순식간에 휘어지면서 강한 역광이 치고 들어오지요. 만수가 면접을 볼 때 집요하게 햇볕이 따라오는 장면은 사과나무를 심을 때 아들이 햇볕을 가려주는 장면과 쌍을 이루게 하고 싶었고요. 기본적으로 김우형 촬영감독이 카메라로 새로운 테크닉을 시도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주저도 없고 대담하기도 한 촬영감독이라 그래요. 사람 본연의 기질은 조용하고 재미도 없지만. (웃음) 디지털 후반작업에서의 숏 사이즈 조절이나 흔들림 효과 같은 것은 기술이 워낙 발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 미술의 양식성은 감독님의 전작들보다 한결 순한 인상이지만, 최근의 한국영화 스크린에서 보기 힘든 강한 색감과 대비감을 낯설게 느끼는 관객도 있지 않을까요.
1970년대 미국 영화에 자리잡은 테크니컬러의 느낌을 원했어요. 사실은 오랫동안 필름 촬영을 고려했던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즈음에 국내 필름 현상소 하나가 다시 열었거든요. 지금은 다시 닫은 걸로 알고 있는데 하여간 그때 테스트를 많이 했어요. 우리가 막연하게 감으로 생각했던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필름이 만드는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죠. 똑같은 조명, 똑같은 피사체를 디지털로도 찍고 필름으로 찍어서 비교해가면서요. 물론 저는 언제나 필름 룩을 원해왔습니다. 이번엔 보다 정확한 데이터와 테스트를 통해 그 당위를 얻고자 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디지털 촬영을 택했지만 이전 작품들보다 컬러와 콘트라스트를 확실히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즘에는 흔히들 품위 있는 화면을 만든다고 할 때 채도가 높으면 촌스럽다고 생각하는데, 자유롭게 접근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디지털영화에 필름 룩을 입히는 그레인 레이어 기술도 한층 진화했더군요. 이를테면 1960년대에 출시된 특정 감도와 특정 밀리미터, 특정 브랜드의 그레인을 탁 짚어 구현해주는 정도니까. 배경과 피사체를 세밀히 구분해서 적용할 수도 있고요. 김우형 촬영감독, 컬러리스트와 함께 아주 면밀히 디지털 후반 작업에 공들였습니다.
- 색은 계절 변화에서도 두드러져요. 감독님의 영화 중 이토록 초록의 영화, 그리고 사계절의 영화가 있었던가요.
이번 작품에서는 자연 환경이 많이 등장하고 식물에 대한 주인공의 사랑이 그의 범죄 행위와 잠자코 대비를 이뤘으면 했어요. 꽃과 풀이 절정을 이룬 완연한 여름으로 시작해서 현란한 색채를 입은 단풍이 첫 번째 살인의 배경이 되고, 낙엽을 거쳐 앙상한 나뭇가지가 보이는 겨울의 초입까지 식생의 변화를 담았습니다. “와라 가을아!”가 만수의 첫 대사지요. 이때 만수의 바람은 늦여름 더위가 가시고 식물이 열매를 맺는 결실의 계절로 가고 싶다는 것일 텐데 실제로 닥쳐오는 가을은 상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인 거예요.
- 사체 훼손의 현장으로 유리 온실을 택하는 남자라는 점이 만수에 대해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온실은 곧 만수의 내면인 셈인데 그곳까지 시체를 끌고 들어오는 지경에 이르면 다분히 무언가에 잠식된 상태인 거겠죠. 온실 미술도 집만큼 어려웠어요. 현실적으로 적당해 보였으면 했는데, 대단히 특별한 취향을 지닌 사람은 아니지만 애착을 갖고 직접 아늑하게 가꾼 온실인 거예요. 특히 그가 몰두하는 분재라는 행위는 좀 양면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할지, 인위적으로 나무를 잘라내고 구부리는 점이 폭력적인 한편 지극한 정성을 쏟아 자연 상태보다 훨씬 오래 살게 만드는 애호의 행위이기도 해요.
- 앞서 공개된 연여인 작가 포스터와 공명하는 초현실적인 신도 온실에서 두드러집니다. 만수의 분재 안에 아들의 미니어처가 보인다든가 하는.
꿈이니까 거의 자유 연상처럼 썼어요. 이번 시나리오를 쓸 때 특히나 떠오르는 대로 빠르게, 마치 방금 꾼 꿈을 받아적듯이 쓴 신입니다. 왜 그런 이미지가 필요했느냐를 설명하는 건 좀 사후적인 일이 되겠는데 아들과 아버지로 맺어진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죠. 만수가 멋진 아빠 놀이에 스스로 심취하는 구간이 있는데, 친구와 핸드폰 도난 범죄를 저지른 아들을 경찰서 앞 계단에서 붙잡아 위증하라고 주입하잖아요. 팔려고 내놓은 집에 눈독 들이는 동네 친구한테 엄포를 놓는 식으로 제압도 하고. 딴에는 남성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건데, 왜냐하면 앞서 완수한 두 차례의 살인으로 얻은 자기 효능감이 무너졌던 가장, 아버지로서의 자신감도 일으켜 세운 것처럼 보였으면 했어요. 그래서 아들의 담배를 발견한 뒤에 사과나무를 심는 장면에서도 “엄마 몰래 네가 직접 버려라” 하고 제법 쿨한 태도죠. 만수의 모든 행동이 결국 제 무덤을 파는 셈이 되는, 서사적 경로를 엮고 싶었습니다. 아들이 그 담배를 피우려고 지붕에 올라갔다가 온실 천장을 통해 아버지의 범죄를 목격하게 되는 것처럼.
- 가족들이 만수의 살인을 눈치 챈 이후의 집안 곳곳을 잇는 교차편집은 그중 누군가의 꿈처럼 몽환적으로 연결됩니다.
악몽을 꾸는 아들의 모습과 함께 전기톱 소리를 넣었습니다. 만수가 실제로는 전기톱을 써서 고시조를 처리한 게 아니지만 아들에게는 깊이 자리 잡은 거예요. 시원(김우승)의 꿈과 트라우마에 방점을 두면 이 가정은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결말로 향하는 게 자연스럽겠지요. 낙관적으로 전망한다고 해도, 적어도 시원이만큼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 되겠죠. 가족구성원 각자가 저마다 데미지를 입은 상태로 아주 어려운 투쟁을 겪어나가야 할 거예요.
- 부부가 아들이 훔친 핸드폰을 함께 마당에 묻는 장면은, 후에 두 사람이 더 큰 범죄의 증거를 은닉하는 상황의 축소판 같아요. 무언으로 방조에 동참하되 전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게 된 미리(손예진)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가족의 미래를 놓고 관객이 몇 갈래의 상상을 할 수 있을 텐데 그 상상을 돕는 재료들은 영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죠. 미리가 마지막에 사과나무까지 심었는데 어떻게 집을 파냐고 남편에게 말하는 장면은 우리가 합심하여 이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겼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혹시 새 집주인이 와서 땅을 파다가 실체가 드러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책일 수도 있겠죠.
- 사과나무라는 품종도 중요했나요.
빨갛고 탐스러운 선악과인데 숲속 뱀의 이미지하고도 연결되니까. 전 신앙도 없는데다가 이제는 기독교적 의미를 넘어 보편적 상징으로 자리 잡은 감도 있으니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만수가 도시를 드나들 때 그가 사는 구종시로의 진입로 표지판에도 지역 특산품으로 사과가 등장하지요.
- 겨울비와 함께 영화 말미에 리원(최소율)의 첼로곡이 처음으로 오롯이 연주되는 까닭을 곱씹게 됩니다.
리원의 연주는 돌아온 개들을 위한 환영 콘서트죠. 자기 부모나 오빠에게 들려주려는 게 아니라.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볼 때 굳이 멈추거나 안 된다고 거부하지는 않지만 환영하는 뉘앙스도 아니에요. 묘사하자면 그것은 겨우 용인한다 정도의 표정일 뿐인거죠. 부모가 재능을 의삼할 만큼 언제나 지루한 파편의 반복밖에는 들려주지 않던 아이가 문득 성숙한 연주를 들려줄 때, 과연 이 친구가 가정의 진실을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질문할 수도 있겠지요. 의미 없어 보였던 스케치북의 추상화가 알고 보니 정교한 악보였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그림 악보는 실제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이정현 첼리스트의 사례를 반영한 겁니다. 한편 리원이는 종종 주변인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식으로 뜻 모를 말을 하는데 예언하는 어린 샤먼처럼 보였으면 했달까요. 가장 어리고 약한 인물일수도 있지만 반대로 초월적 존재로도 보였으면 했어요. 마지막에 출근하는 만수에게 리원이 사과나무에 벌레가 끓어서 다 죽어간다고 하지요. 아내와 아들이 돼지 바비큐에 왜 그리 질색하는지, 개들이 사과나무 근처에서 노는 것에는 또 왜 이렇게 펄쩍 뛰는지 묘하게 신경이 쓰였던 만수가 리원의 말까지 듣고는 차에 타서 갸웃거리며 곱씹는 거죠. 이전과는 결코 같은 지점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려주는 잔여물들이 남는 겁니다.
- 그러고 보니 어른을 따라하는 리원의 말투가 신이 씐 어린 무당의 목소리 같기도 하네요. 연기 디렉션은 어떻게 한 건가요.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서 어른 배우도 머리 아파하는 상황인데 제가 원하는 만큼 보통 사람과 다른 독특한 어조를 어린이 배우가 현장에서 완벽히 해내긴 어려웠어요. 우선 평범하게 말하듯 연기하고 나중에 후시녹음(ADR) 작업을 했지요. 그런데 아주 잘했어요. 유튜브에서 많은 영상을 찾아보면서 엄청나게 연습을 해왔고 거기에 어조를 다양하게 바꿔보는 디렉션을 더해가면서 같이 만들었죠.
- AI 기술로 고도화된 공장에 혼자 남은 만수를 볼 때까지만 해도 인간으로서 어떤 측은지심이 듭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무가 잘려나가는 숲으로 장면이 전환되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져요. 인간 중심적인 자본주의 풍자극이 간과한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훅 던져지는 것 같습니다.
선출이 유튜브에 출연해서 제지 회사가 숲을 없애는 게 아니라고 강조하잖아요. 종이를 만드는 목적으로 숲을 조성하고 돌보기에 재생의 선순환이 이뤄진다고. 말하자면 그 입장과 대치되는 장면일 텐데 제가 제지업을 비난하려는 입장은 결코 아닙니다. 이미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순수한 이미지의 표면으로요. 기계가 나무를 자르고, 움켜쥐고, 끌고 가고, 나무의 속살이 가루가 되어 날리는 난폭하고 폭력적인 움직임을 보자는 거죠. 와이드 숏에서는 거대한 나무가 휘청거리며 쓰러지고요. 나무를 자르고 운반하는 중장비 운전자들이 실제로는 운전석에 선명히 비치는 푸티지였는데, VFX 단계에서 다 깨끗이 지워서 더욱 로봇처럼 보이게 만든 겁니다.
- 마지막 VFX 단계까지 고민하다가 반영하게 된 아이디어가 있다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부터 언급하신 바 있는데, 이 지점일까요.
아, 그건 다른 부분이에요. 마지막 장면에서 공장에 출근한 만수가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면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할 지 길 잃은 사람처럼 천천히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는데, 멀리서부터 머리 위의 불이 차례로 소등돼요. 편집과 VFX까지 다 끝난 상태에서 그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서 이게 가능하냐고, 꼭 해야 한다고 부탁했던 기억이 나는데… 베니스 심사용 패키지에는 못 들어갔죠. AI의 노동에는 전등이 필요 없습니다. 깜깜한 공장에 만수가 혼자 들어와서 처음 하는 일이 인위적으로 불을 켜는 것이에요. 인간이 왔다는 신호 같은 것이지요. 면접장에서 공장장이 불필요하다고 일러두었고 자기도 알아들은 척해놓고서 굳이 종이도 때려보잖아요. 고집을 못 버리는 거죠. 그의 머리 위로는 기계가 이미 똑같은 일을 하고 있고. 그러고는 AI가 만수를 쫓아내듯이 먼 곳에서부터 전등이 꺼집니다. 공간의 덮치는 어둠이 곧 하나의 힘인 겁니다. 만수가 등 떠밀리듯 카메라 앞으로 다가오면 이어서 나무들이 무자비하게 잘려나가는 숲으로 이동하고요. 생태적 관점일 수도 있고 혹은 나무에게 다시 인간을 대입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어요. 사람 ‘모가지’를 댕강 자르는 해고하고 비슷하다고. 가족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결심한 남자의 선택이 가정을 더 위기에 빠트리는 허무, 살인까지 동반했던 인간끼리의 안간힘이 AI의 등장으로 무의미해진 허무를 보고 싶었어요. <어쩔수가없다>는 이 두 가지 차원의 허무를 통과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요.